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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2구간
2014.10.05
길마재-고운동재-묵계재-외삼신봉-청학동
산행시간 :6시간 30분
산행거리:16km (마루금 14km + 접속구간 약 4km)
"매일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기적처럼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
09:08
버스가 내촌 마을 입구에 도달하였다. 들머리 길마재까지는 여기서 20여분을 걸어 올라야한다. 점호를 마치고 길을 나선다. 가을이다. 근심없는 바람은 시절에 어울리게 선선했다. 들판은 아직 가을 설거지가 끝나지 않았지만 세상은 풍성한 가을 햇살로 넘쳐났고 하늘은 투명에 가깝게 푸르렀다.
세상의 모든 말라가는것은 저마다의 냄새를 가지는 법으로 나무며,과일이며,열매며 하다 못해 풀잎에서 조차 저마다의 냄새를 던져 존재를 중명했다.
이런 혼재된 냄새의 세상 속에서 대상을 하나의 은유로 비유해 내기란 쉽지않다.
잘 익은 감에서는 농밀한 사바나의 과향이 났다. 취나 구절초 쑥부쟁이류의 꽃들로 부터는 필묵의 묵직함이, 더덕이나 개암의 짙고 감미로운 냄새에서는 아라비카를 키워낸 아비시니아 고원의 바람이 느껴졌다.
이 규정짓지 못할 항홀한 후각의 관현악 앞에서 나는 마치 컵핑을 하며 조심스레 향과 맛을 찾아가는 바리스타처럼 가을의 냄새에 흠뻑 취했다.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 아무런 훈련없이 사라지는 인간들에 비해 시간에 대한 나무의 견해는 얼마나 진중한가!
순백의 감꽃들이 부풀어 마침내 주홍의 관능을 키워내기까지.
황금빛 감나무와 몸을 떨어 열매를 털어내는 밤나무 사잇길을 걸으며 모처럼 가을의 여유를 만끽했다.
눈물을 닮은 감들은 쏟아질듯 과실을 달아 슬픔을 과장했다. 한방울 눈물처럼 사라지는 인간 존재에 비해 무더기로 지는 저 감들의 죽음은 훨씬 순교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감나무를 심을 마당 한뙤기 없음이 아쉬웠다.
길마재
길마란 짐을 싣기 위해 소 등에 얹는 안장을 의미한다 들머리 초입에서 고개를 돌아보니 영락없이 길마다.
09:27
길마재에서 마침내 낙남정맥 길로 들어선다 길이 막 공사를 위해 개토 작업을 해서인지 의외로 편안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정맥길임을 알리는 시그날이 난무하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렇게 초반부터 된비알을 치고 올라야할바엔 청학동 쪽에서 치고 오르는 길이 더 수월할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급한 오르막이 계속 되었다.
그런데 한참을 오르다보니 당연히 보여야 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허지부진한 시위대 처럼 겨우 몇명만이 그룹을 이루어 산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우리는 마치 꼬리가 잘린 장지뱀처럼 일행으로부터 뚝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뭔가 잘못되긴 했어도 우리가 정맥길을 제대로 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앞서간 선두팀들이 집단 이탈을 하고 만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산대장이 둘이나 붙어있음을 위안삼아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기로 했다.
얼마 안가 심상찮은 산죽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길은 단지 예고편에 불과했다. 피맛에 안달하는 거머리처럼 때죽의 이파리는 온몸을 햝아대며 진로를 가로막았다. 눈이 길을 찾기에 앞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두 다리의 향방에 따라 길을 걸었다. 길은 미로와 같았고 우리는 신경망을 따라도는 전류처럼 천지 분간없이 무작정 나아갔다.
10.14
790봉에서
그나저나 오늘도 우리는 길 끄트머리에서 서글피 걸어야 할 모양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떠나 흔적없이 때죽 속으로 사라졌다. 숲은 오직 숲의 언어로 생몰을 증언했다. 뒤 따라 올 사람이 없음에도 행여 누군가가 되돌아 와 주기를 기다린다.
침례의 의식처럼 때죽의 강물에 발을 담근다 길은 쓰르라미의 울음처럼 울었다.
매번의 산행이 다 행복한것도 아니요 행복을 찾아 산을 오르는것도 더더구나 아닌데 산길에서 행복을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산과 내가 때묻지 않은 조건으로 대좌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속살조차 투명한 대화,그리고 진솔함. 하염없이 벗겨지는 거짓과 욕망의 때.
산마루 끝에 매미의 허물처럼 간당거리는 개운하고 말간 행복이 보였다. 행복은 너무나 가벼워 깃발같았고 구름같았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가벼운것들이 행복을 은유하는 언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천왕봉의 위용
오늘은 그대도 참 늙어 보인다 세상 내려다 보며 무슨 근심 그리도 많았던지 곧은 길 하나 품지 못하고, 허튼 소리 하나 내뱉지 못하고, 깊은 안거에 들듯 늙은 몸뚱이로 앉아.
오늘은 너를 대신해 내가 익어간다.
산은 멀어져 사천 앞바다로 사라지고
세개의 능선이 보인다 맨 앞 능선 뒤로 거림마을이 있을것이고 그 뒤로 중산리 마을이 앉았을것이다 그 너머 큰산 뒷편이 대원사로 가는 계곡이 아닐까 능선과 능선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다.
땅속을 돌아다니는 두더지 같기도 하고 보급품을 나르는 빨치산 같기도 하다.
누구면 어떻고 무엇인들 어떠랴! 오늘은 뜨거운 사막 모래 밭에 사는 미어캣처럼 세상의 위도 아래도 아닌 떼죽밭을 헤매다 하루가 끝장나도 좋다. 다 좋은 추억이 될터이니.
길고 맥빠지는 산죽밭을 지나며 문득 윤흥길의 장마가 생각났다.
암담한 전쟁 중의 지리한 장마처럼 길 내내 때죽길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그 길은 피할 수도 돌아킬 수도 없는 민족의 운명과 비슷했다.
일찌기 느껴본 바 없는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었으며 체념없이는 물러설것같지 않는 긴 장마와 같은 괴로움이었다.
용담
때죽밭을 헤메다 문득 키큰 나무를 만나면 미어캣이 몸을 세워 세상을 보듯 비로소 굽어진 허리를 폈다.
목에 맨 카메라가 어깨에 둔중한 고통을 선사했다. 두 팔을 뻗은 채 때죽 밭을 걸은터라 어깨 통증은 더 했다.
긴 숲을 지날 때는 수억마리 메뚜기떼의 공격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할수록 때죽 이파리들은 더 집요하고 더 가공스러운 속도로 얼굴을 때렸고 때로는 숨 쉴겨를도 없이 사람을 괴롭혔다.
이 또한 지나가리란 믿음은 얼마나 값진가! 시간 또한 우리편이라는 사실도..
때죽을 벗어나 잠시 쉬는 사이에.. 먼지 알러지가 있는 나는 쉴사이 없이 흘러나오는 콧물과 호흡기가 수축되면서 오는 답답한 고통을 한꺼번에 느껴야했다.
이 순간 패쇄 공포마져 엄습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싶다. 실제 어느 순간 나는 고립의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앞사람에 바짝 붙어 걸었고 그편이 숲을 헤치기에도 좀 수월했다.
어렵지 않은 길을 참으로 어렵게 만드는 조물주의 신통한 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지만 산쟁이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이 어렵사리 통과한 고통의 가시밭길도 전체 산죽길의 단지 한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맥빠지게했다.
반천리 상부댐
상부 저수지가 나타났다 일행과 합류할 고운동재가 가까와 졌다는 뜻이다.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 펌-
이 산의 지명이 등잔봉이고 상부 댐이 있는 곳이 반천리 이며 하부 댐이 있는 곳이 신천리이다. 그리고 내대천 댐이 설치된 곳의 이름이 강영소이며 중지댐이고, 이설도로의 다리가 놓인 곳이 다리골, 통수로가 지하로 통한 곳이 수왕골이라고 하여 고유의 지명이 현실과 부합된다고 주민들이 이야기한다.
내대천에 설치된 하부 댐의 제방 길이가 360m이고 높이가 91m이며 총저수량이 640만m³이다. 이 저수된 물을 2대의 양수기를 이용하여 전력이 남아도는 밤 시간에 상부 댐으로 퍼 올렸다가 낮에 다시 하부 댐으로 내려보내면서 발전기를 돌려 70만kw의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
고운동 고개에서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형님을 만났다. 전쟁통에 헤어진 혈육을 만난듯 반가왔다.
고운동 고개를 지킨다던 국공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뒤 늦게 도착한 일행들이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갈까 망설이다 눈 앞에 나타난 비장한 현실의 산을 보고 일단 저 산을 넘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앞서간 일행들이 어디쯤에서 정맥길을 바로잡았을까가 궁금했으나 사실 어디라 한들 위치에대한 감은 없었다.
아무튼 사람들이 떠나간 파장같은 고운동재를 뒤로하고 얼른 다음 코스를 향해 길을 떠났다.
한번 사랑을 주었다면 사랑은 이미 그것으로 완성된것이다.
애틋함이나 그림움같은것은 꽃이 피면 따르는 벌나비같은것으로 한때의 시절인연에 불과하다.
사랑은 가슴에 묻히는 순간 비로소 사랑이된다.
그 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거던 자기 혼자만의 풍경 속으로 찾아가라.
진실로 그 과거로 돌아가 그 풍경 속의 가장 쓸쓸한곳 가령 지리산 저 해묵은 산그림자가 처연히 걸려있는 이 남부 능선 즈음에서 더 모질게 고독해진 스스로를 기다려라.
외통수의 탈출구 지리산
이 근방의 물 윗마을들은 모두가 아늑하고 따스해 보이지만 산속 깊숙히 위치하고 있으므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피난처나 항거의 거점으로 삼아 피를 흘리는 일이 많았다.
멀리 고려말에는 왜적의 수괴 아지발도가 이곳을 분탕질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는 의병의 혈전이 있었고 동학란에도 어김없이 패잔병의 폐해가 있었다.
진주 민란시에도 진앙지가 되었고 일제 강점 하에서는 1907년에 의병의 봉기가 있더니 이어서 1908년의 무신년 의병으로 이어져 일제에 항거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 때 중산리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신천리를 지나서 곡점에 못 미친 지점에 설통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그 지형이 험난한 것을 이용하여 의병과 왜병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고 그 곳에서 피해를 본 왜병이 무고한 주민들에게 만행을 저지른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는지 41년째 되던 해인 1949년 7월 17일, 앞서 있었던 여순 반란 사건의 패잔병들이 지리산에 숨어들어서 산 아래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약탈하고 경찰 지서를 습격하는 등 극도의 불안을 조성하였다.
산죽의 기세를 벗어나자 아기자기한 암릉 구간이 나타났다. 짙은 그림자에 물던 검은 바람이 옷자락을 끌며 맥없이 넘나들었다.
새로 두시가 넘은 유곽 여인의 무거운 눈꺼풀처럼 시간이 저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다는것은 시간에 젖는것 온 몸이 시간의 결과물인듯 눅눅히 피로에 물들었다.
긴 산죽의 버덩을 빠져나온 뒤에 찾아 온 허탈감 같은거였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 밤길을 돌아오는 마음같은거였다.
외삼신봉 아래 마지막이자 유일한 암벽 구간
묵계재로부터 숨막힐듯한 고개를 몇개나 넘고서야 비로소 외삼신봉 턱 밑에 닿았다.
썩은 동앗줄같은 형편없는 로프 하나가 예의 없는 모습으로 걸려있었다.
우선 스틱을 메달아 올리고 우리는 맨손으로 암벽을 기어 올랐다. 오늘 산길 중에 유일하게 맥길다운 맥길이었기에 비록 짦은 구간이었지만 어쩐지 돌아서기가 이별의 입맞춤처럼 아쉬웠다.
산정에 오르자 감동이 물밀듯 밀려올랐다.
비로소 세상이 청학동으로 보였다.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 이 높은 산으로 들어 온 옛 사람들의 의지도 보였다.
일망무제한 산들의 그림자가 즐거움에 환호하는 군상처럼 아른거렸다.
풍경은 풍경 그대로 9번 교향곡이었으며 감정으로 덧칠할 수 없을만큼 숭고했다.
그 숭고함 속에 우리를 끌고온 맥길이 잘 들어난 청년의 팔뚝 위의 핏줄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오늘을 마무리한 가벼운 허탈감이 성취감과 뒤섞여 마음을 서걱이게했다. 그 어떤 계집이라도 달려가 와락 끌어 안고 싶은 그런 풍경이었다.
수줍게 거림골이 보이고 협궤의 열차처럼 산은 산등성이를 타고 떠나갔다.
내가 정말 저 능선들을 타오르고 저 높은 산을 넘었을까?
현실이 믿을 수 없는 꿈처럼 아른거렸다.
내가 이룬것의 크기가 감동을 다 채우고도 넘쳐 흘렀다.
형언할 수 없는 성취감이 전신을 사로잡아 소름처럼 온몸을 감쌌다.
정년 큰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15.21
무화과나 은행처럼 꽃을 숨겨피는 나무도 가을이면 풍성한 결실을 남기듯 오늘 산을 오르며 남긴 그 남모를 고난이 마침내 산 정상에서 결실을 맺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에는 누군가에게 마지막 보내는 편지처럼 깊은 관조가 베어있었다.
그것은 세상에대한 폭넒은 이해였고 삶이 인간에 선물한 유일한 의미였다.
누군가가 세상 어디에 있다하더라도 결국 함께일 수 밖에 없다는 크다란 종교적 신념이었다.
15.38
갓걸이재
외삼신봉을 떠나 갓걸이재 돌아 하산하는 길은 일사천리였다. 한번 떠나간 여자와 읽었던 책은 다시보기 싫은것처럼 우리는 지난 날 거쳐온 길을 미련없이 지나쳤다.
산길도 물소리도 다 그대로였다. 가을이 만들어 내는 오롯한 추색들이 잘 볶은 커피처럼 마른 향기를 피우는 가운데 이미 지난일이 되어버린 오늘의 기억들도 시들기 시작한 가을꽃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그것이 다 세상의 이치같았다.
16.09
청학동 날머리
삼신봉
- 후 기-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것이다.
두번이 없는 필멸의 존재인 나. 그 냉엄한 진리의 칼날 위에서 나는 오늘 춤추었다.
살아있는 채 사라져가는 나를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나는 그 서슬푸른 외로움 조차 행복이라 불렀다.
어쩌면 죽음조차 이런 느낌일지 모른다는 깊은 안도감이 음습했디.
Jeg Ser Deg Sote 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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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그림 즐감하고갑니다.
3차때 봅겠습니다.
화이팅!!!
감사합니다.
신샘 뒤에 바짝 따라붙을 그날까지 진격 ^^*
이번 산행에서 산죽이 그렇게 무서운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질려버리더군요..으으
영원히 때죽의 추억으로 기억에 남을것같습니다.
어쨋던 개성있는 길^^*
좋은 산행이었습니다.^^
아직 나는 나쁜 산행에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일산일희^^*
@poll 정말요~?^^
@앤디(박종인) 나쁘다고 생각했던것이 굳이 나쁜것이 아니었더군요.
산은 산으로 존재할 뿐 나쁘고 좋은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요 상태일 뿐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고놈의 산죽 땜시 쬐끔...ㅎ ㅎ
그래도 나중에는 그놈이 제일 추억에 남게될겁니다,
저는 석정 산인님 뒤 따라가며 재미 좀 봤습니다^^*
함께 핸적도 너무나 많은데 같은산 같은곳을 걸어도
느낌이 다른지....
산마다 영감이 저렇게 떠오르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부끄럽네요.
전 그냥 마구 산이 좋으면 할말을 잊고 심장만
두근두근하고 가슴만 복 받쳐 오르니...
함께하면서 수기를 접하면서 많이 배우고
보람도느끼고합니다.
그많은 산죽터널 고마웠습니다.
다음 산행 땐 영감이 아니라 할멈을 얻어올까합니다 ㅋㅋ
산을 타는게 수단인지 목적인지 많이 헷갈리지만 그걸 알기위해서라도 산은 타야하는거니까 고생에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산죽터널은 제가 아니라 지리산에 고마와 하셔야죠 ㅎㅎ
님과 함께있으면 늘 산행이 차분해져서 제가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님이없는 수고는 앙코없는 찐빵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