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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4권. 17세기, Le dix-septième siècle1-273
제4장, 빠스깔 Pascal 114-126
1절 빠스깔의 방법들 Les méthodes de Pascal, 114
빠스깔(Pascal, 1623-1662)[서른아홉]은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과학자이며 카톨릭 종교의 변신론자이다. 과학자로서 그는 갈릴레이(Galilei, 1564-1642)에서 뉴턴(Newton, 1642-1727)으로 이어지는 수학 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의 전통에 있다.변신론자로서 그는 무신앙자들(libertins)에 응답하면서, 증명될 수 있었던 신앙의 모든 진리들을 이법에 의해 증명하면서 서막을 알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증거들을 찾았던 것은 역사 속에서이고 그리고 충돌을 파악한 인간적 자연 속에서이며, 심지어 그가 찾았던 물리적 진리의 증거를 찾았던 것은 경험 속에서이지 추론 속에서가 아니다. 데카르트도 또한 과학자이며, 어느 정도에서는 변신론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천재성은 그가 과학자가 되지도 변신론자가 되지도 못하게 금지하였는데, 적어도 동시에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게다가 “이법들의 연쇄” 밖에 신앙의 진리들을 남겨두고서 “이법들의 연쇄” 속에 과학과 변신론을 들어가게 하지 않는 한에서 이다. 반대로 파스칼의 천재성은 그가 과학과 변신론을 철학의 그물망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을 고찰 밖에 두는 것도 금지했다. 거의 동시대적인 두 인간 사이에는 매우 깊고도 또한 매우 감동적인 대립이 있었는데, 어떠한 대립으로도, 역사 속에서 틀림없이, 인간정신의 자연에 관하여 우리에게 더 잘 밝힐 수 없었다. (114)
빠스깔이 겨우 청소년을 벗어나는 시기(1639)[열여섯]에 쓴 그의 「원뿔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coniques, 1639)」에서, 특성있는 인간 면모를 스스로 드러내 보였다. 이 간략한 문제에(원뿔의 모든 성질들이 연역되어 나올 수 있는 원리는 찾는 것), 그는 이 문제의 해답을, 오직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간략한 방법의 발명에 의해 응답하였다. 빠스깔은 발견했다. 모든 원뿔들의 성질들은 어떤 6각형의 발명에 의존하며, 그는 그것을 비밀스런 육각형(hexagramme mystique)이라 불렀다. 각 문제는 이렇게 매번 새롭게 제기된 발명의 노력을 요구한다. 이 발명의 노력에서 수학자는 자기에 유용한 용어들과 원리들을 정확하게 발명하는 재능을 가졌다. 이리하여 나중에 빠스깔은 곡선에 의존하는 회전판의 무게 중심과 면적들 또는 부피들을 발명하기 위해, 삼각형들의 개수들[몇개의 삼각형인지를]의 성질들을 고찰해야만 한다. 빠스깔이 빵세(Pensées, 1670)에서 그렇게 말하듯이, 기하학자들이 아닌 자들은 생산성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정의들과 원리들에 싫증날 것이고, 또한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명제들에도 싫증날 것이다. 이자들은 신비의 육각형과 원뿔의 성질들 사이에, 삼각형의 수와 무게 중심들의 문제 사이에, 최소한의 근친성도 단번에 직관적으로 볼 수 없다. 이런 연관들의 발견은 모든 사람들에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신에게 즉 아주 적게라도 천재성을 부여받은 기하학적 정신에게 소통가능하다. 빠스깔이 추상 과학들에 대해 말하면서 나중에 말하듯이, “사람들이 이 약간의 인간과 더불어 이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데, 이 약간의 인간은 이에 대해 나를 싫어했다.” 파스칼에게서 방법(méthode)이란 단어는 복수로 상용된다. 즉 해결할 문제들이 있는 만큼이나, 그 만큼 많은 방법들(méthodes)이, 다시 말하면 발명하는 절차들이 있다. 기하학은 대상들을 서로 서로 구별하며, 그 다음에 기학학적 정신은 기하학자와 다른 인간들을 구별한다. (115)
심지어 기하학적 정신은 과학적 정신과 아주 다르다. 정태 수(水)력학(l’hydrostatique)에 접근한 그 빠스깔 같은 인물은 신비적 육각형을 발명한 자와 동일한 정신적 재능[천재성, 선물]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기를 “어떤 이들은 물의 결과들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것에서는 거의 원리들이 없다. 그러나 그것[원리들]의 귀결들은 매우 섬세하여, 거기에[귀결들에] 갈 수 있는 것[길]은 극단적 직선[방향]만 있다. 이 어떤 이들은 아마도 그 점에서 위대한 기하학자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하학자는 많은 원리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정신이라는 자연은, 이것[자연]이 원리들을 밑바탕까지 거의 조금만 침투할 수 있을 정도로, 또한 이것[자연]이 많은 원리들로 되어 있는 사물들을 최소한의 세계에도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함의 정신(l’esprit de justesse)”이물의 결과[효과]들의 탐구 쓰이는데(왜냐하면 정태 수력학의 원리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확함의 정신은 “자기의 힘과 직선방향”과 더불어 밀접할 수 있다. 반면에 기하학자는, 이것들을 혼동하지 않고서 수많은 원리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그는 너비의 정신을 갖추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약화시킬 수 있다.
과학자로서 빠스깔은 또한 다른 연구에도 적용된다. 그 연구에서 원리들의 인식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서 사람들은 헛되이 원리를 찾는다. 어느 데카르트주의자는 원리에 의해 충만(le plein)을 주장할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냐하면 당신은 어린 시절부터, 당신이 상자속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때, 그 상자가 비어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당신은 빈 것(le vide, 진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것은 관습으로 강화된 당신들 감관들의 착각(une illusion)이며, 과학이 이것을 구정하게 해야만 한다. 다른 이들이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신들에게 학교에서, 진공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쁜 인상에 앞서 매우 깔끔하게 그것[빈 것이 있다]을 이해하는 당신의 공통 감관[상식]을 타락[손상]시켰다. 그래서 당신의 첫째 자연에 도움으로 공통감관[상식]을 교정해야만 한다(n° 82).” 그 귀결에 의해서 빈 것의 질문 속에는, 원리들에 어떠한 가능한 도움도 청할 수 없다. 반대로 경험은 확실하게 확립한다. 즉 기압계의 관 속에, 수은의 그 위에 자리를 차지한 내부는 비어있다. 수은 기둥의 무게는 자유로운 표면위에 작용하는 압력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아닌 게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쀠-드-돔(Puy-de-Dôme)의 유명한 실험은 장치의 고도와 더불어 축소하는 수은주의 높이[공간의 확장]를 보여준다. 이 실험은 이런 압력이 대기압이라는 것을 증거 한다. 사람들이 빈 것의 현존 또는 공기의 무게를 주장하거나 또는 부정하는 것은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다. (116)
기하학의 정신, 정확의 정신, 실험 방법은 다른 재능들을 요구하는 그 만큼 많은 정신의 방향들이다. 빠스깔은 이것을 서술하지 않았고, 바깥으로부터 방향들을 사색하지 않았다. 그는 각 방향으로 열정과 정열로 참여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것들을 실행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매우 강력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각 방향에서 그의 성공은 기적과 같았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는 각 방면에 새로운 길들을 열었다. 수학에서 그는 운수의 계산[확률론]을 창안했다. 특징적인 삼각형을 근거로, 곡선들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것들 중의 하나는 라이프니츠에게 미분계산의 절차를 암시한다. 물리학에서 그의 정태 수(水)력학에 관한 작업과 기압계는 유체들의 역학 연구에 충격을 주었다. (116)
정신이 그가 다루는 대상의 영역에서 조정(l’ajustement)과 같은 것은 탁월한 파스칼 관념이다.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바르다(droit)”는 정신은, 그 정신이 영역을 바꾸면, “거짓(faux)”일 것이고 또한 지지받을 수 없을 것이다. 기하학자 빠스깔은 그것[바르다]으로 실험을 했는데, 이 경우들은 그가 기사 메레(Méré, 1607-1684와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났을 때이다. 사용하는 사물들 특성있는 사물들을 건전하게 또한 진솔하게 판단하는 이들이 그래도 많다. 사람들은 그러한 안정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하학자처럼 추론했던가? 추론했다는 데 대해서는 예(oui), 기하학자 처럼에는 아뇨(non). 기하학자는 아마도 매우 큰 수를 사용하나 원리들로 끝난다. 원리들의 각각은 구별된 정식이어서, 주의 깊은 정신에 의해 완전하게 파악된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그들 사이에 또한 결론과 함께 연쇄로 엮여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이 원리들로만 만들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원리들은 어떠한 용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신의 용도는 “공통의 용도 속에 있고 세속인의 눈앞에 있다.” 그리고 어떻게 세속인이 [다음 세 차례의] 원리들을 가지고 기하학적 추론을 단련할 것인가? [우선] 그 원리들은 “인식되었다기보다 느꼈던” 원리들이며,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리들을 “무한히 수고하여서” 만이 다른 원리들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다음으로] 원리들이 너무나 수가 많아서, 그 원리들을 순서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무한한 사물[일거리]”일 것이라 할 정도이며, 결국에는 그 원리들이 어떠한 판명한 정식을 갖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표현은 모든 인간들에게 통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는 추론하지 않는다. “범인은 그것은 그것을 묵시적으로, 자연적으로 기교 없이 행한다.” 그 범인은 기하학적 정신과 매우 다른 정신을, 즉 섬세의 정신(l’esprit de finesse)을 천부적으로 부여 받았다.섬세의 정신은 특히 “사물을 유일한 시선으로 보는 데 있으며, 추론의 진행에 의해서가 아니다.”(117)
이런 섬세의 정신의 발견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 이것은 진지한 추론이다. 즉 이런 추론이 기하학적 추론과의 관계는 마치 수학들 속에서 카발리에리(Cavalieri, 1598-1647)의 불가분적 것들의 계산과 유한한 합의 계산의 관계와 거의 가까운 관계이다.섬세 정신과 기하 정신의 관계는 마치 무한과 유한과 관계처럼, 마치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정식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직관과 담론의 관계와 같다.
빠스깔은 데카르트가 예지의 통일성에 근거한 방법의 통일성을 찾았던 거기에서 고립되고 분리되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는 접근하고 비교하였다. “정신”의 가치는 그의 소질(son aptitude)에서 그의 고유한 영역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다. 그러나 거기서 단지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 그것은 전문가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무엇을 가치 있게 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점에 관해서, 데카르트는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 과학들은 판단을 강화하는데 쓰이는데, 왜냐하면 과학들은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는 유일한 지성이기 때문이다. 빠스깔은 이에 대해 전문가로서 판단한다. 하나의 정신이 그 정신의 영역에서 풍부한 생산성이기 위하여, 그 정신은 독점적(exclusif)이어야 한다. 즉 “기하학자들이 섬세하고, 또한 섬세한 것들이 기하학자이는 드물다.” 인간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부터 멀리하는 연구들에 전념하는 것이 좋은가? “내가 인간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을 때, 추상적 과학들은 인간에서 고유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보았으며, 그리고 과학들을 모르면서 다른 조건들로부터 보다, 과학들을 침투하면서 나의 조건으로부터 내가 더 멀리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144).”
빠스깔은 “인간의 과학”에 몰두하였는데, 그가 카톨릭종교의 변신론을 시도했던 찰나에서부터였다. 그에게서 이런 과학과 이런 변신론은 연동된 사정들이다. 인간적 자연[본성]은 계시된 크리스트 종교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제안한다. 인간은 그 종교 없이 그 인간 자체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에게 제안된 새로운 문제에서, 빠스깔은 전적으로 자신의 천재성에 충실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문제의 모든 상황들에서 완전히 적용되는, 그리고 그 상황들의 어떤 것도 빠뜨림 없이도, 해결책을 찾았다. 인간의 문제와 연관해서 크리스트의 계시는 원뿔의 문제와 연관하여 신비적 육각형의 역할과 같고, 삼각형의 수의 역할과 같다. 직선 위에 원의 회전(la cycloïde)에서 무게 중심의 역할과 같다.문제의 해법은, 그것이 아무리 통찰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료들의 분석에서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독창적인 용어들을 발견하거나 또는 잘 지어내야만 한다. 재능 있는 정신들만이 그 용어들의 문제에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 용어들은 그 자체적으로 파악된 용어들에 속하는 데카르트적 지성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다른 것들이고, 사물들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거기에, 도처에서, 해결책은 밖으로부터, 즉 크리스트교 종교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 종교는 우리의 인간적 기준들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그 자신에게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118) (56WMA)
3절 빠스깔, 변신론자 Pascal apologiste 121
따라서 빠스깔에서 종교적 변신론은 크리스트교 종교의 진리의 증명이 아닐 것이다. 또는 이런 증명은(구약 경전에 의해서든 기적에 의해서든 전통적 증명)은 그것의 일부분일 뿐이며, 이런 증명에서 이런 부분에서는 전통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만이 자기의 고유한 임무라는 것을 인간의 모든 필요에 완전하게 응답한다고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할 때, 문제인 것은 진리라기보다 상황에 맞음(l’opportunité)이다. 왜냐하면,왜 이런 정확한 적합성(la convenance)이. 우리의 편견들의 결실인 다른 종교들의 진리가치들보다 우월한 진리가치를 그에게 부여하는 것인가? 빠스깔은, 모든 크리스트 종교인들과 함께, 크리스트교의 진리들의 유일한 증거란 계시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 정신 속에 유일한 접근 수단이란 은총이라는 것을 안다. 빵세에 앞서, 그는 「빈 것에 관한 논의의 머리글(Préface du traité sur le vide)」에서 매우 잘 알려진 쪽들을 썼다. 그 지면을 통해서 그는 신 자체 속에 그의 근원을 갖는 권위 속에서, 종교적 방식으로 진리 탐구의 유일한 방법을 보게 한다. 따라서 그는 빵세에서, 우리의 초자연적 숙명에 관한 그리고 크리스트의 성찰에 관한 계시의 진리들을, 출발점에서부터 자료로서 수집할 것이다. (121)
그것[진리]들의 전통적 증거들은 기하학적 증거들의 자연으로부터 나왔으며, 변신론의 나머지 증거는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들, 즉 기적들 또는 예언들은 불신자들을 설득할 수 없는 것들이다. 증거들에 의해 신은 계시되는 만큼이나 감춰져 있다. 따라서 신앙은 칭송받을 만하고, 그리고 신앙은 은총에 의존하지 추론에 의하지 않는다. (121)
남은 것은, 불신자들에게 야야기 하면서, 증거들을 사용하기에 앞서, 크리스트교 종교가 단지 인간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리하여 인간이 진리를 욕망하도록 이끌어야 하며,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는 곳에서 그 진리를 따라가기 위하여 정념들로부터 구별되어 적합하로독” 이끌어야 한다. (122)
그러나 그러기 위하여 인간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인식해야만 한다. 데카르트에게서 인간의 자연은 철학자에게 이법들의 질서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발견된다. 반대로 빠스깔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는 것 전부를 유일한 경험 속에, 즉 인간이 스스로를 모든 면들에서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그 경험 속에, 집중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사람들이 유용하게 다시 다루기를 원할 때, 그리고 그가 속고 있다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자 할 때, 어떤 측면에서 그가 사물(la chose, 인간적 사정)을 생각하는 지를 관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물[사정]은 그 측면에서 일상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에, 그 사물[사정]이 그에게 어떤 측면에서 이런 진리를 고백하는지를 관찰해야만 한다.(9)” 빠스깔이, 그에 앞서서 인간을 인식하기를 원했던 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비판의 원리이다. 그는 에픽테토스에게 인간은 “사유에 의해” 위대하다고, 말하자면 심지어 자기 자신이 연약함에도 모든 사물들 판단할 능력에 의해 위대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금욕주의자들(les stoïques, 스토아학자들)은 인간의 비참함을 몰랐고, 그럼에도 그들의 학설은 효과가 없고, 그들의 충고는 생산성이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전체 제국이라는 허구적 인간에게 말 걸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몽테뉴는 이유가 있다. 그가 인간의 연약함과 허약함을 제시했을 때이고, 그의 상상에 의해 끊임없이 속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 그가 믿는 정의에, 또한 자기 나라의 관례에 속하는 정의에, 멈추어 있으면서, 정신의 달변을 천성으로 부여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정신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 보게 하려는 정확한 관점을, 그리고 정당한 전망에서 사물을, 고착시킬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에 속하는 판단들의 중요성보다 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행한 판단들의 중요성에 얽매인 것과 같은 관점에서, 질병들과 죽음에 종속되듯이 그가 견해에 예속되어 있다. “이런 최후의 작동은‥…그 나머지로서 희극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항상 피로 물들어 있다. 결국 사람들은 머리를 땅에 쳐 박는다. 그러한 것이 영원히 엄청나다.” 빠스깔은 자기 작품 속에서 몽테뉴의 요점 전체를 통하게 했다. 그럼에도 몽테뉴는 거짓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위대함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그의 자아 속에서 만족함에 의해서, 그리고 절망을 제외하고서 만족이 자기에 말하는 모든 “우둔한 자들”에 의해서, 다음에 이른다. 즉 “걱정도 후회도 없이 구원에 대해 무사태평(nonchalance, 무기력)하기에 이른다. ‥… 그는 느슨하고 무기력하게 죽는다는 것만을 단지 생각할 뿐이다.(63)” 따라서 스토아학자들과 몽테뉴가 모든 대립된 길들에 의해 도달하고자 애썼던 영혼의 고요함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화폭에서 선들[특성들]을 삭제하면서, 그들은 화폭이 있는 그대로보다 더 정합적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23)
또한 거기서 전체적이고 또한 덩어리(un bloc)로 된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간에 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동일한 진리를 가지고 그 반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인간은 부정합 자체이고 모순이다. 비극적 부정합인데, 왜냐하면 그 부정합은 마치 하나의 회화작품처럼 우리들에게 제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회화에 우리들이 무차별적이고 또는 회화는 기껏해야 지적 불만족을 이끌어낼 것이다. 그 부정합은 우리가 갖고 있는 보다 깊은 무엇에서 우리에게 관여한다. 부정합은 우리의 도덕적 삶에서 지지점을, 모든 안전보장을, 또한 회의주의자의 무기력만큼이나 스토아학자[금욕주의자]의 신뢰를 걷어내어, 우리는 몹시 불안하게 되어, 중심에서 이탈된 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공상 괴물인가? 얼마나 새롭고, 얼마나 혼돈 스럽고, 얼마나 모순의 주제이며, 얼마나 경탄할 만한가! 모든 사물들의 심판관이며, 땅의 바보 같은 벌레이지. 진실한 위탁인, 불확실과 오류의 시궁창, 우주에 대한 영광과 폐기물이지.” (123)
상당한 철학자들(오르페우스 교도들 이래로)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 속에서, 부분적으로 천체로부터[신족으로] 이루어지고 부분적으로 거인 족으로 이루어졌지만, 서로서로 투쟁하는 매개적인 존재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특히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노력)은 이런 상황을 그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그 상황을 자연의 질서 자체로 태어나게[생겨나게] 하고, 실재성들의 하강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상황에게 그것의 추론적 지위를 부여한다. 르네상스가 준비했던 우주의 새로운 관망(vision, 통찰)은 자연일체와 연관을 불가능하게 한다.무한한 공간의 전율할 만한 침묵 속에서 자연의 구역은 사라졌으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오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위치가 표시되었던 유한하고 정돈된 우주의 환상적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기반을 더 이상 다룰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축소되었다. (123)
그런데 인간은 자기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몽테뉴는 자기의 고유한 자아를 그려볼 “어리석은 기획”을 했으며, 하나의 자아가 모든 사물들의 중심을 이루기를, 그리고 그 자아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는 불의이며 동시에 불편이다. 상호 공손함은 불편함을 잘 걷어낼 수 있으나 불의를 걷어낼 수 없다(455). 그런데 그러한 것 자체가 거짓이다. 왜냐하면 이 자아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며, 인간은 “기분전환(divertissement)(139)”에 의해 가장 가능하게 자아에게서 벗어나기를 시도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혼자이며, 그는 지탱할 수 없는 권태(un ennui) 속에서 산다. 대화들, 놀이, 책읽기, 수많은 다른 수단들이 우리를 즐겁게 하면서, 이것들은 우리가 그만큼이나 좋아하는 자아에 대해 연약함을 우리 스스로 공상[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바깥으로부터 온 지지기반들은 또한 아주 부서지기 쉽고, 속임수이다. 진실로 우리에게 치료제처럼 보이는 기분전환은 권태보다 훨씬 더 큰 잘못[악]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잘못들에 맞는 치료제를 찾는데, 사물 전체보다 자기를 더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기로부터 사물들에게, 또 사물들로부터 자기에게 끊임없이 거부되어서, 그는 “결코 만족될 수 없음에도” 헛되이 행복을 찾는다. “왜냐하면 행복은 우리 속에도, 피조물들 속에도 있지 않고, 신 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124)
인간적 고뇌(la souffrance)에 대한 그림[회화]는 빠스깔의 크리스트교에 어떠한 빚도 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을 그가 교리에 대해 부여한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구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 자연의 모든 특징들은, 만일 사람들이 크리스트교에 의해 계시된 인간의 초자연적 숙명에 관련된다면, 설명된다. 그 철학자의 착각은 하나의 자연을 믿는데 있다. 그 자연에게 그는 헛되이 모든 것은 연관시키기를 원했다. 전망을 변하게 해야만 하고, 인간이 배우가 되는 초자연적 드라마 속에서 인간을 보아야만 한다. 즉 신적 그의 기원으로 오는 인간의 위대함, 어린이들이 타락의 욕심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는 것 같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태어나는 비천함, 속죄없이 신의 인식은 인간에게 무용하기에 인간에게 예수-크리스트의 속죄에 의한 구원의 희망. 즉 3막으로 된 드라마, 창조, 타락, 속죄. 이것을 우리는 매우 자주 보았고, 우리는 또한 우주 일체의 재현에서도 드라마로 쓰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우리는 단조로운 리듬, 즉 정지상태-경과과정-전향개종) 빠스깔은 자시 시대와 자기 환경의 정신에 따라서 그 드라마에게 순수하게 종교적이고 내재적인 의미[방향]를 부여했다. (124)
크리트스교의 인간적 자연에 정확한 조정(l’ajustement)이며, 이것이 소위말해서 빠스깔이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무신앙자들 종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유명한 노름(le paris도박)의 견해가 나온다. 인간은 놀이의 취향이 있다. 자연적으로 놀이판을 실행하는 노름꾼이 있는데, 게다가 모든 기회들이 동등한 경우에, 그 판에서 돈을 가장 많이 따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트 종교가 진실이기 위한, 그리고 그 종교가 거짓이기 위한, 동등한 기회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나는 거짓에도 진실에도 판돈을 거는 내기를 차례차례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말하자면 크리스트교인의 삶의 요구들을 고려함이 없이 내가 탐욕의 모든 쾌락들에게 전념한다고, 또는 반대로 내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무들을 완수한다고 가정해보자. 가능한 두 경우들에서 따기(이득)와 잃기(손실)의 저울을 재보자. 크리스트교인의 힘든 모든 의무들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면서, 나에게 이루어지리라는 분명한 따기는, 잃기가 거짓이리라는 경우에, 만일 사람들이 이것을 영원한 구원에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그런 크리스트교의 삶을크리스트교의 삶을 진실이라고 하는 경우에로 이끌면서 이다. 진실과 허위의 기회들이 동등하게 가정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 [종교적 삶의] 진리 위에 판돈을 걸어서 분명한 이익을 얻는다. 인간은 관습과 상상의 존재이다. 진실한 종교는 관습이어야만 하고, 또한 그 종교가 관습이 되어야만 한다. “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한 것이 당신을 믿게 하기도 할 것이고, 그리고 당신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빠스깔에게서는 인간적 자연을 변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수 없다. 그것은 신만의 작품이고 신의 은총의 작품이다. 단지 은총을 잃고 타락한 이런 자연에 오점들(les points)을 빛으로 밝혀야 하며, 빛을 통해서 자연[인간성]은 크리스트교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증명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종교의 증거들은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단지 신자들을 위해서이기에), 오히려 청중의 성향들에 맞게 조정할 줄 아는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인간들이 이치에 의해서보다 변덕에 의해서 지배되기에, 납득하는 자에게서 만큼이나 동의하는 자들에게서 이루어지는”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125)
(임시8:03 56W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