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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가방 이숙현
정원 한가운데서 저마다의 빛깔로 자라는 아이들
『리디아의 정원』(데이비드 스몰 그림, 사라 스튜어트 글, 이복희 옮김, 시공주니어, 2004), 『싫어싫어 유치원』(나카가와 이에코 글, 오무라 유리코 그림, 이영준 옮김, 한림출판사, 2001)
아주 오랜만에 책가방을 뒤적였다. 책 한 권 고르는데 온갖 것들이 딸려 나온다. 덕분에 멈추어,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본다. 잊고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리디아의 정원』을 만난 건 2007년 1월 5일, 지금은 익숙한 ‘여기’가 한참 낯설 때였다. 2006년 여름, 서울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을 정리한 나는 백일 된 큰아이를 안고 내려왔다.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상황에 놓이기.
10개월 된 딸아이에게『리디아의 정원』을 보여주며 읽어주기 시작했다. 편지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읽다가 ‘리디아’가 된 듯 했다. 읽다가, 읽다가, 우물거리다가 말을 멎고 말았다. 딸아이가 뺨을 닦아주었던 것 같다. 아니, 뭐라고
말을 건넸던 것 같기도 하다. 딸아이가 말을 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렇게 물었다.
“엄마, 왜 울어?”
리디아가 혼자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본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까닭에 어려워진 살림은 리디아를 떠나보낸다. 익숙한 집을 떠나 외삼촌이 살고 있는 낯선 도시로 가게 한다. 기차 안에서 리디아는 편지를 쓴다.
엄마
엄마가 입던 옷으로 이렇게 예쁜 옷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제가 무척이나 예쁘게 보입니다. 엄마가 이 옷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빠
아빠가 외삼촌에 대해 하신 말씀 잊지 않았어요.
“엄마 얼굴에다 커다란 코와 콧수염이 있는 사람이 네 외삼촌이야. 그 사람만 찾으면 돼.”
외삼촌한테는 말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런데 아빠, 외삼촌은 유머 감각이 있는 분이에요?
보고 싶은 할머니
챙겨주신 꽃씨, 정말 고맙습니다. 기차가 흔들거리고 있어요. 졸음이 옵니다. 깜빡깜빡 잠이 들 때마다 저는 꽃 가꾸는 꿈을 꿉니다.
『리디아의 정원』(시공주니어, 2004, 7쪽)
리디아의 편지를 읽으며, 미처 써서 부치지 못했던, 또 하나의 편지를 마주했던 것 같다.
엄마, 몸조리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가 한 달 내내 정성껏 끓여주신 미역국 덕분에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큰 딸이 먼 곳으로 떠나간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빠, 어디서든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살라는 말씀 잊지 않을게요. 기대하셨던 판검사 변호사는 되지 않았지만 글 쓰며 새로운 시간들 꿈꿀 거예요. 아빠도 방황하지 말고 잘 계셔야 해요, 네?
동화 쓰는 동무들, 그리운 벗님들! 잊지 않고 챙겨주는 소식들, 정다운 마음들, 정말 고맙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에 흔들릴 때가 있어요. 휘청거릴 때마다 글을 쓰며 제 이름이 박힌 책이 나오는 꿈을 꿉니다.
빵가게를 하는 짐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된 리디아는 엄마, 아빠, 할머니께 편지를 쓴다. 몇 달 거른 적도 있지만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낸다. 2007년 봄, 나도 전자편지를 썼다. 매달 떨리는 마음으로 <어린이와 문학> 응모동화 담당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감일을 겨우 맞춘 동화 원고를 첨부파일로 붙여서. 그리고 반가운 답장을 받는다. 리디아도 가족들로부터 반가운 답장을 받는데 편지 안에는 할머니가 보낸 수선화 알뿌리, 꽃씨, 그리고 흙과 새싹들이 있었다. 리디아 그레이스는 그것들을 심고 가꾸며 ‘원예사 아가씨’로 거듭난다. 나도 그랬다. 그 해 <어린이와 문학> 응모동화 꼭지에 다달이 실린 원고와 심사평이 나를 ‘동화작가’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달마다 잡지를 기다리며 읽고 또 읽고,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편지를 부치고…… 돌이켜보면,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물론 그림자 같은 시간들도 맞이해야 했다. ‘아빠가 취직을 하셨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고 다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리디아처럼 ‘여기’를 떠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할머니와 뜰에서 다시 일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리디아처럼 동화 공부하던 동무들과 책 읽고 공부하며 글 쓰는 시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나’를 마주해야 했다. 젖먹이 큰아이를 품에 안은 채 기를 쓰고 기차 타고 올라가 월례토론회 자리에 앉았다가 아이가 칭얼거리는 통에 얼마 듣지도 못하고 어느 골목길 가로등 아래 철퍼덕 주저앉아 젖 먹이며 눈물 뚝뚝 흘리던 ‘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서울역 기차에 올라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흔들리던 ‘나’, 깊은 밤 사람 드문 구미역 대합실에 발 딛자마자 품에 와락 달려드는 외로움과 쓸쓸함 때문에 입술 깨물던 ‘나’를 맞닥뜨려야 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렸던 리디아에게 기차역 대합실 안이 온통 잿빛으로 다가왔듯 그 때의 ‘나’도 그랬다.
그래서 한 때는 『싫어싫어 유치원』의 ‘콩콩이’와 같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다. 글밭 가꾸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콩콩아, 유치원에 갈 시간이다.”
엄마가 말하였습니다.
“싫어, 유치원 같은 건 싫어!”
“선생님이 기다리신다.”
“싫어싫어, 선생님도 싫어!”
“친구들하고 놀아야지.”
“싫어, 친구들도 싫어!”
콩콩이가 울면서 말하자
“그럼 언제까지나 울고 있거라.”
하고 엄마가 말하였습니다.
“싫어, 우는 것도 싫어!”
『싫어싫어 유치원』(한림출판사, 2001) 145~146쪽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유치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고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겨나면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숲에 나가놀고, 신나는 세 시 잔치를 즐기며, 좋은 그림책과 만나는 나날을 꾸렸다. 아이들과 차를 마시기도 하고, 어디 다친 아이가 있으면 약 발라주며 호오 불어주기도 하고, 재미난 그림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틈만 나면 엉덩이 붙이고 글 쓸 궁리만 하다가 몸 사용법을 새로 익히기 시작했다. 무릎 꿇고 아이들과 눈 맞추기, 허리 굽혀 이야기 귀담아 듣기, 두 팔 벌려 누구든 자주 안아주기, 따뜻한 손바닥으로 등 토닥이기, 엄지손가락 치켜세우기 등등…….
별님반 남자 아이들은 나무 블록으로 멋진 배를 만들었습니다.
배 앞쪽은 뾰족하게 만든 운전실입니다. 운전실에는 빨간색 기계가 많이 있습니다.
운전실 뒤쪽은 선실인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선실 다음에는 갑판이 있습니다.
콩콩이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우아, 정말 멋진 배다!”
아이들의 놀이 속에 가만히 들어가 있으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의 상상놀이는 거침이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 눈에) (한림출판사,2001)별 것 아닌 것 같은 것들도 금세 신기하고 재미난 무언가로 바꾸어버린다. 대단한, 순간 변신 초능력자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논다. 「고래잡이」 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나무 블록으로 만든 배일뿐인데 아이들은 이 배를 타고 나가 고래사냥을 한다. 너른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데 망설임이 없다. 작년 말, 편집자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 책이 1962년에 나왔다니! 지금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능청스럽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며 신나고 즐겁게 놀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른들이 좀처럼 놀이할 시간을 주지 않는 어떤 아이들에게는 몸으로 살아본 적 없는, 그저 재미있는(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그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꼬리를 물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글을 써야할지, 바로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 이어졌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펼쳐 마주한 『리디아의 정원』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특히, 리디아가 ‘잘 웃지 않’는 짐 외삼촌을 위해 비밀 장소(쓰레기가 뒹구는 옥상공터)에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낸 장면이 가슴을 파고든다. 리디아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곳에 흙을 나르고 씨앗을 심고 가꾸어, 사람 마음에 꽃을 피우는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리디아의 정원을 만들어냈다. 그런 까닭에 리디아가 떠나는 기차역 안은 잿빛이 아닌 환한 햇살로 가득하다.
이제는 유치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날마다의 삶,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에 아직도 가끔씩 ‘싫어싫어 유치원’에 갈 때도 있지만 ‘좋아좋아 유치원’에서 아이들, 소중한 인연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아이들의 상상놀이, 함께 즐기며 재미난 이야기 몇 자락 얻어 잘 다듬고 싶은 꿈 씨앗도 가꾸고 싶다. 가만가만, 유치원의 다른 이름은 Kindergarten, ‘아이들의 정원’이란 뜻이다. 그렇다. 아이들의 정원 한 가운데서 아이들이 저마다의 꽃으로 피어나는 모습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이다. 지금 유치원 마당에는 첫 책 사진에 실렸던 감나무가 감을 주렁주렁 단 채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감나무 옆에는 목련나무가, 목련나무 아래는 앵두나무가, 앵두나무 위에는 라일락이 가을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 글이 가 닿을 때쯤엔 가을이 더 깊어져있겠지.
책가방 닫으며, 가을편지처럼 초대장 하나 쓰고 싶다.
“금오유치원으로 놀러오세요. 경북 구미, 오래된 아파트 한 가운데 이야기 숲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곳, 금오유치원에 놀러오세요. 책가방을 비집고 나왔지만 주저리주저리 너무 길어 도로 집어넣은 이야기, 도란도란 나눌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이숙현
경북 구미, 금오유치원에서 살다시피 지내고 있다. ‘해야 할 일’더미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재미난 일’ 벌이고 펼치며 좋은 글 쓰고 싶다. 지은 책으로 『초코칩 쿠키, 안녕』이 있다.
첫댓글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작가님의 삶과 책 한 귄의 이야기가 이리 멋지게 어우러지다니.. 뭉클했습니다.
선생님을 와락 품고 있는 금오유치원을 그려봅니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