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분(草墳)
임만빈
거실 책상 위에 낯선 것이 놓여 있다. 투명하고 작은 곽들이 꽉 들어찬 네모로 된 통이다. 각각의 곽 안에는 깨끗하게 마른 꽃송이들이 들어 있다. 장미꽃, 개망초꽃, 찔레꽃,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모두가 말라서 몸의 부피를 줄여 다소곳이 들어있다. 곽을 세어보니 가로로 여섯 개, 세로로 네 개, 모두 스물네 개다.
한참 동안 이것을 잊고 있었다. 어디에 박혀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책상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 통의 하단에는 '뇌동맥류 수술 이천 예를 축하드린다.'는 문구와 수술실이라고 적혀 있다. 언제였던가? 뇌 동맥류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에서 나오던 날, 휴게실에 케이크와 음류수가 준비되고 간호사들이 이 선물을 주었다.
곽은 뇌동맥류 결찰 클립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클립을 꺼내 수술에 사용하면 곽은 비게 된다. 간호사들이 그것에 말린 꽃송이를 하나하나 집어 넣어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피기 전의 꽃봉오리들을 채집하여 이렇게 다소곳한 모습으로 담아놓았는지 자못 감격스럽다.
반갑다. 이것이 아내의 손길에서 살아남은 것이 또한 신통하다. 아내도 여자인지라 여성이 나에게 주는 선물은 무척 싫어한다. 왜일까? 아내도 이것에 어떤 소중한 의미를 보여하고, 뇌동맥류 수술 이천 예라는 기록과 정성 들여 준비한 하나하나의 꽃송이들이 귀중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곽을 하나 들어내어 열고 냄새를 맡는다. 향기가 그만이다. 나도 죽은 뒤에 이런 향기를 뿜어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날, 학생들의 해부실습용으로 개업하고 있던 후배의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충격적인 사망 소식이고 예상치 못한 제의라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 2년 후배이고 우리 병원에서 비뇨기과 수련을 받았다.
"유언장에 시신 기증 의사를 적었고 유족들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직원이 보고 했다. 해부실습용으로 시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학장에게 보고하고 허가를 받는 사항은 아니다. 그가 의사이고 나와 친분 관계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을 받는 듯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밖이 소라스러웠다. 그의 시신이 포르말린 용액 통으로 옮겨지는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해부실습용으로 시신을 기증할 때는 본인도 많은 고퇴를 하지만 보호자의 아픔도 그에 못지않다.
후배의 시신이 사용되는 동안 해부실습실을 방문하지 않았다. 몸의 해체로 얻어진 해부학적 지식이 학생들의 머릿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상상만 했다. 실습이 끝난 후 그의 몸이 비닐 덮개로 덮여 보관될 때는 한 번씩 그의 몸을 전공의 시절의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당직실에서 나란히 누워 자던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해부실습이 끝나고 위령제를 지내는 날이었다. 나도 학장 임기가 끝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식에 참석했다. 검은 상복을 입은 학생들과 유족들이 자리를 잡고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강당의 연단에는 화장한 후 봉안한 유골함이 이름 순서대로 안치되어 있었고 유골함 양측에는 향불이 조용히 타고 있었다.
목사님의 기도와 학생 대표와 학장이 영혼들에 대한 감사와 사후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문을 낭독했다. 유족석의 후배 가족을 보자 참을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부터 솟아올랐다. 동안(童顔)의 그와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일의 힘듦을 호소하고, 어떤 때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통행금지에 쫓기기도 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한 줌의 재로 변해서 조그만 유골함에 담겨있고 나는 그의 유골함과 가족을 바라보면서 애틋함과 회한으로 눈가를 적시고 있지 않은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초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비오는 날 우위를 입은 젊은이가 이엉으로 싼 물체에 허리를 굽히면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방송 관계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돌아가신 아버님이라고 대답했다. 자식이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고기잡이를 갔을 때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시신을 당분간 초분에 모시고 있다가 자식이 돌아오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섬의 풍습이라고 말했다.
그가 담겨있었던 포르말린 용기는 초분이고 그의 몸을 덮은 비닐 덮개는 시신을 싼 천처럼 생각된다. 깨끗하게 포르말린에 절여진 몸과 곱게 마른 꽃송이들, 그의 몸에서 나는 포르말린 냄새과 마른 꽃봉오리들에서 뿜어내는 향기… 그의 몸은 산화되어 학생들에게 인체의 신비인 해부학적 지식을 알려주었고 곽 속의 꽃봉오리들은 향기를 뿜어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
그의 시신에서 아름다운 향이 난다. 마치 곽 안의 꽃송이가 내뿜는 향기처럼.
첫댓글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찡~ 합니다.
의사이자 작가인 그도 갔다.
나도 갈 것이지만 무엇을 남겨 놓고 갈 것인가?
깊은 정을 나누진 못했지만 웃음 가득하던 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죽은 뒤에 이런 향기를 뿜어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선생님...
제게는 선생님의 향기가 있어요. 제게 '아무것도 아이다'라고 하셨을 때 제 가슴에 선생님의 향기를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