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은 서구 미술을 수용한 고희동(高羲東)이〈자매(姉妹)〉(1915)를 통해 서양화를 접한 이래 해방 이후 6.25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1960년대의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의 모노톤 회화로 중심을 전개되었다. 그리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과 민중미술의 태동,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의 정도와 참여에 따른 소그룹 집단의 활동에서 전 세계가 하나 되는 국제화시대에 포스트모던으로 이어 오고 또 인터넷과 정보의 네트워크화로 글로벌화 되어 확장되고 있다. 1950~60년대에 모노크롬은 흑색 또는 그 밖의 한 가지 색이나 같은 계통의 색조를 사용한 경향의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색채를 통해 배어나오는 인간의 감수성을 배제한 페인팅(hard edge painting)이나 형태와 색채에서 극단적인 절제를 표명한 미니멀 아트(minimal art)등으로 F.스텔라, R.맨골드, R.라우셴버그, P.만조니, E.켈리, A.마틴, R.라이만 등이 모노크롬의 대표적 작가들이다. 이들은 화면에 요철을 주거나 리듬감 있는 선 나열하기, 염색처럼 물들이기 등 작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작업하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물질을 정신세계로 승화시킨다는 독특한 맥락에서 모노크롬 회화가 유행하였는데,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서승원, 정창섭, 김기린 등이 모노크롬파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1. 한국 미술의 모노크롬 회화의 특징과 주요작가
한국의 모노크롬은 모더니스트 회화의 이념과 동양사상의 만남으로 독자적인 미술활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보는 관점이 좋을 듯하다. 한국 모더니즘의 정신은 서구 미술의 '평면성'를 ‘비물질주의와 범자연주의의 정신’으로 작업하고자 한 것이다. 비물질주의란 70년대 서구 모더니즘의 경우 미니멀리즘류의 형식주의적인 실천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써오던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라는 말 대신에, 주류 미술의 형식주의적 맥락을 제외하려는 목적에서 특별히 개념주의(Concep-tualism)가 기본정신이나 우리의 독자성은 '비물질주의'를 표방으로 평면개념을 전적으로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한국적 정신문화의 독특한 사색하는 장으로 해석하여 우리 예술양식 개념으로 명백히 했다고 평가된다. 그것은 백색을 정신성과 결부시켜 해석하고, 또 원초적 상태의 무색 속에서 자연의 정신을 겸허히 받아드리는 한국인 자연관과 물질관을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 70년대 '백색 모노크롬' 또는 '백색 단면주의'는 중성구조에 의한 평면의 비물질화, 내지는 비물질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환원을 분석적 측면과 본질적 측면에서 구별 할 때 비물질화를 궁극적 접근 도달점으로 해서 상정될 수 있는 가능성의 두 가지 방법이라는 것이다. 중성구조에 의해 사색하는 정신을 마련하는데서 70년대의 평면개념이 제기되었다는 비물질주의를 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면 서구적 비물질주의와 혼동할 수 있다. 그것은 서양미술 또한 중성구조에 착안해서 소위 '미니멀 스트럭춰'를 창안함으로써 모더니즘의 성과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의 모노크롬 작품들에서 보이는 담담한 표정, 비활성, 구수한 맛, 자연미, 세기의 배척 등은 서구나 일본미술에서 보이는 정교한 인위성, 합리성 표면감 등과는 구별되고 이것이 모노크롬의 한국적 감성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모노크롬의 작품 경향은 평면과 구조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 선묘와 색면을 중시하는 경향, 그리고 부상한 개념과 이미지를 강화하는 경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평면과 구조 관계에서 '그리는 것과 평면의 일원론'은 이론가와 작가를 겸한 '모노파 (物派)'의 '이우환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적인 물질, 물체를 소재로서가 아닌 그대로의 그 자체로 등장시키면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예술언어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한국적 정서보다는 일본의 사고가 묻어 있다는 평가가 다분하다. 그의 이론은 '신체성'과 '장소성'에 대한 해석에서 신체성이란 인간이 세계를 대상으로 인식하기 전에 이미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따라서 세계가 직접경험의 장소로 열리고 그 지각의 자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 만남을 실현시키는 개념이 '장소성'인데 이때 세계와 인간의 만남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객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만남, 그래서 '무의 장소'에서의 만남이 장소성이 된다.
선묘와 색면을 중시하는 박서보의 '묘법'은 선묘라고 하는 그린다는 행위의 원초적 궤적과 그것이 그려지는 바탕과의 완전한 합일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독자성을 보여준다. 묘와 색면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동양적 서법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개념과 이미지는 평면의 의미론적, 존재론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윤형근은 단색수묵화처럼 화면을 흑색의 넓은 색면으로 다루면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조응을 미덕으로 삼아온 한국인의 정신관의 한 면모를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김기린의 침묵의 회화에서 유교적인 절제와 겸손을 읽을 수 있다면 최명영의 균질적 평면 속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일원론적 관점을, 그리고 정창섭의 한지작품에서는 선험적으로 승화된 민족정서를 만나게 된다. 이외에도 여러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이 같은 동양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김복영은 이러한 모노크롬을 우리 본연의 가치내용, "즉 생의 의의가 우리의 전통적 혈맥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발언은 모노크롬이 작품의 내용과 미적가치의 측면에서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주관의 표현을 배제하는 경우, 지워가는 경우, 중화시키는 경우 등 그 방법은 다양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표정에 있어선 소박, 단아하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2. 민중미술의 등장 배경
한국미술이라는 분류의 구조에서 70년대 모노크롬의 등장은 현대미술의 '주류'로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군사독재의 시위 현장이나 대중 집회에서 어김없이 등장한 대형 걸개그림이 등장하고 양식의 걷잡을 수 없는 획일화, 작가들의 맹목적 집단화되는 이른바 민중미술의 등장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이 번지던 무렵에 등장,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삶과 행동을 주제로 하는 미술을 주장했다. 민중미술은 본래 비판적 리얼리즘의 면모가 강하였으나,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노동자 계급성이 강화된 양상을 띠게 되면서 주변적 장르였던 만화ㆍ판화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벽화ㆍ걸개그림 등을 통해 선전ㆍ선동성이 강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대표적 작가는 강요배, 김호석, 손상기,신학철, 전수천 등이다. 시대적으로 혼란스럽고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문제점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붉은색과 푸른색등의 강렬한 색채들과 인물의 사실적 묘사, 전반적으로 우울한 느낌의 작품 성향이 돋보이며 일반 관객이 보기에도 작품설명이 필요 없이 작가의 생각을 읽기 쉽게 표현되어 있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중의 의견을 나타낸 민중미술은 사회적 문제를 미술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면서 계급과 통일문제를 제기했다.
민중미술은 주로 일반회화나 목판화가 그 주류를 이루었으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걸개그림이나 인쇄매체의 비중이 매우 높아진다. 이러한 제반 흐름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성장하면서도 서로 중첩되거나 연합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중 목판화는 작품을 양산해서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편화의 복수적 성향과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민중미술의 작가들이 선호했던 장르중의 하나였다. 특히 강렬한 선과 형태로 민중의 삶과 애환, 분노를 표현했던 오윤의 목판화는 민중판화의 전형이 되었다.
군사정권에 민중미술과 민중미술 작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로 인해 그림이 압수되고, 화가가 구속되고, 벽화가 지워지는 일이 흔했다. 전정호, 이상호가 1987년 9월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는 노동자와 농민이 미국의 성조기를 찢는 장면이 빌미가 돼 제주도에서 전시 도중 작품이 탈취되고 두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987년 8월 민족미술협의회가 주최한 제1회 통일미술전에 신학철이 출품한 <모내기>도 공안당국이 이적표현물로 분류해 작품을 압수하고 작가를 구속했다. <모내기>의 윗부분은 추수철을 맞은 농민들이 잔치를 벌이고, 아랫부분은 농부가 람보와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미국 대중문화와 3.8선, 탱크와 핵무기 등을 쓸어내는 모습이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이 그림의 윗부분은 북한을, 아랫부분은 남한을 상징해 북한을 이상향으로 그린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전정호, 이상호가 1987년 그린 걸개그림 <백두산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는 경찰에 의해 파괴됐으며, <민족해방운동사>를 기록한 슬라이드를 평양에 보낸 홍성담은 1989년 구속된 후 간첩으로 날조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차일환, 정하수, 최열도 구속됐다. 이처럼 민중미술은 1979년 <현실과 발언>을 통해 태동해 1980년대 중반부터 조직화했고 1980년대 후반에 절정기를 누렸다.
3. 모노크롬과 민중미술의 차이점
1970년대 한국적 모더니즘은 정신적으로 서구적 교육 시스템에서 성장했으나 서구 논리의 맥락에 입각한 체계도 아니고 오히려 ‘한국적’이라는 전통이 어색한 세대이며 모노톤의 획일주의를 거부하였으나 서구 사조와 전통,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뚜렷한 대안을 내놓기 어려웠던 혼돈스러운 세대였다. 민중미술은 미술의 기능을 신장시켰지만 경직된 사회변혁 운동의 정치노선에 예속되어 나중엔 미적 자율성과 예술적 특수성을 잃게 되었는데, 이는 기본 문제를 미술에 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의도를 두었기 때문에 결국 작품 제작에 소홀해져 질적 빈곤을 초래하였다. 보수에 대한 지성의 저항 비평은 이들을 작가와 대화 없이 일방적인 잣대로 모더니즘이나 민중미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형식의 분류에 몰아넣었지만 작가들은 비평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모노톤 회화의 획일주의에서 일탈하는 당시 미술계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전략을 취했던 상황을 1980년대 소그룹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으며 그룹이 하나의 이념을 지향하는 경우도 드물다. 1980년대 소그룹들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이 모노톤 회화의 단선적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에 저항하면서 젊은 목소리로 발언하고자 했으며 전략적이건 아니건, 소집단 운동을 통해 탈모노톤적인 여러 방법을 제시하였으나 그런 모든 활동이 미학적으로나 조형적으로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형적·미학적으로는 개인적이었고 1980년대 미술이 1970년대 미술에 대한 반성이라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것은 1970년대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한 모노톤 회화의 강박증으로부터의 일탈이 1980년대에 극대화된 것이라고 해야 옳다는 점이다.
4. 결론
민중미술이 1990년대 중반 급격히 쇠퇴하였으나 얼마 전 대선 후보가 아기를 낳는 그림을 두고 사회적 논란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정치적이니 이슈를 만들어 인지도를 높이려는 상업적 노이즈 전략에서부터 표현의 한계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됐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 소비의 위축은 한국사회에서도 경제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경기 침체가 한국미술 전반에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정신문화의 정체성마저 혼미한 상태에서 국내 정치 현실은 이분법적인 편향의 이데올르기에 또 다시 혼란스럽다.
한국 미술에서 모노크롬회화가 한국적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집단 미술 운동을 전개했다면 한국사회에서 민중미술은 답답한 미술계의 풍토와 정치․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의 저항에 이용된 집단으로 취급되어 한국미술은 다시 역사의 수레바퀴로 소모되는 도구로 전락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