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는 나와 깨달을 대상, 둘이 아니다
<18>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②-3
[본문] 내가 근래에 강서(江西)에 갔었는데 여거인(呂居仁)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여거인이 마음을 이 참선공부하는 인연에 머무른 지가 매우 오래 되었는데 역시 이 병이 깊이 들었습디다. 그가 어찌 총명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내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공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니 능히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공입니까? 공이 아닙니까? 시험 삼아 한 번 말해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우두커니 생각을 하더니 계교로서 대답하려고 하기에 당시에 내가 곧바로 ‘할’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망연해서 근원(巴鼻)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두 깨달아 증득하려는 마음이 앞에 놓여 있어서 스스로 장난을 짓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은 아닙니다.
[강설] 강서 땅에 사는 여거인이라는 사람은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불교공부는 많이 하였으나 “역역성성(歷歷惺惺)”하고 “공적영지(空寂靈知)”한 자리를 알지 못하여 그것은 공에 떨어진 경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혜 선사는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공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니 능히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공입니까? 공이 아닙니까? 시험 삼아 한 번 말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문제는 무아(無我)를 주장하여 몸도 마음도 철저하게 없는 것으로만 아는 현대의 소승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나도 또한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공인가?” “그것도 무아인가?” “무아를 주장하는 사람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묻고 싶다. “진공묘유(眞空妙有)”니 “공적영지(空寂靈知)”니 하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중도적 견해를 전혀 아는 바가 없이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다. 대혜 선사는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고 “일할(一喝)”을 하여 존재의 본래면목을 역역하게 보여줬으나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지적한 점은 “깨달아 증득하려는 마음이 앞에 놓여 있어서 스스로 장난이 된다”라는 점이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여 그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물론 깨달아야 하지만 깨닫는 나와 깨달을 대상은 둘이 아니다.
이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나눠놓고 깨달으려하니 남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 또한 불교공부를 깊이 있게 하려는 사람들의 큰 문제점이다. 깨달으려는 마음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깨닫지 못한다. 말에 모순이 많지만 이렇게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언어로 이해하지 말고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둘로 나누어 깨달으려 하면
南으로 가면서 北 향하는 꼴
[본문] 공은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서 날이 가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성을 쌓는 돌처럼, 맷돌이 서로 맞듯 척척 맞을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가지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지금부터 참구하여 미륵부처님이 태어날 때까지 참구하더라도 또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며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갈수록 미혹하여 답답함만 더할 뿐입니다.
[강설] “만약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가고 달이 깊으면 저절로 성취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경지” “성성하고 역역한 경지” “한 덩어리의 불과 같은 경지”이다. 참선자가 화두를 들고 이와 같이만 공부가 된다면 선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은 1주일이면 성공할 것이다.
길어야 한 철이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쉬기를 기다린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여 미륵 부처님이 태어날 때까지 참선한다하더라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미륵 부처님은 56억7000만년 뒤에 이 땅에 오시는 부처님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현대인들과 같이 마음속에 무수한 지식과 온갖 정보를 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단 10분도 화두일념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은 일념의 경지”는 오로지 전설일 뿐이다. 다만 그와 같은 경지를 꿈꾸며 선원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으로서 귀하게 생각하고 만족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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