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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25:1-28) 사과가 아니면 얼굴에 맞는다.
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4.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5.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8.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12.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사과가 아니면 얼굴에 맞는다.>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사과가 아니면 얼굴에 맞는다.’
벌써 짐작이 가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빌헬름 텔(Wilhelm Tell)의 이야기입니다.
스위스를 오스트리아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국가로 발돋움 하게 한 도화선이 된 사건, 어떤 사람은 단순히 전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역사적인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독일의 극작가 쉴러가 5막으로 된 빌헬름 텔이라는 희곡을 발표하면서 아주 유명해진 이야기 아닙니까?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을 때 게르손이라고 하는 스위스를 지배할 지배자가 행정가가 파견이 됩니다. 아주 혹독한 압정을 시작합니다. 심지어 어떤 일 까지 일어나는가 하면 보리수나무가 서 있는데 그 앞에 자기의 군사들이 쓰는 창을 꽂아놓고 자기 모자를 걸어둔 뒤에 그 옆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모자를 보고 절을 하도록 법을 정합니다.
그런데 빌헬름 텔이 그만 이 규정을 어기게 되고 모자를 향하여 절을 하지 않게 되자 붙잡혀서 이제 게르손이라고 하는 이 공작이 제안을 하게 됩니다. ‘네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올려놓고 맞추어라. 그러면 내가 용서하리라.’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제안을 빌헬름 텔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아들의 머리위에 있는 사과를 정확하게 명중시킵니다. 됐지요. 이제. 그런데 빌헬름 텔이 혹시 아들의 머리위에 있는 사과를 맞추는 것을 실패할 경우에 게르손이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행정가를 쏘려고 화살을 준비해 왔는데 그것이 그만 발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붙잡혀 가게 되고 붙잡혀 가는데 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중에 태풍을 만나서 그 와중에 도망 나오고, 결국은 게르손을 죽이고 스위스의 독립을 위한 스위스 국민들의 의지에 불을 붙여서, 스위스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과가 아니면 얼굴에 맞는다.’라는 이 제목이 그렇지 않겠어요? 사과를 맞추려고 하다보면 사과에서 가장 가까운 신체부분이 얼굴이니까 물론 사과도 안 맞고 얼굴도 안 맞고 옆으로 비껴나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활의 명수라면 그렇게 큰 오차가 없다고 생각할 때 사과를 향해서 쐈을 경우에, 아들의 이마나 아들의 얼굴에 화살이 맞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을 한 번 보는데 특별히 11절 말씀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라고 합니다.
은으로 쟁반을 만들었습니다. 아로새겨져 있는 무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은 쟁반에 금 사과가 담겨 있습니다. 아! 얼마나 탐스럽겠습니까? 아름다운 은쟁반 위에 금 사과, 이게 바로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경우에 적중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빌헬름 텔이 화살을 쏴서 아들 바텔의 머리위에 있는 사과에 적중한 것처럼, 그 화살이 적중하는 것을 말해요. 합당하다.
지금 내가 자식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면 이 경우에 아주 합당한 생각과 판단을 얻게 됩니다. 진짜 아로새긴 은 쟁반 위에 금 사과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명절을 쇠는 문제 때문에 큰 동서가 아프고 어쩌고 어째서 얽히고 얽혔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를 때에 자식 놈이 ‘엄마! 아주 고급 레스토랑으로 가족들을 초청해봐요.’라고 하면 집에서 모실 수도 없었는데 아들이야기가 딱 맞습니다. 그럴 때 박수를 치면서 무릎을 탁- 치면서 ‘맞다, 맞아.’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게 바로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삶에 당하는 경우들마다 이렇게 아로새긴 은 쟁반위에 담겨 있는 금 사과 같이 아름답고 탐스럽고, 기가 막히게 적중하는 해답들을 얻어서 진행된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돈을 원하지 않겠습니다. 명예를 원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주어지는 경우마다 이렇게 적중하는 합당한 말, 합당한 생각, 합당한 판단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든지 아니면 떠오르든지 누가 주든지 하기만 한다면, 가장 합당한 대답을 얻기만 한다면 그것을 차라리 원하겠어요. 얼마나 인생이 아로새긴 은 쟁반위에 금 사과들로만 이어져 나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경우는 빌헬름 텔의 아들, 바텔이 지금 아버지의 화살이 날아올 것을 기다리면서 머리에 사과를 이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데 무슨 말씀입니까?
경우에 합당한 생각과 판단과 말이 떠오르든지 주어지든지 하면, 그 아들의 머리위에 사과를 적중해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내 말과 내 판단과 내 생각들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잘 맞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할 경우에, 아들의 얼굴에 화살이 꽂히는 적중하지 않는 화살처럼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가 망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들을 사랑한다면 아들의 문제 때문에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습니까? 그 경우가 어떤 경우이냐? 아들 머리위에 사과가 얹혀있고 어린 아들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내게 있다는 것은 아들의 머리위에 사과를 향하여 활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합당하면 아들을 살리는 것이고, 그 경우에 합당하지 않아서 사과에 맞는 대신에 아래로 움직여버리면 아들의 인생의 얼굴에 화살을 꽂는 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자, 조기유학을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의 문제에 합당한 결정입니까? 어떠세요. 그것이 자녀 머리위에 있는 사과를 적중한 여러분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여러분 자녀의 몸을 상하게 하는 그런 생각과 판단이겠습니까?
사업상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사업이라고 하는 바텔 위에 사과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그 문제 그 경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끌어 가려고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화살을 쏴 대는 겁니다. 만약에 적중하고 합당한 생각이라면 사과를 적중하는 것이요. 그래서 아로새긴 은 쟁반위에 금 사과 같을 것이지만,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면 여러분의 사업의 얼굴에 화살을 여러분 스스로가 꽂는 게 돼 버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업을 위한다. 자식을 위한다. 아내를 위한다. 남편을 위한다. 부모를 위한다. 나라를 위한다. 대통령의 경우 나라를 위한 판단이 잘못 될 경우에 나라의 얼굴에 화살을 꽂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면 안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라고 하는데 말조심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8절에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쩔 줄을 알지 못하리라.”라고 합니다.
'나가서 다툴 때.' 다툴 때 어떻게 다퉈요? 뛰어나가서 다툽니다. 급하게. 내 판단이 옳다고 확신할 때. 내 판단이 옳다고 확신 할 때에 우린 급하게 뛰어나가서 분노하고 다투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내 얼굴에 화살을 꽂는 일이 돼 버린다는 것이에요. 무서운 일이죠. 그러므로 어떤 케이스가 주어졌을 때 그 케이스, 그 경우에 대해서 적중하는 생각과 판단과 말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오늘 2절에 답이 나와 있어요.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이 어디에 있느냐? 이 땅의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을 이끌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영광스러우시냐? 우리 인생에 주어진 문제들에 대한 답을, 합당한 답을 숨기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잘나심이 있는 것이에요. 꼭 비꼬는 단어 같은데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훌륭하심과 영광스러움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렇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데, 우리 아들아이가 이끌어 가듯이 일거수일투족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도대체 나를 인도하시는데 지금 이 경우를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내가 응답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무슨 뜻으로 이해도 할 수 없는 이런 경우를 나의 현실 속에 집어넣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죠.
여섯 살짜리 일곱 살짜리 열 살짜리가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인도하신다. 이건이래서 인도하시는구나. 저건 저래서 인도하시는구나. 아 왜 이렇게 나에게 돈을 많이 주시나 했더니 그래서 그렇구나. 왜 이렇게 돈을 안주시나 했더니 이래서 이렇구나. 빤히 들여다보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보다 앞서가지요. 그럼 하나님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은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살아서 일거수일투족 지켜보시며 인도하시는데, 그 인도하심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 이유와 뜻을.
그런데 알 수 없는 채로 내버려 두냐? 그게 아닙니다. 빌헬름 텔이 되어서 주어지는 모든 바텔이라고 하는 내 인생의 경우마다 합당한 화살을 쏘려면 찾아내야 돼요. 오직 합당한 말과 합당한 생각과 판단은 모든 인생에 주어지는 케이스에 합당한 대답은 하나님에게만 있는데 하나님은 숨기셨습니다. 숨기셨으나 안 가르쳐주려고 숨기신 게 아니라 길이 있어요. 그 합당한 대답을 찾아내는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왕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이 왕이 될 때에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지금 내게 당한 경우에 합당한 대답을 찾아 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영화는 숨기는 것인데, 일을 숨기는 것인데 이를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일을 숨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을 숨기시지 않았습니까? 그 숨기신 일을 살펴보는 것은 비밀리에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라고 표현이 되어있어요.
그러면 '살핀다'는 것은 하나님이 숨기신 일에 맞는 대답을 얻어내야 하는데, 누가합니까? 왕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형편없이 작은 사람의 인생의 일조차도 숨겨놓으시고는, 그 숨겨놓으신 일에 대한 합당한 대답을 허락하시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작고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왕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서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아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이 뭡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나 다 천지를 움직이시는 그 위대하고 거대하시고 굉장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왕 같은 제사장이다. 왕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언제나 잠언에 나오는 왕의 이야기는 꼭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솔로몬 왕이 20세 청년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해서 처음으로 한 일이 뭐예요?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산당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그 지혜가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지혜라는 말의 뜻이 듣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 듣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왕이에요. 누구에게 듣는 마음? 하나님에게 듣는 마음. 하나님께 듣는 자는 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오해를 받아요. 고집불통이라고.
그러나 고집불통이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해서 내 생각이 옳다고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들은 대로 움직일 때에, 이 땅의 그 어떠한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왕이지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나님을 만난 제사장입니다. 만난 하나님에게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로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왕이지요. 왕 말고 누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왕입니다. 왕은 이 땅의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선택적으로 자기가 자원해서 신하의 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시저처럼 클레오파트라의 얘기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선택사항이고 내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듣는 것이지 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바로 왕이에요.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1:1로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말고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과 같아요.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옆집 아저씨 말도 듣고 이웃집 아저씨 말도 듣고 아무 말이나 다 듣습니다. 남편의 말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많이 듣습니다.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과 1:1로 관계를 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주시더라도 그대로 해 나가야만 한다는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왕이에요.
그래서 함부로 하나님과 1:1로 관계 맺기 쉽지 않아요. 함부로 맺지 마세요.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 아닙니까? 제자들도 이해 못하고 부모도 이해 못하고 아무도 이해 못하는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들은 대로 살아가야 되니까. 이게 바로 왕이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통해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어요.
그래서 여러분! 이 경우를 빌헬름 텔에게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빌헬름 텔은 눈을 뜨고 화살을 쐈습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경우에 대해 합당한 화살을 찾아내기 위해서, 합당하게 사과를 맞추기 위해서 왕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금 내게 주어진 경우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경우 자체에 눈을 감아 버리는 겁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위해서 내 속에서 어떤 떠오르는 생각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경우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는 거예요. 마치 주몽이 눈을 가리고 화살을 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눈을 가리고 쏴야 됩니다. 그래야 적중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 나옵니다.
아이고, 아들의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그 아들아이의 문제를 보지 않고 아들아이의 문제에 합당한 말을 찾아낸다. 분석하고 아들의 상황을 연구하고 전문가를 찾아가서 의뢰하고 하지 않은 채로, 그 아들의 대한 문제의 답을 찾아낸다? 무섭습니다. 아들 어디에 화살이 꽂힐지 모르니까, 그러나 그래야만 왕이 되고 왕이 되어야만 하나님은 답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직도 전문가에게 귀를 기울이고, 누구에게 귀를 기울이고 어쩌고 하는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서는, 내게 주어진 경우에 대해서 하나님이 합당한 대답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숨겨놓으신 비밀은 언제나 내가 왕이 될 때 하나님께서 열어 주십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솔로몬이 20세에 왕으로 등극해서, 하나님께만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만 듣기 원했던 그 때처럼, 그게 바로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오늘도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신하들을 통해서 재정비 시켰던 바로 그 구절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경우를 볼까요?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옵니다. 자, 바텔 위에 나라의 상황이 얹혀 있습니다. 이때 판단합니다. ‘내가 찾아가서 화친을 청해야 되겠구나.’라고 해서 찾아가서 화친을 청하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은 삼백달란트 금 삼십 달란트을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라는 게 엄청난 양이에요. 그래서 왕궁과 성전에 있는 모든 은을 다 주고 금은 긁어모을 데가 없어서 성전과 왕궁기둥에 입혔던 도금했던 것까지 긁어서 조공을 바칩니다.
판단했어요. 나라위에 얹힌 사과를 향해 화살을 쐈어요.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조공을 바쳤지만 산헤립이 화친한 상태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시 침공을 하게 됩니다. 나라의 얼굴에 히스기야 왕의 판단이 쏜 화살이 나라의 얼굴에 적중한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서만 이런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쳐들어 왔을 때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합니까? 모든 문무백관을 다 물리치고 왕궁을 나와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성막에서 기도를 합니다. 산헤립이 보낸 펀지를 펼쳐놓고 기도를 합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듣기를 원합니다. 이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저들을 멸절시키겠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185,000명이 다 멸절을 해버렸습니다. 바로 이거예요. 바로 이겁니다.
그럼 어떻게 사람들하고 대화도 하지 않고 사느냐?
예를 들면 부장을 섬기는 과장이면 부장님을 섬기는 상태자체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장님을 섬기는 것도 부장님의 말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세요. 요셉이 그랬고요.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을 다니엘이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느브갓네살 왕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 대로 섬깁니다.
결국은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의 말대로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대항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대항하는 겁니다.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면 건져 주십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더 추앙하게 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갔어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집 자체를, 보디발이라는 주인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셉이 손을 대는 일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다 형통했다고 말을 합니다.
누구를 섬깁니다. 아랫사람입니다. 가능합니다. 누구의 아내입니다. 누구의 남편입니다. 누구의 자식입니다.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 어린아이와 대화를 할 때도 그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실 수도 있습니다. 아내를 통해서 알려 주실 수도 있어요.
여러분! 아내에게 의존되어서 아내에게 묻는 것과 아내와 대화하는 중에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 까요? 무조건 일만 벌어지면 아내에게 와서 대답을 구하는 그런 공처가들 그것은 아내를 믿는 거예요. 아내에게 의존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아내와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아내에게 의존되지 않고 아내에 대한 관계조차도 하나님께 묻고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라면 대화하는 가운데 아내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대답이 들려올 수 있고, 이웃집 아저씨로부터 들려올 수 있고, 이웃집 아주머니로부터 들려올 수 있고 사장님으로부터 들려 올 수 있어요. 사장에게 굴속하지 않고 사장을 섬기는 일 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하는 겁니다. 대화를 하세요. 그러나 대화자를 의존하지 마세요. 대화자에게 빠지지 마세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경우에 그 대화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대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확신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이에요. 여러분만 아시지요.
자, 오늘도 우리가 말해야 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되고 판단해야 할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와 같이 아름다운 합당한 말들을 화살처럼 쏘면서 바텔의 머리위의 사과를 적중시키는 말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얼굴에 맞을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과 내가 판단한 것과 내가 한 말 때문에 내게 주어진 경우와 이웃에 주어진 경우와 가족에 주어진 경우가 더욱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왕 같은 자들이 돼야 합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이 세상,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그래야 그들도 같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텔이 사과를 머리위에 두고 있을 때 믿는 사람들이 그 사과를 적중시키는 화살을, 생각과 판단과 말의 화살을 쏘려면 지금 그 아들이 사과를 얹고 있고 내 사랑하는 기업이 사과를 얹고 있고 내 사랑하는 가정이 사과를 얹고 있는 그 경우, 눈으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하나님께만 듣고 쏘는 겁니다. 그럴 때 백발백중 적중할 수 있는 것이에요.
‘사과가 아니면 얼굴에 맞게 됩니다.’ 사과에 맞추려면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세상 모든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기 전에 다 끊고 하나님께만 듣겠다는 결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정답이 들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쏘시면 적중하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하루 살아 나갈 때 수도 없이 많은 생각과 판단의 요청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이 세상 내 속에 있는 경험과 지식에 대해 죽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죽어 왕 같은 위치에 서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하나님의 그 들은 말씀대로 이 세상을 향하여 경우에 맞는 화살을 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