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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57)>
선조 11
* 승전의 시작
왜군의 침입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은 왜군의 부산 상륙 이틀 후인 4월 15일 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 함대를 처음 보고는 그 규모와 위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정에 전라좌수군과 합세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원균의 구원 요청에 이순신은 "각자 맡은 지역과 소임이 있어 함부로 쉽게 군사를 이동시킬 수 없다"며, 지원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이은 선조의 명령서의 내용은 "원균이 여러 포구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다고 하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힘을 합쳐 맞선다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출정을 위해 경상우수군의 상황을 파악해본 결과 군사도 군함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사실상 전라좌수군 혼자 만의 힘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왕명을 받들어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이끌고 여수 수영을 출발해 경상우수영 관할 포구에서 결진을 하니, 원균의 판옥선은 불과 4척 뿐이었습니다.
5월 7일 점심쯤, 척후선 보고에 의하면 적선 30 여 척이 옥포 포구에 정박해 있고 왜군은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것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소리 없이 포구로 접근하였고, 이를 발견한 왜군은 황급히 배로 돌아와 다가오는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넓게 진을 이루어 포위해 들어가다가 일제히 벼락같은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동안 일본 수군의 기본적 전투 양식은 빠른 배를 이용해 적선에 접근하여 배에 올라탄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칼싸움에 능하고 조총까지 갖추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왜군은 조선 수군의 예기치 못한 포격에 혼비백산했고, 조선함대가 접근하자 백병전을 펼치고자 했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그동안 훈련한 그대로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해 충돌 공격을 감행하여 왜선을 분쇄하는 한편 왜의 군선보다 더 높은 판옥선 갑판 위에서 일제히 화살공격을 퍼부으니, 왜군은 도저히 대항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전투로 왜선 26척이 부서졌고 수많은 왜군이 수장되었으나,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부상 1명에 불과했던바라 참으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이상 '옥포해전')
승리에 자신감을 더 얻은 수군은 이어 합포에서 5척, 그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11척의 왜선을 부순 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개선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육군보다 더 강하다고 자부하던 해군이 그들 입장에서는 “듣보잡”격인 이순신에게 완패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하여 장검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분재를 난도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58)>
선조 12
**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곧바로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는 등,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습니다.
조선 수군과 백성들은 그동안 "이런다고 과연 우리가 왜군을 이길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옥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을 믿고 따른다면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2차 출동에 나섰는데, 이 때는 비장의 전함 거북선이 함께 했습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자 왜적들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불멸의 명장 이순신 만의 해전법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입니다.
이순신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龜船)과 판옥선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습니다.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은 다음, 조선의 장기인 활과 화약무기의 포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입니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고,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함으로써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으며,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었습니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盲船:장님배)인데,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접근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이러한 거북선은 태종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 거북선의 발명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루 종합해 보건대, 거북선은 이순신이 휘하의 사람들과 함께 조선 태종 때 존재했다는 거북선을 모티브로 실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실전적으로 건조한 창조적 함선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거북선은 나중에 건조된 것까지 도합 5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상황 에서 백성 모두에게 이길수있고 나라를 지킬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한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는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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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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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53세)
이순신
시대 조선 중기(16세기 선조)
태어난 곳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인현동1가)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공(忠武公),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 증(贈) 좌의정, 가증(加贈) 영의정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관직 정2품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
주군 선조
가문 덕수 이씨(德水 李氏)
부모 아버지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배우자 상주 방씨 (온양 방씨, 溫陽 方氏)
친척 형 이희신, 이요신, 동생 이우신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1] (음력 3월 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2] 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어린시절
1.1.1 무과 급제
1.1.2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
1.1.3 무관 생활
1.2 임진왜란
1.2.1 옥포 해전
1.2.2 사천 해전
1.2.3 한산도 대첩
1.2.4 부산 해전
1.2.5 원균과의 불화
1.2.6 웅포 해전
1.2.7 삼도수군통제사
1.3 두 번째 백의종군
1.3.1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1.4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
1.4.1 명량 대첩
1.4.2 노량 해전과 전사
1.5 사후 관직
2 가계
2.1 충무공 가계
3 평가
3.1 국내 이순신의 평가
3.2 국외 이순신의 평가
4 주요 저서
5 관련 문화재
6 유적
7 이순신의 이름을 따거나 기념하는 것
8 대한민국 해군
9 관련 대중문화
9.1 기타 관련
10 같이 보기
11 관련 작품
11.1 관련 서적
11.2 드라마
11.3 영화
12 각주
13 바깥 고리
1 생애[편집 | 원본 편집]1.1 어린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 건천동 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이름 순신은 삼황오제중 순임금에서 나온 것인데, 이순신의 형제들 모두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따라 시대순으로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3]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중종 17년)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4]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 동네에서 살았던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 《징비록》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 이로 인해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청도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온양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이순신 장군이 결혼 후 살았던 아산의 집은 장인이었던 보성군수 방진(方震)이 물려준 집이다.[5]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인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청도 은진(恩津)(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온양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6][7][8]
1.1.1 무과 급제[편집 | 원본 편집]
20세에 방씨(方氏)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한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하였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32세 나이가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이순신의 나이 36세가 되던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9]
1.1.2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편집 | 원본 편집]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1587년(선조 20년)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여 그해 가을 풍년이 들었다. 이순신이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고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楸島)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책루(柵壘)를 지키고 있던 수장(戍將) 오향(吳享)과 임경번(林景藩) 등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했다. 당시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10](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北兵使)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1.1.3 무관 생활[편집 | 원본 편집]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11]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2 임진왜란[편집 | 원본 편집]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쓰던 거북선 모형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일본군 약 16만 명의 선봉인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5월 26일(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9일(음력 4월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1.2.1 옥포 해전[편집 | 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옥포 해전입니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땅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유린되고 있었다.
1.2.2 사천 해전[편집 | 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사천 해전입니다.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음력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일(음력 6월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16일(음력 6월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1.2.3 한산도 대첩[편집 | 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산도 대첩입니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8월 10일(음력 7월 4일) 출발, 12일(음력 7월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 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의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배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리고 때로 적함에 승선해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8월 15일(음력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6일(음력 7월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