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경북아문(동수필)
눈이 온 그때 그날
남 길 수
밤사이 누나가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발자국도 없이 하얀 마음만 왔습니다.
오늘도 그날처럼 날 불러낸 누나는 목도리를 동여매 주고 장갑을 끼워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꼬옥 잡고 함께 걸었습니다.
온통 은빛 신비한 세상 속으로 빠지는 듯 꿈길 같았습니다.
“동수야! 늦잠 자면 안 돼, 사내는 일찍 일어나 골목길도 쓸고 운동을 해야지.” 하고 타이르면서 새하얀 들안길을 뽀드득 뽀드득 정답게 걸었습니다. 산도 들도 마을도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된 세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화의 나라를 거니는 듯 가슴이 탁 트이며 기분이 참 상쾌했습니다.
나는 신이나 앞서 달려가며 까불대다 그만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엉덩이가 찡하고 손바닥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 아팠습니다. 그때 누나는 얼른 달려와 일으켜서 눈덩이를 털어 주며 내 시린 손을 잡고 호호호 불어주었습니다. 누나의 그 사랑이 너무도 따뜻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는 내 엉덩이를 툭 치면서
“사내가 이 정도로 울상이면 되겠니? 사내답게 참을 줄 알고 씩씩하게 자라야지.” 하며 용기와 인내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누나! 앞으로 누나의 말대로 사내답게 씩씩하게 자랄거야.”
하며 다짐하고
용기를 내어 혼자 앞서서 달렸습니다. 언덕길에서 또 넘어졌지만 이번에는 아픔도 꾹 참고 스스로 일어나 눈을 털고 예사롭게 걸었더니 누나가 날 보고는 씨익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흔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새 힘이 생긴 듯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위험한 곳에선 항상 조심하고 덤벙거려선 아니 된다고 타일러 주었습니다. 난 누나의 올바른 가르침과 따스한 사랑으로 건강하게 자랐기에 언제나 잊을 길이 없습니다.
눈 내리는 날은 누나와 같이 눈사람을 만듭니다. 열심히 굴리고 뭉쳐서 만든 뚱뚱이 배에 얼굴엔 삐뚤 코에 검은 수염을 답니다.
누나는 이건 너 ‘동수’라고 마구 놀려 댑니다. “하하하 히히히...”
나는 화가 나서 눈싸움을 겁니다. 눈송이를 단단히 뭉쳐서 누나의 몸에 마구 던졌습니다. 얼굴까지 하얗게 눈을 덮어썼습니다. 그래도 누나는 웃으며 내 다리 쪽에만 고이 던졌습니다.
왜 그럴까? 누나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더 센데?
내가 다칠까 봐 일부러 그런 줄 알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던져서 결국 누나는 달아나고 내가 이겨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삽사리도 팔딱팔딱 달려와 “멍멍멍멍” 꼬리를 깝죽거리며 기뻐해 주었습니다.
난 어깨를 으쓱대며 더 뽐냈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그래도 누나는 좋은지 웃으며 또 내 손을 잡고 동마루로 갑니다.
동마루 고갯길은 눈썰매 타기로 아이들이 북적입니다. 헌 비료포대나 가마니를 깔고 앉아 아래로 내려가는 경주를 합니다.
서로 먼저 가려고 내닫다 친구들과 부딪쳐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성내지 않고 도우며 사이좋게 지냅니다. 그 순박하고 정답던 친구들이 더 보고파집니다.
“쭈루룩 쭈루루룩-, 하하하하 헤헤헤-”
누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같이 출발합니다. 내가 잘못하여 넘어질까 또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따라오면서 부축해 줍니다. 다음번에는 날 안고 앉아서 함께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 다정하고 고마운 누나 덕분에 더 안전하고 신이 났습니다. 산자락 평지에서는 누나가 앞에서 끌어주거나 뒤에서 밀어서 즐거움을 더해 줍니다. “사르르 사르르륵-”
정말 호사를 타며 해가 간줄 모르게 즐거운 시간이 갑니다. 누나는 피로하지도 않은 듯 몇 번이고 아래위로 옮기며 태워줍니다. 난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 누나를 앉히고 내가 한번 밀기도 하고 당기며 태워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당기고 끌어주는 건 힘이 너무 들었습니다. 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고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이내 손은 더 시리고 귀는 따가웠습니다. 바라보던 누나가 다시 다가옵니다. 내 힘든 모습과 빠알간 귀를 본 것입니다. 누나는 자신의 지친 모습을 숨긴 채 도리어 찬바람에 내 귀가 발갛게 얼었다고 두 손으로 비벼주고 날 다독이며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난 너무나 가슴이 뭉클해지며 울컥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누나의 그 따스한 사랑과 깊고 고운 정이 내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서로 손잡고 걸으며 눈싸움으로 하얀 기쁨을 쪼개던 그 정 익은 눈이 오늘은 그리움으로 여울져 흐릅니다.
저켠 동마루 고개에서 내 이름 부르며 달려오는 듯 누나의 하얀 얼굴이 자꾸만 아른아른 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