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상순(10수)
하루시조 274
10 01
바람 불어 쓰러진 뫼 보며
무명씨(無名氏) 지음
바람 불어 쓰러진 뫼 보며 눈비 맞아 썩은 돌 본다
눈정(情)에 걸은 님이 싫거늘 어디 본다
돌 썩고 뫼 쓸리거든 이별(離別)인 줄 알리라
비록 눈짓으로 맺은 사랑이지만 아주 굳건하다고 노래했습니다. 눈정(情)이라는 말이 곧잘 쓰였나 봅니다. 그 정은 드는 것보다는 거는 게 좋고요. 상대방의 눈에 드는 조건은 예나 이제나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초장에 등장한 뫼와 돌은 여간해서 변하지 않죠. 그런데 '보며' ‘본다’는 의문형이었음을 중장에서의 ‘본다’로도 확인이 됩니다. 종장의 돌과 뫼를 빌어 두 사람 사이가 굳건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별은 절대 없다’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75
10 02
아이야 연수 다오
무명씨(無名氏) 지음
아이야 연수(硯水) 다오 님에게 편지(便紙)하자
먹과 종이는 그리던 님 보려니와
어떻다 나와 붓과는 그리다가 말리라
연수(硯水) - 벼룻물, 연적(硯滴).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종이, 먹, 붓, 벼루를 일컫습니다. 이들 네 친구는 서로 맡은 바 임무를 협력하여 문방(文房) 쥔장의 뜻을 실어 냅니다. 초장에 나오는 연수는 붓과 벼루의 조연(助演)이지요. 편지는 쥔장의 뜻을 담아내고, 절차를 거쳐 님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편지를 이루는 먹과 종이는 님을 볼 수 있겠지만, 정작 나와 벼루는 ‘그리움만 간직할 뿐이다’라는 탄식이 살뜰합니다. ‘그리다가’가 그리워할 모(慕)외 그을 획(劃) 두 뜻을 겸비하고 있어 문학적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76
10 03
창 밖에 피온 국화
무명씨(無名氏) 지음
창(窓) 밖에 피온 국화(菊花) 어제 핀다 그제 핀다
나 보고 반겨 핀다 구월(九月)이라 미처 핀다
아이야 잔(盞) 가득 부어라 띄워 두고 보리라
핀다 – 피었느냐.
옛사람들은 봄을 보낼 때도 잔을 가득 채우고, 가을을 맞을 때도 잔을 가득 채웠군요. 국향(菊香)이 달콤쌉살, 한로(寒露)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작품을 거듭 읽다보니, 초장과 중장은 모두 네 가지 질문으로 엮었습니다. 작자는 상당히 자신감이 있었네요. 혹시 저를 반겨 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때 되었으니 그 때에 ‘미처’ 핀 것이겠지요. 종장에서는 귀하고 예쁜 국화이니 잔에 띄워 즐긴다는 선비다운 흥취를 살려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77
10 04
창 밖에 국화를 심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창(窓) 밖에 국화(菊花)를 심어 국화(菊花) 밑에 술을 빚어 두니
술 익자 국화(菊花)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 온다
아이야 거문고 청쳐라 밤새도록 놀리라
청치다 – 맑게 치다.
밤새다 - 밤이 지나 날이 밝아 오다.
모든 일이 정치(精緻)하게 돌아가는군요. 국화 심고, 술 담그고, 시간이 흘러 술 익자 국화꽃 피고, 벗님 오고 달 돋고. 이제 할 일이라고는 밤새도록 함께 어울려 노는 일이니 거문고 내어 짚어가며 치는 일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시(詩) 서(書) 화(畵)에 가(歌) 무(舞)를 더했으니 달님도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예찬건
청쳐라... 청 이란 소리는 거문고에서 아주 중요한 음정입니다.
국악음정으로 임종에.해당하고
여러줄이 임종으로 조율되어 있습니다.
가곡에서도 거문고의.청소리 = 임종 소리를 듣고 조율합니다.
청은 크게.납니다.
대현의 소리는 대부분이 청소리 = 임종소리 입니다.
당시엔 선비들은 죄다 거문고는 연주는 못해도 서재에 걸어두고 그연주 원리는 상식이었죠.
다음의 노래를 들어 보시면 청소리 가늠이 되실듯.
하루시조 278
10 05
창 구명을 뉘 뚫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창(窓) 구명을 뉘 뚫어 술독에 달 드노니
이 술 먹으면 달빛도 먹으려니
진실(眞實)로 달빛 곳 먹으면 안이조차 밝으리라
곳 – 곧.
안이조차 – 안에까지.
참 재미있는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술독이 있는 방 들창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누가 뚫었든 그건 별 의미가 없고, 그 구멍을 통해 달빛이 술독에 비친다는 것입니다. 그 달빛 담긴 술을 내가 먹으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속까지 밝으리라 흥을 돋웁니다. 술맛 참 좋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79
10 06
청천에 떠가는 기러기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천(靑天)에 떠가는 기러기 님의 집을 지나 갈다
서신(書信)을 못 전(傳)ㅎ거든 기별이나 일러 주렴
달 밝고 밤이 하 기니 그리워라 하여라
갈다 – 가렸다. 가겠지.
서신(書信) - 편지(便紙).
기별(奇別) - 다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함. 또는 소식을 적은 종이.
하 – 많이.
기별이라는 말에 주목해 봅니다. 재건해 놓은 경복궁 초입 근정문 서편에는 ‘기별청(奇別廳)’ 현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재결 사항을 기록하고 서사(書寫)하여 반포하던 관보(官報)를 발행하였습니다. 조칙, 장주(章奏), 조정의 결정 사항, 관리 임면, 지방관의 장계(狀啓)를 비롯하여 사회의 돌발 사건까지 실었습니다. = 조보(朝報). 그래서 기별이 곧 소식과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초장에는 기러기가 ‘임의 집 위를 지나갈 것이다’고 가정을 합니다. 중장에서는 서신은 못 보내니 내 기별(소식)이라도 전해주어라 부탁을 합니다. 종장에서는 ‘추동의 긴긴 밤에 정말 그립구나’가 기별의 내용이랍니다.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였던 기러기를 빌어다가 자기의 일상을 표현한 순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0
10 07
춥다 네 품에 들자
무명씨(無名氏) 지음
춥다 네 품에 들자 베개 없다 네 팔 베자
입에 바람 든다 네 혀를 물고 잠을 들자
밤중만 물 밀려 오거든 네 배 탈까 하노라
밤중만 – 한 밤중에.
품 팔 혀 배로 이어지는 서술 순차가 재미있습니다. ‘배’가 복(腹)인가 선(船)인가 구별할 줄만 알면 다른 설명은 아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돌직구’로 실명(失名)을 자초한 작자야말로 ‘자유로운 영혼(靈魂)’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1
10 08
칠팔월 겁수진 날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칠팔월(七八月) 겁수(劫水)진 날에 님을 내어 보내옵고
몇 물 건너서 어디메나 가 있는고
내 뜻에 싫은 님이면 이대도록 그리랴
겁수(劫水) - 세상이 파멸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물난리.
어디메나 – 어디 쯤에.
이대도록 – 이다지. 이러한 정도로. 또는 이렇게까지. 이리도.
‘겁수’라는 말이 있군요. 기후 이상이 심각해져서 평소에 쓰던 말보다 더 심한 정도의 기상 관련 단어가 필요해졌습니다. 지난여름, 폭우에 장마에 폭염과 태풍까지, 비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지구촌 어느 한 구석 빼놓지 않고 기후 공습에 시달렸습니다. 이 작품 속의 겁수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간 사내는 생업(生業)을 위해 그랬던 것이겠지요. 님을 내보내놓고 안타까워하는 내자(內子)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2
10 09
하룻밤 서릿김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하룻밤 서릿김에 만곡(萬穀)이 다 익거다
동리황국(東籬黃菊)은 어이 미쳐 피돗던고
아이야 체 가져 오너라 새 술 걸러 먹으리라
만곡(萬穀) - 만 가지 곡식. 온갖 곡식.
익거다 – 익는구나.
동리(東籬) - 동쪽의 울타리. 국화를 심은 밭.
미쳐 – 미처. 아직 거기까지 미치도록.
피돗던고 – 피었던가. 국화의 개화를 새삼스럽게 발견했다는 뜻.
체 -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 데 쓰는 기구. 얇은 나무나 널빤지로 만든 쳇바퀴에 말총, 명주실, 철사 따위로 그물 모양의 쳇불을 씌워 나무못이나 대못을 박아 고정하여 만든다.
모든 곡식이 다 익어가는 가을날, 백로(白露)부터 한로(寒露)까지 한 달 남짓, 우리네 농촌은 가을걷이로 바쁩니다. 서릿발이 내리는 날 곧, 상강(霜降)이면 막바지입니다.
동리(東籬)는 글자대로면 동쪽 울타리인데, 거기다가 국화밭을 가꾸었답니다. 그 가까이 술독도 묻었다고 하고요. 자연스레 국향(菊香)이 스민 새 술을 체에 걸러 마시다니. 땀 흘린 자, 그대여 마셔라. 이리 추어주고 곁에 있으면 한 잔 얻어 먹을 수가 있을 듯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3
10 10
함관령 해 진 후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함관령(咸關嶺) 해 진 후(後)에 아득히 혼자 남아
안개 잦은 골에 궂은비는 무슨 일고
눈물에 다 젖은 옷이 또 적실까 하노라
함관령(咸關嶺) - 함경남도 함주군과 홍원군 사이의 고개 이름.
아득히 -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막막하게.
궂은비 - 날씨가 어두침침하게 흐리면서 오랫동안 내리는 비.
이별을 ‘당한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함관령은 동북지역 기녀들이 상경하는 관리와 헤어지는 마지막 지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별의 명소’였던 것입니다. 안개, 궂은비, 눈물 등 사용된 시어들이 이별의 분위기에 젖어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무명씨 작품의 가장 많은 주제는 '그리움' '이별의 정한'입니다. 교통과 통신의 미개한 상황과 신분적 구속상태는 도저한 불가능을 노래로밖에 어찌할 수 없는 시절을 살아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