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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의 [출근길의 주문]
-너굴희
부제가 '(여성을 위한) 일터에서 필요한 말, 글, 네크워킹'이다.
게다가 여성들은 사교 대상을 굉장히 폭 좁게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좋아하거나' 아니면 '필요가 있거나'인 사람하고만 만나려고 한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면 아예 어울리지 않으려는 경우도 많고, 자기가 겪은 일이 아니어도 누가 뭐라고 했던 기억이 있으면 '어쩐지 쎄하다'며 거리를 두려고 한다. 아니면 내 일과 직접 관련이 있으면 그나마 어울리는데, 그것도 최소한으로 하려 든다. 인맥으로 일을 주거나 받지 않으려고 하고, 그것은 남성연대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기도 하다. 또는, 돈이나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기도 하다. 굳이 애매한 사람하고 사교를 위해 어울릴 돈이 부족하거나(여성은 남성보다 적은 급여를 받는 게 현실이라), 그렇게까지 일을 오래 할 생각이 없거나(애초에 직장을 짧게 다닐 계획인 사람들도 분명 적지 않더라), 시간이 부족하다(혼자 살아도 가족이 있어도 언제나 여성들은 집안일이라는 '퇴근후 노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이 먹어서까지 뛰어난 능력으로 일을 지속하는 여성 다수는 '독고다이'다. 남 도움 안 받고 본인 능력으로 꾸준하게 일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또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느슨하게 아는 여자들이 줄어든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라는 카테고리는 사라지고 알던 사람은 사라진다. 마흔을 넘기니, 소수의 생존자들이 보일 뿐이다.
왜 다른 젊은 여자를 돕지 않는가? 그 여성이 어렵게 버티던 가장 힘든 순간에 다른 여성이 도와준 경우가 전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48-149쪽
비혼 여성으로 나이들겠단 생각을 한 뒤로,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 동년배의 여성보다 스스로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과 비용이 많은 만큼, '내 몸을 공공재로 써보자'란 생각을 한다. 내 시간과 정신력을 쏟는 일이 주변인들의 삶을 증진하는 데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여기서의 포인트는 '희생'이 아니란 건데. 난 이런 기여를 즐거워 한다. 재미있다. 나름의 자아실현 방식이랄까유.).
여튼. 여성들이여, "계속해 주세요. 시야 안에 머물러 주세요."
+) 경기 남부권에 살고 있는 (육아중인) 물꼬방 여성 동료들과 한 달에 한 번 카카오톡으로 독서토론을 하고 있다. 모임 이름은 '행궁 독서단'. 깊이 있는 대화, 지적으로 날 선 대화에 목마른 사람들이(절친 J가 한창 휴직을 하고 육아를 할 때 "책을 읽고 싶어 울었다"고 말한 것이 몇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다.) '오프라인으로 안 되면 온라인으로!'라고 선언하고선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 밤 카톡 토론을 한다(자랑스럽게도,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끼루룩.)
그런데 이게 정말, 상상 이상으로 좋다. 문자로 남아 있는 내용을 확인하며 오가는 논의라 말로 하는 대화보다 훨씬 알맹이 있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희망 대신 욕망(김원영)》을 읽은 상황. 이번달엔 나의사랑 너의사랑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을 다룬다. 두근두근, 또 얼마나 좋을 것인가.
연대하는 여성, 밀도있는 대화를 하는 여성, 욕망하는 여성의 집단을 만들자.
우리의 능력과 매력을 마구 뽐내자(일단은 스스로 '확인하는' 게 먼저일테고.).
처음 일을 배우던 때는 선배들의 스탠더드를 따라잡는 일을 목표로 하며 살았다. 나도 사람들이 필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지금은 후배들의 스탠더드를 배우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나보다 젊은 여성들의 말을 더 들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의 전환은 #MeToo 운동이 촉발했다. 이전의 관행으로 세상을 정체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 땐 이러저러하지 않았다는 말은 또래 친구들끼리 추억을 팔며 시간을 보낼 때는 할 수 있지만, 세상을 향해 말할 때는 내가 변하지 않는 데 대한 비겁한 변명이 될 뿐이다. 이런 나를 위해, 그리고 많은 여성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은 하나다.
계속해주세요. 거기에 길을 만들어주세요. 시야 안에 머물러주세요.
계속해주세요. (10-11쪽)
여성이 분명하게 의사표현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를 나는,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충분히 암시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요청들'을 쌓지 않기를 바란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우리는 통하니까, 저 사람은 똑똑하니까, 내가 선의로 대하면 나를 선의로 대해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막무가내로 베풀고 실망하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가도, 말과 글을 분명히 하다 보면 어슴푸레 마음속에 있던 것이 또렷해진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여성인 나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내 말을 들리게 만들자. 의심은 집어치우고. (17-18쪽)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역시 너무 '또렷하게' 쓰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쿠션어를 썼을 때 그 속뜻을 짚어 이해하는 일을 나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날이 춥다"고 말하면 알아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라고 응답하지 않는다. 대신 "아, 날이 춥군요"라고 응수한다. 따뜻한 음료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나이 어린 여자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손으로 차를 마실 의지는 없다고요? 그러면 갈증을 참아보면 어떨까요?
직접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을 우아한다고들 한다. 경험해본 바, 그것은 가진 사람들의 화법이다. 상대가 내 뜻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속뜻을 헤아려준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21쪽)
쿠션어, 여자어를 쓰지 않는 노력을 하는 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른 여성(특히 당신보다 나중에 태어난 여성)이 쿠션어, 여자어를 쓰지 않을 때 거북해하기를 그만두기다. 동석한 남자를 대신해서 나이 든 여자들이 화내주지 마라. 더 '모범적'으로 우아하게 말해 버리기를 그만두자. 남자가 말했다면 '당차다'고 박수쳤을 말을 여자가 했다고 "당돌하다"며 고개 도리도리 하기를 그만두자. 분위기를 읽고 여자 욕을 (남자 대신) 여자가 해버리는 일. 내가 아는 최악의 여성어. (25쪽)
어쩌다 질문을 해도, 말끝을 얼버무리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말을 얼버무린다. 문제는 그 '확신'을 상대의 반응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데 있다. [중략] 문장의 중간부터는 말소리가 작아지다가, 약간 웃으면서 말을 흐린다. 이것은 나 자신의 과거 경험이기도 하다. 분위기를 봐서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때 혀를 빼꼼 내밀거나 헤헤 웃어버리기. 일할 때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을 듣고는 노력해서 고쳤다.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라서 그랬지만, 내용이 좋아도 그 내용이 잘 전달되기 어려운 태도, 혹은 말버릇이다. 이런 태도를 보이면 상대는 내가 일에 진지하지 않거나 심하게는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한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어넘기려는 태도는 불쾌감을 유발한다. (28쪽)
일과 관련해 사람을 비판하고 싶을 땐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라. 말투가 어떻고 하는 말은 제발 그만두자. 동석한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화법을 쓴다면 "그래서 일은 어떤데요?"라고 물어라. (35쪽)
여자들이 웃으면 웃는다고, 조용하면 조용하다고 뭐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들이 해서 가장 반응이 좋은 행동은 무엇이냐면, '남자에게 호응하기'다. 언젠가 일본의 오락프로에서 배우 스기모토 아야가 '남자에게 사랑받는 법'을 말하며 "무조건 칭찬해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칭찬받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해"라고. 남자를 칭찬하는 역할, 남자가 하는 말에 웃는 역할, 남자의 말에 공감하는 역할. 여자들, 특히 젊은 여자들이 맡으면 언제나 환영받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전략을 취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 '자매애'라는 게 있다면, 그런 말이 오가는 순간 공격받는 여성을 향해 "같은 여자가 봐도" 어쩌고 하면서 비난에 동참하지 않는 정도는 요구하고 싶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라는 생각보다는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 널리 퍼지면 좋겠다.
혼자 이런 싸움을 계속하기는 어렵다. 내가 항의할 때, 불만을 표현할 때 누군가 함께하면 그 다음에는 또 한 명이 거기에 동참한다. 남이 좋게 만든 세상에 나는 숟가락만 얹으면 좋겠지만, 당신에게만 좋은 세상은 없다. (45쪽)
어쨌거나,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면서 상대에게 내 이야기를 들리게 하는 경험 자체가 여성의 성장기에 존재하지 않는 영역인 경우가 많이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듣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습관이 되지 않아, 사석에서 말하는 습관을 공석으로 그대로 끌고 들어와 버리는 모습을 볼 때가 적지 않다. 상대가 말을 끊을 때 "잠깐만요" 혹은 "제가 먼저 얘기하고 있잖아요" 혹은 "제가 마저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당신이 젊은 여성이고 상대가 노회한 남성이라면 그 말은 높은 확률로 "어휴, 무서워서 어디 말하겠나. 마저 말해봐요" 같은 반응 혹은 짜증 섞인 분노를 되받게 된다. 그런 맞서는 경험을 쌓지 않으면, 내 말을 들어주는 사석에서만 신나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 처음부터 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는, 말의 속도를 늦추고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주고받고 해야 대화에 진전이라는 게 생긴다. (61-62쪽)
피드백은 업무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의 가장 중요하고 애정 어린 스킨십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82쪽)
자, 그래서 피드백은 어떻게 하는가. 긍정적인 피드백도 부정적인 피드백도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와, 정말 좋았어." "엇, 정말 좋다." 오, 정말 좋은데." 이 세 가지로 모든 피드백을 대신한다면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쓸데없고 그런 말을 남용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피드백의 언어는 내가 가르치기가 불가능한데, 그것은 바로 '구체성' 때문이다. (84쪽)
확실한 것은 거의 항상 긍정적 피드백이 부정적 피드백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독려하는 편이 부족한 것을 개선하라는 요구보다 언제나 잘 먹힌다. 늘 실적이 좋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부정적인 말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런 경우를 본 적은 거의 없다. 내가 글쓰기 강의를 할 때 피드백을 하는 과정에서 노력하는 것은, '반드시 고쳐야 할 실수'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면 좋은 점을 강조해 말할 수 있도록 글쓴이의 글을 꼼꼼이 검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일정 수준의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정적 피드백을 반복하면 어떤 상황이 되느냐? 실수를 하지 않는 보통의 퍼포먼스가 나온다. 어떤 일이든 아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단점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잘하는 부분을 아주 잘 해낸다. 피드백을 받는 입장에서도, 잘했을 때 확실히 잘했다는 말을 듣는 게 도움이 된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을 더 잘하고 싶었을 때, 말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었을 때, 전부 긍정적 피드백이 큰 힘이 되었다. 게다가 긍정적 피드백을 적절하게 주는 사람이 부정적 피드백을 줄 때 불쾌감을 억누르고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85-86쪽)
여성의 친절하고 예의 바른 일처리를 '사근사근'으로 쉽게 생각해버리지 말자. (때로 과할 정도의) 배려와 친절의 제스처는 여성만의 전략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윗사람이 되어가는 분들께 하고 싶은 말. 다음 세대가 사근사근하지 않다고 해서 그 행동을 '교정'하려 하지 말자. 여성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언제나' 친절하기를 요구받는다. 젊은 여자 직원을 미팅에 동석시켜서 '분위기 좋게 해보라'(대체 무슨 요구인지? 경험상 시시콜콜한 세상 이야기를 철없이 늘어놓아 사람들이 '요즘 젊은이들은'으로 시작하는 말을 유도하는 역할이거나 '아우 젊고 아리따운 여성분이 계셨구만' 하는 말이나 들으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111-112쪽)
#MeToo 공론화는 한국 사회 남성들에게 날벼락 같은 일로 받아들여진 듯한데, 일부 여성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본인의 동료나 친한 상사가 #MeToo 고발 대상이 되었을 때, "그럴 사람이 아니야" "예전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 "난 몰랐어" 같은 말을 그들은 자연스럽게 꺼내곤 했다. 몰랐다고 치자. 그러면 최소한 이런 상황에서는 힘을 실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여성이라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 제대로 처신했으면 겪지 않았을 일이라는, 피해자를 탓하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그런 태도로 여성 동료들을 대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조직 내 성추행 사건도 가장 늦게 알았겠지만, 나이 50에 조직 생활 하면서 "나는 몰랐어"는 자랑이 아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마찬가지다. 얼마나 눈감고 살아왔는지 조용히 돌아볼 일을 결백을 주장하느라 제 무덤 파지 말길. (117-1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