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보전 인데 김교각 스님이 99세에 입적하여 시신을 3년간 항아리에 모셨다가 4년째 열었는데
육신이 산사람과 같다하여 명나라 신종황제가 "호국육신보탑"이라 명 하였다 한다
이 안에는 지장왕의 발자욱 돌이 선명하게 있는데 그기에 발을 담고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
천대사로 올라가는 돌계산이 1,000 계단인데 힘드는분은 100위안 (13,000원)만 주면
현지 인들이 가마로 태워준다
|
구화산(지장보살)1,342m
구화산(九華山)은 안휘성(安徽省) 남단에 자리잡은 명산으로 북으로는 양자강에 접해있고 남으로는 황산에 이어져
있으며 120평방킬로미터의 면적으로 최고봉인 시왕봉의 높이가 해발1342미터이다.
낮은 산이지만 산봉우리는 극히 험하며 연평균 16도의 온화한 기후이며 습도가 비교적 높다.
보타산(普陀山: 절강성) ․아미산(峨眉山: 사천성)․ 오대산(五臺山:산서성)과 함께 중국의 4대 불교 명산의 하나이다.
원명은 구자산인데 후에 시성 이백이 멀리 뭇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소유이분기,경산개구화”이라는 명구를 써서
이름을 구화산으로 고쳤다.
산에는 계곡 폭포,기암괴석,오랜동굴,푸른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 산수경치가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명승고적들이 도처에 분포되어있어 예로부터 동남제일산으로 불리고 있다.
구화산의 불사활동은 동진융안5년(서기401년)에 승려배도선사가 이곳에 사원(복호암)건조하고
전도를 하면서부터시작되었다.
중국의 4대 보살로 관음(觀音: 보타산), 문수(文殊: 오대산), 보현(普賢: 아미산) 그리고 지장이 있는바,
바로 이곳에서는 지장을 모신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바로 지장이 신라 승려인 김교각(金喬覺)이란 점이다.
이곳에서는 지장보살이 아니라 이곳 주민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으로 숭배된다는 사실 또한 주목된다.
구화산은 천대,부용,선도,십왕(十王),사자,선녀,미녀봉(美女峰) 등 99개의 산봉오리가 연이어져 있으며,
기암괴석의 계곡으로 펼쳐져 이백(李白),왕안석(王安石) 등 의 찬시(讚詩)가 넘쳐 있다.
이러한 깊은 골짜기에는 백세궁(百歲宮) 등 96개의 사찰이 있으며, 구화가(九華街)에만도 화성사(化城寺)
저원사(袛園寺),육신보전등,큰 절이 있다. 이 구화산에는 61,000여 개의 불상이 있으며,
그외 황제의 교지(敎旨),장경(藏經), 기타 진기한 불교문물이 2,000여 점이나 있고 스님이 500여명이 있다고한다.
말하자면 중국의 “불교선경이며 불교성지”이다.
구화산 중심에 화성사가 있다. 8세기 초 김교각이 와서 세웠다는 이 절이 지금은 구화산 역사문물관이 되고 있다.
그가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체청(諦聽)은 전체 모양이 사자이나, 꼬리는 말, 발은 용, 머리는 사자 모습의
독각수(獨角獸)로 귀중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가 신었던 짚신과 모자를 보아 7척 장신이었다는 기록과 부합된다.
신라 왕족인(제32대 효소왕때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제33대 성덕왕이고 어머니는 성정왕후라함)
김교각이 개원(開元) 7년(聖德王 18년, 719)에 이곳에 와서 도를 닦은 후, 정원(貞元) 10년(元聖王 1년,
기원794음력7월30일 세수99세)에 입적(入寂)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죽은 지 3년 만에 함 속에서 그대로 산사람 같았으므로 불교신도들은 지장보살이 변신(환생)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바로 육신보전은 그를 위해 만든 것이며,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
김지장왕은 지금도 두제자(閔氏父子)의 호위하에 이곳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신보전의 주지인 성부(聖富)스님도 김교각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서 이 지역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생불이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구화산 역사문물관에 전시된 그의 유품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불교의 전래에는 분경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불교와 도교가 서로 도가 높다고 다투었기에
남조 양문제는 불교경전과 도교경전을 함께 불사르게 했는데, 도교경전은 잿더미가 되었지만 불교의 경전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후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구화산 유람객들은 늘 화성사,육신보전,천대사,상선당을 참배한다.
옛적 구화산 민원협곡에는 민양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부호로서 구화산 지역의 삼림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성이 선량하고 남을 돕기를 즐겼으며 벗을 널리 사귀었다.어느날 스님이 민공앞에 나타나 수행할 장소를 구하며
가사를 펼칠만한 크기의 땅을 바라자 민공은 얼마나 큰땅이 될까하여 이를 허락하는데
스님이 가사를 공중에 뿌리자 구화산의 99개 봉우리를 모두 덮어버렸다.
민공은 보살현령을 깨닫고 구화산을 스님께 바쳤을뿐만아니라 자기의 아들인 도명을 스님의 제자로 바치고
뒤이어 자기도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또 스님이 동아봉 큰돌위에 앉아 염불하고 계시는 동안 독벌레에 물렸으나 자세도 흐트러지지않고 아무런 잡념이없었다.
이에 산신이 감동하여 미인으로 둔갑하여 약을 갖다 드리고,맑은 샘으로 사죄하였다.이때부터 스님이 앉은 돌에서는
샘이 솟았다고 한다. 당숙종년간에는 제갈절 일행이 석굴에서 면벽하고 계신 스님을 보았는데 스님의 발우네는
백토와 소량의 쌀이 담겨져 있었다.그들은 이에 깊이 감동하여 돈을 모아 화성사를 지어 교각스님께 바쳤다고 한다.
화성사는 구화산의 개산사원으로 장엄하고 고박하며 기세웅장하다.화성사 건립이후 스님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서 찾아
오는 승려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스님은 승려들을 거느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양식을 자급자족 하였다.
794년 99세의 김교각 스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열반에 드셨다. 문도들이 어찌할바를 모르는데 갑자기 산이 진동하고
돌이 굴렀으며 종을치니 종이 소리없이 땅에 떨어지고 지붕의 서까래도 크게 훼손되었다. 교각스님이 열반하자 제자들은
스님을 큰 항아리에 모시고 뚜껑을 봉했는데 3년이 지난 후 안장하려고 개봉하여 보니 옷은 부패하였지만 살은
그대로 이고 얼굴색은 생전과 꼭 같았다.
관절에서는 쇳소리가 났는데 석탑속에 육신을 안장할 때 신비한 빛이 감돌았다.
현재 사원에는 명나라의 유지,역대황제가 하사한 금인과 명나라 판본의 장경6천여권 및 청나라 범문 패엽경등 진귀한
문물들이 소장되어있다. 육신보전은 김교각이 99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입적한후 얼굴이 산사람같이 명나라 신종황제가
<호국 육신보탑>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얻어진 명칭이다.전하는 바에 의하면,천대사는 김지장이 거주하던 고찰이라 한다.
산세를 따라 지은 5층 누각으로 법당내의 대들보와 벽제사이에는 작은 목불들이 걸려있다.육신전 아래에 있는
상선당에는 진기한 금사전,금전수가 있는데 이는 이백의 고주전이 변하여 생겼다고 한다.
구화산의 유명한 사원에는 많은 승려들이 매일 염불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불교분위기가 매우 농후하다.
음력7월30일은 지장보살의 탄신일로서 많은 사원에서 불사활동을 행하여 전통적인 구화산제로 형성되었다.
승려와 참배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며 민간에서는 등불놀이,죽마놀이,꽃불올리기,
고대극 공연을 하고 시장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불사활동은 한달동안 계속된다.
청나라 말기 불교가 제일 번성할 때 구화산에는 300여개의 절이 있었으며 승려는 5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는 84곳의 사찰이 보존되어있으며,6000구의 불상과 1300여건의유물이 남겨지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