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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총량의 법칙
사 59:1-21(8)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러분, 제목이 좀 거북하지요? 잘 쓰지 않는 속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하는 말은 인권에 관한 책이 하나 있거든요? 경북대학교 법학과 교수이신 김두식씨가 저술하신 ‘불편해도 괜찮아’ 라는 책입니다. 굉장히 딱딱한 주제인 인권에 관한 문제를 아주 재미있게 저술을 하신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그 속에서 인권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사춘기 따남에 대한 경험담이 나오게 됩니다. 그 중에 언급되어지는 말이 지랄 총량의 법칙이에요.
우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라서 어색합니다마는 제 딴에는 그 속어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실감되어질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조금 거북합니다마는 그런 단어를 한번 말씀의 제목으로 차용해봅니다.
김두식 교수님께서 불편해도 괜찮아 라는 책에서 따님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중에 사춘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중1이 되면서 따님의 모든 것이 다 달라졌다고 그래요. 반항적으로 첫 번째 선전포고처럼 부모님에게 한 말이 엄마와 아빠처럼 나는 찌질이로 이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 라고 그랬다는 겁니다. 두 분 다 교수라고 합니다. 교수시면 찌질일 수가 없겠지요. 훌륭하신 분일텐고 더군다나 여러 권의 책을 쓰신 기독교인이시기도 합니다. 그런 분이 찌질일 리가 없는데 부모처럼 안 살겠다고 그럴 뿐만 아니라 매사의 모든 권위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지지 않고 또 귀가 시간이 되면 점점 귀가 시간이 늦어질 뿐만이 아니라 동급생들의 남자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집 앞까지 오는 경우가 잦아지고 해서 하도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희망제작소라고 여러분 들어 보셨습니까?
시민단체로 알고 있는데 그 희망 제작소의 원장님이신 유시주 선생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도 서울대학을 나오시고 인권운동을 하시고 운동권에서 활동하시던 분이신데 그분에게 딸 이야기를 했대요. 그랬더니 그분은 또 고등하교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이 지랄 총량의 법칙을 아느냐 하시면서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일평생 동안 일정 양의 지랄을 부리면서 살게 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사춘기에 많이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노후에 많이 쓰는 사람이 있고 하여간 일평생 동안 사춘기에 쓰든지 중장년기에 쓰든지 사람은 정해진 양의 지랄을 다 부리고서야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요지의 말을 하더랍니다.
기독교인이시고 교수님이고 저술가이신 그런 분이 평소에 그런 단어를 써보셨겠습니까?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뒤로부터는 딸에 대한 에피소드만 생기면 그 유시주 선생님과 함께 딸 이야기를 지랄이라는 말을 섞어서 하면 유시주 선생님은 당신의 아들 이야기를 또 그 단어로 표현하면서 얘기하고 서로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그 단어만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사람이 일평생 쓰고 지불하고 부리고 해야 될 지랄의 양이 정해져 있을까요?
신앙적 의미로 보자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무한대로 늘어 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마음의 양 손이 못 박히고 마음의 양 발이 못 박혀서 내 마음이 꼼짝달싹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사는 게 지랄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말씀은 다시 한번 선민들의 죄악상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뒤 교회시대를 겨냥해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물론 그 표현의 소재들은 눈 앞에 보이는 남왕국 유다의 타락상이 될 수 있습니다마는 지금 이 예언서의 흐름상 마지막 이 부분은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 회복을 얘기하는 중에 관계 회복을 얘기하려다 보니 죄악상을 얘기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죄악상이라는 게 기가 막힌 게 3절부터 8절까지 보면
3절「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4절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5절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을 것이니라」
독사의 알을 품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다 독사의 알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 거미줄이라는 것은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다 함정입니다. 나는 내 딴에 내 인생을 잘 살아보겠다고 계획을 세우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다 함정이에요.
여러분, 이 말대로라면 이게 다 발광이고 지랄이지 뭡니까? 좀 속어이기 때문에 거북합니다. 말하는 저는 얼마나 거북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제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지 않겠냐 하는 겁니다. 이런 죄악상이 나에게도 있는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 선민들에게도 있었다고 그러면 이것이 발광이 아니고 지랄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럼, 왜 이러한 발광의 제스처가 인간에게서 나올까요? 왜 이런 발광적 행위들이 나올 수 밖에 없을까요?
영적 사춘기를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사춘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거예요.
사춘기의 특징이 뭡니까? 자아의식이 고조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주변 모든 상황에 대하여 반항적이 됩니다. 물론 성적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증후군이긴 해요. 그런데 그런 성적 특징이 신체적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신체가 성숙하게 되면서 자아의식이 높아지고 주변의 모든 조건들에 대해 반항적이게 되고 그리고 모든 권위를 다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점점 독립적이게 되어 갑니다. 자아의식이 높아진다는 게 그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본문 2절에 하나님과 너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얘기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사춘기의 아들 딸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거예요.
그럼, 그 전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지요? 옷도 먹을 것도 주는 대로 살았어요. 그러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옷 하나 양말 하나 머리핀 하나 엄마가 사다주는 걸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하는 행동은 다 지질이 궁상을 떠는 것같고 아주 시시콜콜한 냄새가 나고 찌질이 같아요.
우리가 볼 때는 지들이 깻잎 머리하고 다니고 윗도리 교복은 단추가 떨어져 나갈 만큼 조여입고 다니는 게 개똥 뭣처럼 보이기만 하는데 좀 풍성하게 입고 다니면 걔네들이 볼 때는 우리가 찌질이 같은 거예요.
모든 관점과 기준과 이 사고의 체계가 완전히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거예요.
1절에 보면 말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 그대로 받고 살아가면 되도록 되어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가만히 받고 있기를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영혼의 사춘기가 오는 거예요. 영성의 사춘기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대해선 내가 계획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따로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곱게 받고 있지를 못하겠으니까 더 이상은 얌전하게 받지를 못하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야 되겠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찾아도 이런 사춘기적인 반항적 독립심에 의해서 내 인생의 계획을 오늘 본문 말씀처럼 거미줄 짜듯이 인생을 짜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독사의 알을 품는다고 그러는데 독사의 알 인줄도 모르고 그것이 내 인생을 망친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소원과 비전과 꿈을 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서 에덴을 빼앗아간 것이 뱀인 것처럼 내 인생의 기쁨의 동산을 빼앗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 꿈과 비전과 이상과 소원과 바람을 마음에 갖습니다.
다 사춘기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춘기적 지랄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게 평범하게 자연인으로서 상식적인 선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으죠?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소원을 따로 갖는다는 자체가 사춘기적 지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고 사는 게 인간이에요.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록 이런 발광이 나타나는 거예요.
여러분, 발광이라는 단어가 제 단어가 아니에요.
울산시에서 청소년들의 공연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서 공연 시리즈를 1기 2기 3기 4기로 나누어서 하는데 3기까지 이루어졌어요. 청소년 서로 간에 건전한 소통과 밝은 공연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 시리즈 공연의 이름이 발광입니다. 광기를 발산하라는 겁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한번 발광을 마음대로 해봐라 쉽게 말하면 지랄을 떨어보라고 무대를 만들어 놓은 거지요.
이게 바로 사춘기의 특징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사춘기적 특징, 내 인생을 독립적으로 내가 소원하고 내가 계획한다는 것은 다 지랄입니다. 아무리 듣기 싫어도 할 수 없어요. 이게 사실인걸요...
여러분, 우리 마음에 왜 질풍노도 시기에 있는 사춘기 학생들의 반항심이 있스니까? 왜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까?
내가 독립적으로 내 기준을 갖고 내가 소원을 그 소원이 큰 소원이든 큰 그림의 꿈이건 비전이건 작은 소원이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작은 소원 이런 거지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아주 소소한 소원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매일매일의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예를 들어 은퇴하고 나서 나이가 먹어가면서 맛있는 거 먹는 것 밖에는 낙이 없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그러는데 좀 맛깔스럽게 해주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짜증이 나는 거지요.
여러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제가 미군부대 얘기를 자꾸하게 되는데 미군부대에서 후반부에는 부관중대의 트레이닝 룸에 있었고 전반부에는 비행대대의 헬리콥터 정비병으로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었으면 아마 칼기에 취직했을지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랑 같이 헬기를 정비하는 팀으로 팀원 중에 푸에로토리코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에스파니아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죠. 라틴 계통입니다. 그 친구는 얼굴이 하얗고 머리도 곱슬곱슬 한데 잘 생겼어요. 그런데 아주 다혈질입니다. 그리고 손이 굉장히 크고 손가락도 굵어요. 그래서 헬리콥터 안으로 손을 몇 번 구겨넣어야 작업이 가능한 그런 장소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작은 손은 아니라도 제가 그럴 때가 있어요. 하물며 그 친구가 그런 일을 하게 될 때에 손가락이 크니까 작은 나사도 집어지지가 않고 펜치나 드라이버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는 작업이 쉽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작업을 하다가 잘 안 되면 펜치로 헬리콥터를 박아버립니다. 이게 바로 발광이고 지랄 아닙니까?
우리가 똑같은 거예요. 내 마음에 품은 알대로 안 된다고 불평불만이 나오는 거든요.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 못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형편을 듣지 못하고 계시고 알지 못하고 계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영적 사춘기적 반항심으로 그것을 다 버리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행동이 8절까지 나타나는 대로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손가락이 죄악이 가득하고 공의와 정직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사의 알을 품고 살아가고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 얘기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말할 것도 없구요.
그래서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과열된 발광의 상태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히기 전까지는 해결될 길이 없어요. 율법을 주시기도 하고 다른 종교처럼 연마하고 수련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 속에서 사춘기적인 발광 이것은 타락한 이후에 기본적으로 우리 존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쳐지질 않아요.
따라서 모든 불행이 영적 사춘기적 특징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어떻게 나타난다구요? 내가 소원을 갖는 거예요.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큰 소원이 아니더라도 작은 가랑비 같은 소원들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우리 그렇게 말하잖아요. “내가 뭐 큰 걸 바래? 그저 빚만 없었으면 좋겠어.”
여러분, 19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하십니다.
죄과란 영적 사춘기를 벗어나는 겁니다. 지랄을 중단하는 겁니다.
어떻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불평불만으로부터 아니면 이루고 싶은 소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서 내려 왔다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다시 발광을 떨게 되고 지랄을 떨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에게 저항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 소원과 내 판단기준을 가지고 끝없이 마음의 불평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모든 행동이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여러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 살고 계시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물자가 적어서 주시지 않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세요.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뭐 부족한 게 있었습니까? 사춘기를 겪으면서 아이들 겉모양이 이상하게 변하잖아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깻잎모양의 머리에다 윗도리는 터져나갈듯 누구 꼭 옷이 없어서 주워 입을 것처럼 입고 다니고 치마는 엉덩이가 얼어붙을 정도로 짧게 입고 다니고 다 그러지 않습니까?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다보니까 아이들이 다 이상하게 변해요.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사세요. 그러면 우리의 열정과 우리의 살아있다는 이 에너지는 다 죽여야 됩니까?
에너지를 누가 죽이래요? 우리들 스스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해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소원을 갖는 마음의 태도를 죽이라는 거지 에너지를 왜 죽여요.
그 에너지를 어디가 발산합니까? 하나님께로 뿜어대는 거예요. 하나님은 찌질이 부모님이 아니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뿜어대며 어떤 소원을 갖느냐? 내가 하나님 한 분으로 이 세상 어떤 조건에서도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지 라는 소망을 갖자는 겁니다.
비전을 가지려면 하나님 한 분으로 완전히 해해호호 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을 비전으로 갖자는 겁니다. 모든 마음의 에너지를 거기다 투자를 하자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진행되어지는 삶은 사업을 하시던 선생을 하시던 장사를 하시던 무엇을 하시던 주시는 대로 받으세요. 사춘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처럼...
사춘기 이전의 학생들처럼 부모님들이 주시는 대로 받는 거예요. 가난한 부모 밑에 살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고 부자 부모 밑에 살면 부자로 사는 겁니다. 어떡하겠어요.
저도 자라는 과정 중에 그때는 명품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마는 나이키 신발 한번 못 사 신었어요. 저한테 최고의 신발은 월드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프로스펙스 같은 것은 못 사 신었어요. 월드컵이 어디 있어요. 시장에서 가면 거리에서 쌓아놓고 파는 운동화 그런 거 신고 다녔어요. 어떻게 해요. 그런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는데...
여러분 부모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세요. 김두식 교수의 딸이 찌질이 부모라고 했던 그런 찌질이 부모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여러분을 못 살게 하는 게 아니에요.
따라서 하나님 믿으시고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무조건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사세요. 하나님이 때로는 이렇게 주실 수도 있어요. 무려 250년 동안을 땅 속 동굴 카타콤에서 살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때 그들의 꿈과 비전은 지하 동굴에서 내 손자를 낳고 증손자를 낳더라도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지하 밑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림이 되게 해주세요 이게 꿈이고 비전이고 이게 열정을 투자해서 기도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지금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고 가족 간에 일이 안 좋아지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그걸 해결 못하시는 게 아닙니다.
지금 원하시는 것은 지금 너 자신의 사춘기적 특징을 벗어나라는 겁니다. 죄과에서 떠나 오라는 겁니다.
죄과가 뭡니까?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소원을 갖는 것부터가 죄라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문제가 급박하지만 이 문제의 귀결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에 맡기고 이제 내 마음의 소원은 그 문제의 해결이고 그 문제에 대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지금 이 상항에서도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그렇게 실감되어져서 내가 천국을 마음으로 소유할 수 있는 이것을 비전으로 삼겠습니다. 이걸 꿈으로 갖겠습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찾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 붙잡고 내가 죽겠습니다.”
이 기도가 기독교인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사춘기 이전에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주어지는 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부모가 주는 것을 거절합니다. 내가 소원을 갖습니다.
이것을 나에게 그대로 옮겨오세요. 아직도 내 마음에 소원이 있으면 이렇게 얘기하세요. “하나님, 저는 지금 아버지의 손길에서 떨어지는 은혜를 거부하고 내가 지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 단어가 딱 맞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충분합니다.
한번 내 마음의 소원 꾸 비전을 십자가에 죽여 보세요.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은 부흥을 꿈으로 갖지 마시고 선교조차도 꿈으로 갖지 마세요.
하나님으로 나 한 사람이 온전히 행복해지는 것을 꿈으로 가지세요.
그러면 나의 인생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가 품는 독사의 알 내가 짓는 거미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교회 부흥도 있을 수 있고 선교도 있을 수 있고 또 사장님 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대통령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또 아니면 평범하게 농사짓고 살 수도 있는데 그러나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한 사람이 됐는데도 자꾸 그래도 대통령 쪽으로 되는 것이 좋은데 이러지 마세요. 대통령 되는 게 눈꼽만큼도 안 부러울 만큼 하나님으로 행복할 수 있다 라고 믿고 이걸 소망해나가면서 기도해나갑시다!
저나 여러분이나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매일 같이 번제를 드리는 거지요.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는 사춘기적 지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랄의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사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어서도 영원토록 지옥에서 무한대로 지랄을 하며 살게 될 것이에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거북한 단어입니다마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그렇게 거북한 것이 사실입니다. 과열된 양상을 띠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의 열정과 마음과 에너지를 오로지 드려야 할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한 채 이 세상 나의 소원을 이루려하다 보니까 우리의 마음도 발광이고 우리의 행동도 과열된 상태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갑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냉각기를 겪게 하시고 주어지는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락의 삶을 허락하여 주시며 하나님의 뜻만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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