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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고향 양지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초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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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의 종택으로 16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1988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7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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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건축으로 목골 구조의 변동이 없고 영쌍창(映雙窓) 등의 유구(遺構)도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민가를 연구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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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청의 오른쪽에는 윗머리에서부터 방, 마루방, 안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 앞쪽 3칸은 중앙의 1칸 고방 좌우에 각각 중문간이 1칸씩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의 중문간은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왼쪽 중문은 문간채와 몸채의 모방 등으로 이루어진 행랑마당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었다. 앞채의 좌익에는 모방에 이어 마루방을 단부에 배치하였다. 전면 우익을 구성하는 사랑채 부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전면으로 3칸에 잇닿아 있어 누마루를 1칸 돌출시키고, 계자각에 하엽받침의 헌함을 돌렸다. 좌우에는 온돌방을 ‘田’자형으로 배치하여, 앞쪽의 사랑 2칸 뒤에는 책방과 지피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웃방 오른쪽에 마루방 1간이, 지피방 오른쪽에 마루를 깐 옥방이 1간 놓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자연석 기단을 구성하고,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나 사랑채 전면 누하주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안대청 상부 가구는 오량가로 제형판대공을 세워 지붕틀을 구성하였고, 사랑채도 오량가이다. 문간채는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행랑 마당을 이루며, 정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 번째 칸에 대문간을 내었고 왼쪽에 마구간․광․마루방이, 오른쪽에는 문간방과 고방을 배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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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김씨 |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 김석(金錫)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의성김씨족보』에는 김석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 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 등의 문헌과『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의성김씨는 8세손 공우(公瑀)의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장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을 지냈고, 차자 용필(龍弼)은 수사공을,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 외 인물로는 찬성사를 지낸 훤(暄)과 우왕 때 도순문사 광부(光富)가 유명했고, 공조전서를 지내고 『삼국사기』의 발문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 거익(居翼), 추밀원부 춘(椿), 평장사 연(衍) 등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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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김씨남악종택 |
의성김씨남악종택(義城金氏南嶽宗宅)은 용문면 구계리에 있다. 용문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 북삼면이었는데, 북삼면은 ‘맛질’의 옛 이름인 ‘저곡'에서 이름을 딴 저곡면(藷谷面), 저고면(藷古面), 유리면(流里面)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용문사(龍門寺)’의 이름을 따서 ‘용문면(龍門面)’이라 하였다. 용문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감천면과 예천읍, 서쪽으로는 유천면과 문경군 동로면, 남쪽으로는 예천읍과 유천면, 북쪽으로는 하리면과 상리면에 접한다. 구계리는 용문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저곡면으로 ‘아홉 여울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예천군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구계리는 ‘구계’, ‘주막거리’, ‘홈거리’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택이 위치한 곳은 ‘구계마을’이다. 구계는 ‘구려울’, ‘구걸’, ‘구내’라고도 한다. ‘아홉 갈래의 물줄기가 모이는 마을’이라 해서 구계(九溪)라고 하게 되었으며, 구계가 변하여 구려울, 구렐이 되었다. 그리고 또 양지마, 음지마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마을 집들이 모두 반듯반듯하여 예부터 ‘구렐 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금당실 가서 옷 자랑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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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계리. | |
구계리는 용문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5㎞ 정도 떨어져 있다. 원래 예천군 저곡면(渚谷面) 지역으로 ‘아홉 여울이 있다’하여 이름지어 졌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예천군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구계리는 ‘구계’, ‘주막거리’, ‘홈거리’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정사가 위치한 곳은 ‘구계’마을이다. 구계(九溪)는 ‘구려울’·‘구걸’·‘구내’라고도 불린다. ‘아홉 갈래의 물줄기가 모이는 마을’이라 해서 구계(九溪)라 부르게 되었으며, 구계가 변하여 구려울·구렐이 되었다. 그리고 또 양지마·음지마로 가르기도 한다. 이 마을 집들이 모두 반듯반듯하여 옛날부터 ‘구렐 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금당실가서 옷 자랑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주막거리는 ‘주말걸’이라고도 불린다. 구계에서 읍쪽으로 나가는 남쪽 길목에 나그네들을 위한 주막이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구계의 마을이 커짐에 따라 마을의 구분이 없어져 그 위치도 추정하기 힘들게 되었다. 홈거리는 ‘홍거리’라고도 불린다. 구계 앞들에 물을 대기 위해 통나무로 만든 홈통을 걸어 두었던 곳에 마을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남악 김복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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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어렸을 적에 재주가 노둔한 편이고 성품은 강경하다는 평을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남에게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장성 후에도 그의 생애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관직과 대인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강경한 성격을 그나마 완화시킨 것은 학문의 힘이었다. 그가 학문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강경한 성품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남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생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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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형인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란히 입문하였다. 이 때 김복일은 스승에게 인심도심과 같은 철학적 문제와 선기옥형과 같은 천문학적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형제들은 수업할 때나 물러나 쉴 때도 학문을 토론하고 익히기를 그치지 않아 퇴계 선생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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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29세가 되던 해에 형인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과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셋째 형 김명일이 병이 들어 둘째 형인 김수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혼자 남은 김복일은 이러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받은 벼슬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학유(學諭)라는 말단의 벼슬이었다. 당시 그의 벼슬살이는 그다지 마음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나오는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에는 당시 벼슬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처지를 읊은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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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원칙과 소신으로 벼슬살이에 임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부친인 청계 김진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그의 벼슬살이는 전반적으로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벼슬이 종9품직의 학유였는데, 후학들은 그를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울산군수로 있을 때 관내에 폐단이 있어 엄정히 대처하였으나 끝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도중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창원도호부사로 있을 때 감사, 병사와 뜻이 맞지 않아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울산부사가 되었을 때 아전과 토호의 비리를 척결하였고, 전라도 어사를 지낼 때는 종실 귀척인 전라감사까지 비리를 묵인하지 않고 파직시켰을 만큼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울산부사로 있을 때 한번은 경상도를 순시하는 순찰사가 울산으로 온다고 해서 울산부의 경계선까지 영접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순찰사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접대를 받고 술에 취해 도착 시간이 넘었는데도 울산 땅에 이르지 못하였다. 김복일은 자신이 순찰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백성들이 힘들여 생산한 양식을 낭비하고 있음을 탄식하고, “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라고 하면서 돌아와 버렸다. 그의 「행장」에는 모두 세 고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에 울산군수가 되었고, 이어 창원부사가 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다스림이 한결같았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얼음 항아리와 가을 달’, ‘황하 가운데 솟은 돌기둥’이란 말로 칭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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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의 아버지는 안동 천전(川前)에 살았던 청계(淸溪) 김진(金璡)으로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학봉 김성일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형제들도 재주가 있어 김극일, 김성일, 김복일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수일, 김명일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이들은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므로 형제 문인으로 유명하며, 당시 ‘천전오룡(川前五龍)’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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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이 부모를 섬기는 정성은 지극하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어린 김복일은 미역국을 주어도 먹지 않았다. 주위에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미역이 게나 물고기 곁에서 자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나 물고기 곁에서 자란 미역조차 먹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아버지 판서공이 세상을 떴을 때는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를 했으며, 3년 동안 한번도 집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때 병을 얻어 거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살아났다. 그러나 이것은 평생의 병이 되어 그를 괴롭혔고 그가 비교적 단명으로 생애를 마친 것도 이때 얻은 병과 무관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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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두 번 혼인을 했는데, 앞의 부인은 숙인 예천권씨로서 참의에 추증된 지(祉)의 딸이었고, 뒤의 부인은 숙인 안동권씨로서 현감을 지낸 심언(審言)의 딸이었다. 자식은 전 부인의 몸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지(潪)는 선교랑에 제수되었으며, 차남 숙(潚)은 요절하였다. 장녀는 완흥군에 추봉된 감사 최현(崔睍)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정언 최정호(崔挺豪)에게 출가하였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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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어려서부터 남 다른 뜻을 품고 형제들과 함께 독서하였는데, 퇴계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고 나서는 더욱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평소 글을 읽을 때도 반드시 의대를 갖추어 입고 정좌하여 책상을 대하였다. 그가 중요하게 읽은 책은 『주서절요』, 『대학연의』, 『심경부주』, 『근사록』 등이었다. 이 가운데 『주서절요』와 『심경부주』는 퇴계문하의 주요 교재였을 뿐만 아니라 퇴계 자신이 가장 중시했던 책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퇴계 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정통으로 계승했음을 의미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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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이후에도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사군자는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함에 광명정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 털끝만큼이라도 자기를 버리고 인욕의 사사로움을 따른다면 모두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하였다. 그 결과 사나운 측면이 있던 성품이 화평하게 바뀌었고 더욱 바르고 곧았으며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꾸준히 학문에 힘쓴 덕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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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활을 언제나 엄격히 관리하였고 학문하는 선비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그에게 일찍이 지나친 강직성이 세상과 맞지 않아서 필경 배척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언젠가 형인 학봉 선생과 함께 관사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벼슬이 높았던 학봉 선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당시의 세도가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그는 일부러 그들을 피하고 대면하지 않고 선비로서의 자세를 일관되게 지켰다. |
저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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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초기(小學抄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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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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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의 개인 문집이다. 이것은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남은 김복일의 유문을 모아서 엮은 것으로 의성김씨 집안 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 권5에 포함되어 있는 간략한 문집이다. 8수의 시(詩)와 2통의 서(書)가 있고, 그 외 제문과 묘갈, 잡저와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 가운데 1576년에 쓴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는 성균관 학록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시로서 벼슬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향하는 저자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그 외 초간 권문해와 주고 받은 시는 그와 권초간과의 교유가 긴밀했음을 암시한다. 또한 잡저 가운데 「금곡서당(金谷書堂) 창립문」이 있는데, 이 글은 저자가 29세 되던 해에 지은 것으로 예천 고을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금곡서당을 창립할 것을 제창한 글이다. 이 사실은 그가 이른 나이에 이미 지역 사림 간에 상당한 학문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금곡서당은 나중에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정산서원은 이황과 조목을 배향한 서원으로 광해군 대에 창건되었다가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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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는데, 퇴계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에 김복일이 『소학초기(小學抄記)』를 저술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소학』 가운데 중요한 요결을 발췌 정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 저자의 돈독한 실천 철학적 학문 경향을 읽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