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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산을사랑하는모임
 
 
 
카페 게시글
산행지도 스크랩 불곡산(344.5m,광주,성남),대지산,숫돌봉,충렬서원,포은신도비,정몽주 묘소
신길동 추천 0 조회 202 16.02.20 13: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가 훌쩍 흘렀다. 우리 딸이 시집간 지가...

그동안 딸은 몇 번 다녀 갔지만 돌아갈 때면 매번 그 서운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나도 이렇게 나이를 먹는 모양이다.

감성은 이리도 여려 마치 유리알 같아 조금만 흔들려도 금방 깨질 것같다.

그럴 땐 아무도 없는 데 가서 꺼억꺼억 목울음이라도 울어야만 했다.

 

그런 우리 딸집에 다니러 간다.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고 성남 행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쾌적하고 안락한 우등버스는 승객 댓명을 태우고 3시간 40여분 만에 도착을 한다.

물론 딸 내외가 심야에 마중을 나와 있다.

 

두어시간 눈을 붙인 아침.

딸아이는 아침상을 차려놓고 애비를 깨운다.

딸집 앞동산인 불곡산을 한바퀴 돌 계획을 갖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불곡산(佛谷山 345m)은 성남시와 광주시계에 있고,숫돌봉은 광주시와 용인시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불곡(佛谷)은 절이 있는 골짜기.

불곡산도 그래서 얻은 이름이며 또한 성스러운 산이라며 성덕산(聖德山),그리고 효종산(孝鐘山)이란 이름도 있다.

태재를 지나 북동쪽 문형산(文衡山, 497m)과 함께 굴곡진 산세를 이루고 검단산의 광주산맥과 남한산의 남한산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다.

 

나는 딸집에서 바라보이는 앞산으로 올라 형제봉과 불곡산,대지산,숫돌봉을 찍고 충렬서원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충렬서원(忠烈書院)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번지에 있다.

 

 산행코스: 상태마을-주능-형제산(285m)-불곡산-부천당고개-대지산(326m)-숫돌봉-충렬서원 갈림길-충렬서원-포은 신도비-정몽주선생묘(약 3시간)

 

 

 

 

 

역시 카메라가 에러가 나서 날짜와 시간이 맞지 않다. 다만 구간별 소요시간은 참고할 수 있다. * 실제 시간은 07:30으로 이보다 약 2시간이 빠르다.

우리 딸집인 '민영 힐 하우스'에서 출발이다.

딸집을 나오면서 마주 보이는 앞산자락이 불곡산 능성.

서우트윈스빌 위의 우측 산으로 산길은 열린다.

대보그린맨션 앞 아스팔트를 계속 가면 신황사로 가는 길. 나는 하얀 휀스가 쳐진 우측 능선 산길로 올라선다.

                                           다음지도의 현위치

능선산길 우측엔 '프로 빌 2'빌라

금방이라도 봄비가 내릴 것 같은 아침산길에 진달래가 곱게 피었다.

주능에 올라섰다.

주능에 올라서자 만나는 태재고개 갈림길 이정표

                                                                     태재고개 이정표의 날개에는 400m 표시.

높낮이가 거의 없는 능선엔 무공해 양탄자를 깔아 놨고...

체육시설엔 마침 일요일이라 아침운동을 하러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다. 

등로에 세워진 詩들을 두서없이 담았다가...

뒷날 찬찬히 음미해볼 참이다.

.시인은 나무를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라고 하였다.

 ----전  략----

왜 사냐건 웃지요.

궂이 물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살아가는 이유를...

소이부답(笑而不答)이죠.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갈래길은 능선 좌우로 갈래져 있다.

분당동주민센터와 장안타운 갈림길 이정표

이 시설물이 무언고 하였더니...

산악오토바이 출입을 막는 바리케이트다.

.

남부지방에 비하여 봄이 열흘 이상 더디게 오나보다. 이제 진달래가 만개를 하고 있으니...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의 시도 있고...

한춘섭님은

이 아침,저 여명을 보아라.

 새 기별이 왔으니 다시 또 시작하라 한다.

그러다가 어느덧

나그네되어 마음이 저문날은 바람이 휘날리고,노을진 들녘끝으로 흰구름만 떠돈다.

하며 인생무상을 이야기 한다.

산길 좌우로 줄지어 선 진달래는...

선홍색 그 핏빛 울음을 토한다.

사각정자가 있는 불곡산 정상엔...

자그마한 정상석이 서있고...

왁자한 인적을 애써 외면하고 까치는 나무 꼭대기에 안락한 둥지를 틀었다.

봄비에 안으로 새잎 머금고 있다가 비 그치고 봄볕 따스해지면 수만 잎새가 깨어나겠지.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유리창'

아뿔싸!!  알바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저 능선길이 대지산으로 가는 길 같은데... 다시 불곡산으로 돌아가자.ㅠㅠ

거친 우측 산사면을 에돌며 지름길을 찾다 불곡산 정상으로 다시 올라온다.후유~~

불곡산 정상석 앞면의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서면 산악오토바이 바리케이트길을 건너...

구미동 방향 이정표를 따라 가다가 또다시...

아뿔싸!!  우째 이런 일이~~ 목이 말라 물병을 찾으니 허리에 찬 쌕에서 그넘이 빠져나가고 없다.

물병이 없으니 목은 더 말라온다.

그래,왔던 길을 다시 더듬어 가보자.

알바한 곳까지 가보았지만 물병을 찾지 못해 포기하고 돌아서서 되올라 오는데,아~ 내 물병!

우선 벌컥벌컥 두어모금의 물을 마셨다. 룰루랄라~~

세 번째 올라선 불곡산 정상. 약 30여분을 알바와 물병분실로 시간허비를 하였다.

전망 정자에서 성남쪽 시가지 풍경을 바라보다 길을 재촉한다.

갈림길에선...

구미동 방향으로...

계속 따른다.

이정표

.

.

구미동 대지산은 성남시와 용인시의 시계(市界). 대지산 방향으로 간다.

.

역시 대지산으로...

대지산에 올랐다.

대지산(大地山 326m)은 이름이 너무 크다.

그리고 휀스를 따라...

숫돌봉 방향으로 길을 잡고...

숫돌봉(320m)에 섰다. * 숫돌은 칼을 갈 때 쓰는 돌.

경주김씨 묘지를 지나고...

아직 채 지지않은 산벗나무를 지나...

충렬서원 갈림길을 만난다.

충렬서원과 능평마을 방향으로 새로 닦인 산길을 내려오면...

우리싸인채널 건물이 있고...

마을버스 종점이 있다.

그 새 봄비는 주룩주룩 내린다. 옷이고,안경이고 모두 빗물이 타고 내린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현위치를 알리고 데리러 오라고 한다.

나를 데리러 온 우리 사위는 엊저녁 장인때문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내가 그만 깨우고 만 셈이다.

충렬서원을 찾는다는 게 그만 인근의 엉뚱한 곳에 왔다.

솟을 삼문이 있는 이곳은 '한양조씨가천재공재실(漢陽趙氏嘉川齋公齋室)'이다.

빗속의 담 위로 카메라를 갖다대어 치천재(致川齋)현판을 확인하고...

비문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찾아나선 충렬서원.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선조 38년(1605)에 다시 지었다.

이때 정보와 이시직을 같이 모셨다. 광해군 원년(1608)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924년에 복원하였다.

전하는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충렬서원 현판이 걸린 솟을 외삼문과...

잠긴 문 옆 담넘어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외삼문 안의 두 번째 건물이 강당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충렬서원은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여기에서 대지산 정상과 포은 정몽주 묘소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자연석 '백로가'시비가 있는 옆 낮은 담넘어의 비스듬한 경사면 위로 내삼문이 보이고...

내삼문과 사당.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전하는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

입구에는 신도비각이 있다.

신도비는 숙종 25년(1699년)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포은 정선생(圃隱 鄭先生)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손에 살해 당한 정몽주 선생의 묘가 왜 용인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생전 포은 선생과 용인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다고 한다.

 

그 연유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방원(태종)즉위 후 6년 뒤(1406년) 선생을 복권시키면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개성에 가묘로 던 선생의 유해를 그의 고향 경북 영천으로 이장토록 한다.

상여가 영천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 명정(銘旌ㆍ죽은 사람의 관직 등을 적은 천)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는 명정을 따라가 보니 지금의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에 떨어졌다.

이상하게 여긴 후손들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감탄하면서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곳에다 묘를 쓰기로 했다고 한다.

연성부원군 저헌 문강공 이선생 (延城府院君 樗軒 文康公 李先生)

저헌 이석형 신도비

 저헌이석형묘및신도비 (樗軒李石亨墓神道碑)는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이다.

하얀색 무늬가 가늘게 있는 청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이석형 묘소 아래에 있었으나 최근에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비각을 만들어 새롭게 안치하였다.

이 신도비 역시 그의 사후인 1624년에 제작된 것이다. 크기는 총 높이 250, 95, 두께 23이다.(용인시청)

커다란 홍살문이 탐방객들을 맞는다.

홍살문을 지나자 낡은 한옥 3채가 있는데, 경모사와 영모재와 모현당이다.

경모사에는 관리자가 거주하고 있고...

제향을 위해 지은 영모재는 우암 송시열의 편액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이곳의 내부를 볼 수가 없다.

 

모현당은 각종 제례행사나 종중회의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포은 선생이 직접 쓴 행서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하지만 역시 볼 수는 없었다. 

 

영모재를 지나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이어지는 ‘단심가’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로 시작하는 ‘백로가’ 시비가 묘역의 시작을 알린다.

'백로가'(白鷺歌)는 포은 선생의 어머니가 지은 시로  아들 정몽주에게 교계하게 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중앙의 작은 골을 중심으로 오른족이 저헌 이석형의 묘이고,나무에 가려진 좌측이 포은 정몽주의 묘이다.

10m 거리에 증손녀 사위라하더라도 가문 다른 두 거인의 묘가 나란히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천까지 가지않고 이곳에다 포은 선생의 묏자리를 팠지만 날이 저물어 하관(下棺)은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피곤하여 잠이 들었지만 단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정몽주 선생의 증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 보다는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 그 자리를 탐했다.

정씨 부인은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묘 인근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묏자리에 부었다.

다음날 후손들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하고 탄식을 하며 옆 언덕을 보니 그곳도 명당인지라 정몽주 선생을 모셨다.

그럼 처음 명정이 떨어졌던 자리는 어찌 됐을까.

훗날 정씨 부인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그곳에 남편과 합장을 해달라고 지목했고, 정씨 부인과 그의 남편으로 대사헌을 지낸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자리를 잡았다.

명당의 기운을 받아서일까 실제 연안 이씨인 이석형 선생의 후손들은 날로 번창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손들이 250여명에 이르렀고 대제학과 정승, 판서 등이 끊임 없이 배출됐다.

월사 이정구 선생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조선조의 문장가로도 명성을 떨치면서 연안 이씨는 조선 3대 명문가로 꼽혔다.

이석형과 정경부인 연일 정씨 비석

정몽주 묘에는 묘비, 신도비, 문인석, 무인석이 있는데 많이 훼손되었다.

 

연안 이씨에 반해서 정몽주 선생의 후손 중에서는 조선조에서 이렇다 할 출세를 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묏자리를 두고 벌인 두 집안의 악연 때문인지 연일 정씨와 연안 이씨는 서로 혼사를 치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포은 선생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는 관직에 나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거의 없었는데,묏자리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포은 선생이 조선의 임금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관직을 얻는 것은 불효라 여겨 일부러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석비를 확인해 보니...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적혀있다.

<뒷면>

정보(鄭保 ?~?)의 묘소.

 

정보는 정몽주(鄭夢周)의 손자로 이조참의를 지낸 정종성(鄭宗城)의 아들이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병마절도사 박등의 딸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설곡(雪谷).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된 8현 (八賢)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일 정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학문이 탁월하여 세종(世宗)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감찰이 되었다.

일찍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단종복위사건이 적발되어 사육신이 위기에 처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인척 되는 한명회(韓明澮)에게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세조는 정보를 수레로 치여 죽이라고 명하고 나서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서 "이는 정몽주의 손자입니다."하자 급히 명하여 형벌을 그치게 하고는

 "충신의 후손이니 특히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내라."고 하여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연일(延日)에 유배시켰다.

그뒤 단성으로 이배되었다가 간사한 무리들의 참소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조참의 정보와 숙부인 밀양박씨 비석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크고 잘 단장된 정몽주 묘지를 벗어난다.

 

"외람되지만, 제가 시 한 수 읊어도 되겠습니까?"
이방원이 먼저 말하였다.
"물론이지요."
정몽주가 흔쾌히 대답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은 천천히 시를 ?었다.

고려 왕조를 섬기나 새로운 왕조를 섬기나 마찬가지이니, 새 왕조를 여는 일에 뜻을 같이하자는 마음을 담은 시였다.

 
이방원의 시를 들은 정몽주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함께 새 왕조를 세우자는 이방원의 속뜻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결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정몽주는 이미 새로운 왕조를 따르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답시를 지어 올리지요."
정몽주의 말에 이방원은 어떠한 내용의 시가 나올지 긴장되었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는 죽더라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는 뜻 을 담고 있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시를 듣자 존경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과연 충신이로다.'
하지만 이제 새로 왕조를 세우는 데 걸림돌이 된 정몽주를 고냥 둘 수는 없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일 결심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이날 정몽주는 선죽교에 이르러 죽임을 당한다.

붉은 피가 흐른 자리에 푸른 대나무가 자랐다.

 

봄비는 아직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늘 사돈과의 점심약속이 있다.

이제사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어 있으니 빨리 샤워라도 하고 옷이라도 갈아 입어야 한다.

 

오늘은 청주에 있는 우리 아들식구들도 올라온다.

딱 하룻동안 반가운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딸집으로 이동, 사돈내외와 소주 한 병을 더 마시고...

아들내외와 딸과 사위,손자,손주의 바쁜 눈맞춤으로 시간은 바삐 흐른다.

 

다다음 6월 첫주의 약속.

가족여행을 약속한 우리 가족은 뿔뿔이 제 갈 길로 떠난다.

올라올 때와 내려갈 때의 마음은 사뭇 다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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