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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아산 UBF 성탄 제 2 강 메시지(누가복음1:57~80)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말씀 / 누가복음 1:57~80
요절 / 누가복음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죄를 이기는 분, 죄를 이기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해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기를 기도합니다.
1. 세례요한의 탄생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을 때, 부부 모두 나이가 이미 많아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부부에게 임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드디어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의 출생은 이웃과 친족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이 없이 살아 온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그동안 유대에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외심 있고 기도 많이 하는데 왜 아이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부를 불쌍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해석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이런 가정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가족 뿐 아니라 이웃과 친족에게도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59~66절을 보십시오. 남자 아이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 하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딸은 한 달 이내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름 지을 때, ‘사가랴’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가랴jr’가 전통이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1장 13절의 가브리엘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태어남이 부모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1장 14절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태어남과 그의 성장, 그의 많은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명의 사람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과 성장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례요한의 탄생과 삶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자기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를 마음으로부터 바라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위대성, 자기의 특별함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인생은 반드시 ‘내 삶이 허무하게 소모되었다’ 깨닫는 날이 옵니다. 자기의 위대함이 드러내기를 바라는 삶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부담과 고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위대하여 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 삶의 행로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청년 시절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청년 시절에 성경을 깊이 많이 읽고 매일 수시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고자 결단하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면서도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보지 못하였으며,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밤에 추위를 견디고 낮에는 강렬한 태양과 더위를 경험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젊어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은 자기가 없고 오직 메시야를 드러내는 인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한 가지를 전하는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에게 훌륭하다 위대하다 칭찬받아봐야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익하다 하시면 그것은 끝입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하다 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진정 위대한 삶이며,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삶입니다.
2. 찬송하리로다
67절을 보십시오.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순종하여 지었을 때, 사가랴의 혀가 풀렸습니다. 사가랴는 열 달 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연단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동안 하나님의 전에서나 숙소에서 늘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6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은 기계적이지 않았고 형식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온 마음으로 영혼에서 우러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입으로만 목으로만 드리는 찬양도 있겠지만, 온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이 좋은 찬양입니다. 신약시대에서 성령의 역사는 진심을 가지고 찬양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맛보는 사람은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사가랴의 성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찬양! 사가랴의 성탄은 찬양에서 시작하여 찬양으로 진행하고 찬양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찬양합니까? 아들을 주셔서 찬양하는 것입니까?
사가랴는 세례요한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인류 구원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가랴가 말하지 못하는 연단을 받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원대한 인류구원을 보는 영적인 눈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례요한의 잉태와 탄생이 모두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사가랴는 세례요한이 메시야 예수님을 증언하는 선구자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라갸는 세례요한의 잉태와 출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만민구원역사가 실체화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세상 만민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주신다! 메시야 탄생의 기쁜 소식과 그로인한 감격이 마음에서 솟아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신앙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충분히 감동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감사하고 감동받을 만한 절실함과 기도가 있는 사람이 충분한 감동을 받습니다. 사가랴는 자식이 없는 유대인의 치명적 약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결핍 속에서 오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끝에 하나님께서 기적의 아들을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기도와 개인적인 구원을 맛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가?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모르는데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조금 은혜 받기만 하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모를 것이다. 남들은 내가 보는 이 은혜의 세계에 무지할 것이다 생각합니다. 은혜 입을 때마다 왜 사람에게 달려갑니까? 사람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제어하면서 만족을 느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가지고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모이면 자랑합니다. 만나면 자기 자랑합니다. 왜 자랑하고 싶어 합니까? 사람들 속에서 자기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자기만족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세계에만 집중하여야 합니다. 주 하나님께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속량은 노예를 거래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속량의 의미는 ‘노예를 값을 주고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우리 인생이 죄의 노예상태임을 알았습니다. 다른 인생을 주장하고 제어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고, 인정과 동정에 목말라하는 것은 죄의 노예가 보여주는 가장 흔하고 뚜렷한 증상입니다. 감사가 없고 찬양이 없고 비난, 시기, 질투, 냉담, 오만, 성급함은 죄의 노예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내면의 본성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냉담하고 오만하며 감사없이 비난과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은 괴롭습니다. 인정받아도 또 받고 싶어서 목마르고 칭찬 받아 기뻐도 다른 사람도 칭찬 받으면 기쁨이 확 사라집니다. 청년들은 비전없이 이것 한다고 했다가 저것 한다고 했다가 불안 증세를 보입니다. 이것을 한다고 해도 안 될 것 같고 불안, 저것을 한다고 해도 안 될 것 같고 불안! 이것이 모두 죄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죄에 사로잡혀서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생의 죄 값을 치러주시러 오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가랴는 죄의 노예에서 속량해주시러 오시는 예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여도 죄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식이 없는 문제로 깊은 저주의식에 빠져보았습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하는 수많은 상처되는 말들을 참고 인내하면서 사람의 존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의 굴레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식, 사람들의 굴레도 그와 같이 벗어나기 힘든데 죄가 씌운 인생의 굴레는 얼마나 인생을 비참하게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에서 놓임받게 하신다니 감사와 감사와 또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 값을 치루는 속죄제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아사셀 염소와 같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다 사함받았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6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죄는 힘이 강합니다. 죄로 인하여 인생에게 찾아 온 죽음은 그보다 강한 것이 없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인간이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참선과 금욕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죄에서 벗어나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그런 노력을 가장 많이 하신 분이 최후에 고백한 것이 노력으로 죄를 벗어내지 못하였다 한 것입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죄는 인간이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도 그러합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어떤 적과 싸워서도 이긴 사람이 죽음에게는 모두 패하였습니다. 모든 인생은 죄와 죽음의 힘에 눌려 철저히 패배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면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지고 나서 그냥 1패 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에게 패하였으므로 죄가 끌고 다니는대로 질질 끌려 다녀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사람에게 인정을 구하고 사람만 보면 자기 자랑하고 세상을 향해서 비난하고 분노하고 스스로는 숨어서 또 죄짓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사람들만 보면 또 인정을 구걸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비난하며 삽니다. 그 존재에서 도무지 죄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인생에게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죽음에게 패배하였으므로 이길 힘이 없으므로 늘 죽을까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서 슬픕니다. 지금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도 죽을 것이므로 두렵습니다. 내가 죽을까봐 두렵습니다. 나의 인생의 생명 뿐 아니라 내 존재감만 죽어도 발끈 합니다. 내 자존심만 죽어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죄와 죽음에 패배한 인생의 실존하는 모습입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살기도 하고 두려워서 근심하고 두려워서 온갖 궁리와 염려 하느라 밥도 안 들어가고 소화도 되지 않습니다. 살아있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에 패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은 너무 강합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죄와 죽음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죄는 본성이야,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야 받아들여 순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죄는 강하게 사로잡아 인생을 더럽고 추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아 공포에 몰아넣고 모든 힘을 다 빼버립니다.
죄와 죽음, 이 강한 원수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죄보다 강한 분,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분이 오시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바로 죄와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사가랴는 강한 주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하므로 가장 존귀하신 분이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십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대신 죄 값을 치루면 인생들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므로 끝까지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값을 치루지 못하게 방해하였습니다. ‘그리하지 마옵소서’ 제자들을 통해서 죄 값을 치루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40일간 금식하실 때는 마귀에게 한 번만 절하라며 십자가 고난으로 인생들의 죄문제 해결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루는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신을 구원해보라며 훼방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을 이겼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을 힘없는 패배자로 규정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은 패배자가 아닙니다. 누가 십자가를 지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대로 죽으시면 죄가 이기고 죽음이 예수님까지 삼킨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이기고 완전히 다시 살아 주의 주,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힘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가랴는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 한 것입니다. 사가랴는 이 놀라운 일이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약속을 이루는 것이므로 더욱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는 여자의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네 후손을 크게 축복하며 그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니 네 후손이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목소리를 청종하였음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다윗왕에게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사가랴는 이스라엘 역사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 이제 성취되는 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이며 오랫동안 기다렸던 대망의 메시야가 오시는 때임을 알았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을 더욱 힘껏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였습니다. 약속을 지키셔서 메시야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의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사가랴는 이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심으로 우리가 받고 누리는 은혜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우리는 원수 마귀의 손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는 예수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부도덕하였으나 이제는 우리는 성결한 자입니다. 이전에는 불성실하였으나 이제는 우리가 신실하고 의로운 인생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됩니다. 이제 예수님 이름을 의지하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습니다.
76,77절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자기 아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감회를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아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초로 아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축복하고 있습니다.
78,79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해가 떠오르며 빛이 비췰 때, 생명이 살아납니다. 지구의 만물은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습니다. 태양은 빛 자체는 아닙니다. 빛은 우리 세계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빛은 예수님을 계시하는 면이 많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빛이 생태계에 생명을 줍니다. 빛이 만물에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연계와 우리 인생에게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안심하고 평안하게 다닐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빛을 발하는 돋는 해 이십니다.
죄로 인한 괴로움을 아는 사람일수록 죄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합니다. 죽음의 권세로 시달린 사람이 부활의 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죄는 많이 지어서 실감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얼마나 인식하느냐, 깨닫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가랴는 오랜 시간동안 정죄의식, 운명주의에 시달릴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때가 되어 기적의 아들을 낳았는데, 예수님의 선구자를 낳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는 오랜 시간을 거쳤으므로 자기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이 자기의 한을 풀어주는 개인적인 감흥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류구속의 은혜를 볼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지속하여 오신 약속의 말씀과 연결할 수 있었으며, 전 인류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누리게 될 큰 생명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성탄을 통해서 오래된 자기 문제를 가지신 분들이 특히 하나님 한 분을 더욱 신뢰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성탄말씀을 통하여 개인의 문제를 뛰어 넘어서 우리의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이루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찬양으로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래 지속되어온 죄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깊이 만나고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찬양과 경배를 온 힘껏 드리는 성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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