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현지에 대설 특보가 있는데 이륙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탑승 안내 직원의 한 마디에 순간 며칠 전 갑작스런 폭설로 항공기 이착륙이 전면 금지되어 아수라장이 된 제주공항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항공기는 인천공항을 떠났고, 착륙하는 비행기 창으로 얼핏얼핏 스쳐지나가는 사할린 공항 풍경은 평온한 은세계였다. 하지만 공항 밖을 나서자 칼바람에 눈보라가 몰아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시내로 접어들자 겨우 차만 지날 수 있게 트여진 눈길의 곡예 운전에 손잡이를 잡은 팔뚝은 어느새 힘줄을 보이고 있다.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며 만남을 환영하듯 아름답게 빛나던 눈보라는 기쁨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밤새 창문을 흔들며 잠을 버리고 같이 놀자고 한다. 이튿날은 더 강해진 눈 폭풍에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전체에 외출 자제령이 발동되어 종일 호텔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지만, 덤으로 호텔 정원과 잇닿아 있는 공원의 설경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힐링(healing)의 시간을 얻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보드카 한 잔 앞에 놓고 흩날리는 눈꽃들, 눈의 ‘비 보이’(b-boy) 공연을 감상하는 행운을 선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도 나무는 벌거숭이인 이유가 바람의 장난이라니.
새벽녘에 잠이 깨어 창밖의 나무를 살피니 차렷 자세로 눈을 맞고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삼일 째 내리는 눈, 아예 하늘 문이 열렸나보다. 축제의 함박눈이 키보다 높게 쌓여 푸른빛을 띤다.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눈 사다리, 하늘 사다리가 세워져 세상이 모두, 하늘과 땅이 모두 하얗게 하나가 되었다. 저 하늘 사다리를 타고 모두가 꿈꾸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엉뚱한 줄 알면서도 부질없는 소망을 꿈꿔본다.
지난 해 사법고시 제도가 폐지되자, ‘흙수저’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사다리가 없어져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일부에서 야단들이었다. 어렵게 사법고시에 합격해도 기쁨은 잠시.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배신과 음모, 암투와 줄서기, 쓸개빼기, 새우등 터지기, 사다리 걷어차기 등 치열하고 치졸한 칼바람과 싸워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사법고시는 염치를 모르는 금수저들의 대물림이 횡행하는 천박한 우리 사회에서 금수저들의 뻔뻔스러움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흙수저의 마지막 사다리로 간주된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나무 사다리는 맨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홍시를 따기 위해 감나무에 오르거나, 겨울철에 처마의 참새 집 훔칠 때, 그리고 초가지붕 위에 곶감이나 고추 말리려고 오르내릴 때 꼭 필요하고 고마운 도구였는데……
요즘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암호화폐(cryptocurrency)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2009년 10월 최초 고시 가격이 1$당 1,309 비트코인으로 우리 돈 1,000원에도 미치지 못하던 1비트코인 가격이 2017년 12월 장중 한때 2,480만원을 기록, 120만 원선이던 연초보다도 20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 암호화폐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장엔 사람들이 몰렸고, 젊은 직장인은 물론 청소년과 전업 주부까지 생업을 포기한 채 암호화폐 투자에 매달리게 되자, 정부 관계자는 “가상화폐에 대한 사행성 투기 거래가 과열되고, 가상통화를 이용한 범죄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며 “선량한 국민들의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있어 기본적으로 거래소를 통한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거래소 폐쇄까지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암호화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내 생애 흙수저를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을 끊어버려 기회를 박탈했다”고 비판을 쏟아내며 청와대 국민청원에 몰려들어 게시판이 다운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흙수저 탈출의 외침에 20~30대 직장인은 물론 고교생까지 동참, 행복과 꿈을 빼앗지 말라고 외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흙수저들의 꿈과 열기가 오직 이 가상화폐 시장에 전부 녹아든 것 같아 금방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잿빛하늘을 올려다보는 느낌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한 앱 분석업체가 국내 안드로이드 스마트 폰 사용자 2만3천 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비트코인 앱 사용자 연령층은 30대가 32.7%로 가장 많았고, 20대 24.0%, 40대 21%, 50대 이상 15.8%, 10대 6.5% 순이었다. 참으로 우려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에 매몰되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위험 부담이 크니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 이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개개인의 목표에 근접할 수는 있었다. 지방 대학은 물론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자신의 처지에 맞게 취업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사정은 어떠한가. 소위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재수는 기본이라는 젊은이들 언어로 ‘웃픈’, 웃어넘길 수 없는 서글픈 현실은 더 이상 젊은이들만의 일이 아니다.
가상화폐에 올인(all in) 하는 청년세대의 심정인들 오죽하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가상화폐야말로 흙수저를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사다리’라고 믿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사행심이고 투기니 절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우리 기성세대는 차마 말할 수가 없다. 기성세대가 희망의 사과를 다 먹어버린 것일까, 행여나 청춘들이 올라가야 할 사다리들을 차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자조 속에서 억장이 무너질 뿐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을 ‘희망의 사다리’라 말할 수 없음을, 암호화폐 구입 후 가격이 오르기만 무작정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아래 누워 입안에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미국의 뉴욕대학 누리엘 루비니 교수의 “비트코인 트레이더들이 자전 거래를 통해 가격을 올리는 수법을 쓰고 있다. 금융당국이 이를 규제해야 마땅하다”는 지적이나, “비트코인은 내재 가치 또는 교환 가치가 없다. 버블이 꺼지면 결국 가격이 제로로 떨어질 것”이며 “비트코인 버블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버블로 기록될 것”이라는 경고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폭설로 도로가 통제되어 집에서부터 가슴 설레며 준비한 얼음낚시는 아쉬움 담아 꽁꽁 얼리기로 하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왔다는 기사의 택시를 타고 남쪽으로 눈길을 1시간여 조마조마 달려 인적이 드문 망향의 동산에 도착했다.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출항 준비를 마친 배를 형상화한 파이프 조형물이 어깨에 쌓인 눈을 털지도 않고 외롭게 추위에 떨고 서 있다. 언덕에서 바라보니 홋카이도(北海島)를 지나 동해와 연이은 오호츠크 해가 유빙에 갇힌 채 한눈에 들어오고, 해안가의 높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까마귀 떼처럼 차갑게 날아오르고 있다. 망향탑 아래 누운 비문의 하얀 이불을 장갑으로 살며시 쓸어내니 울컥함이 추위를 멈춘다.
“……1945년 8월 애타게 그리던 광복을 맞아 동토(凍土) 사할린에서 강제 노역하던 4만여 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는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분들을 내버린 채 떠나가 버렸습니다. 소련 당국도 혼란 상태에 있던 조국도 이들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이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배는 오지 않아 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 하얀 ‘하늘 사다리’를 뉘면 고국의 항구에 닿아 배가 오지 않아도 그리던 고향땅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심장이 멎는 듯하다. 그쳤던 함박눈이 다시 설원에 흔적도 없이 내린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다리는 한 계단 한 계단 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올라야 한다. 서두르면 헛디딜 수 있고, 급하다고 해서 여러 계단을 한 번에 오를 수 없다. 꿈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꿈이 보이지 않는다고 쫓지 않으면 절대 잡을 수 없다. 사다리에 차례가 있듯이 너무 쉽게 이익을 취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내일을 위해 어둠을 감내하듯이 그래도 한 방울 한 방울 땀의 계단을 쌓아야 한다. 우리 모두 가진 게 없이 태어나도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오른 사다리라고 걷어 차버리지 않는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볼 일이다.
지정규:
경북 영주 출생. 부산외국대학교 교수. 『수필시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