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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8, 마7:15-23,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20.9.6 박홍섭 목사
산상수훈의 결론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7:12의 말씀입니다.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말씀은 산상수훈만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성경의 요약이며 신약 성경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증거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는 이 말씀의 요구대로 살아보면 자신의 연약함과 더러움과 무능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생명과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에 끝없이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 그렇게 살고 싶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르지 않는 자신의 처절한 실체 앞에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렇게 할수록 하나님께 길들어지는 온유한 상태가 되고 이익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영혼의 갈증을 경험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왔다 갔다 하는 두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만 구하는 하나의 마음, 곧 청결한 마음이 생기고,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평화하고 싶은 화평케 하는 태도와 의를 위해서 박해를 감수하는 삶의 태도들이 인격과 성품 속에 형성됩니다.
이 모든 것이 뚝딱하면서 한꺼번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교회의 지체가 되어 한 걸음 한걸음 말씀에 순종해가는 과정에서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여정 중에 성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교과서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골방 기도를 배우게 되고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면서 어둠을 밝히는 빛과 짠맛을 내는 소금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7:14). 좁고 협착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가기 쉽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넓은 문과 길을 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생길까요? 거짓 선지자들 때문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천국의 길을 사랑 가운데 바르게 걸어가려면 이들을 삼가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영혼을 노략질하는 이리이지만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가짜 교사들이 있습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인류의 역사에 늘 이들은 존재했습니다. 구약에도,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도 이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삼가라’는 ‘주의하라, 경계하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세상이라는 무대를 믿음으로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분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는 더욱 분별이 중요합니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을 가게 하는 가르침을 분별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의 복음을 자기 긍정과 자기 영광의 짝퉁 복음으로 바꾸어서 전하는 사람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의 책임이 성도 각자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달콤한 복음, 쉬운 복음, 우리 자신을 부추기는 욕망의 복음을 좋아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서 조심하고 경계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딤후 4:3-4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어느 한 시절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바른 교훈보다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진리의 말씀에는 귀를 닫지만 허탄한 이야기에는 귀가 열리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조심하고 경계하고 분별하지 않으면 이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행20:29-31을 보실까요.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앞으로 교회 가운데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교인들을 미혹할 테니 교회를 잘 지켜 달라는 당부입니다. 심지어 너희들 중에도 어그러진 말로 자기의 추종자를 만드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니 내가 밤낮 눈물로 훈계하던 말씀에서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죠? 양의 탈을 쓴 흉악한 이리들의 미혹은 비단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서신서 곳곳에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경고와 권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베드로 사도의 두 번째 편지가 통틀어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담겨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나타나듯이 흉악한 이리로 불리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은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전 시대의 모든 교회에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분별해야 합니다. 삼가야 합니다.
예레미야 6:13-14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스라엘이 가장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고, 다 자기 욕심과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심각한 타락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적하고 회개를 가르치고 참된 신앙을 일러주어야 할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눈물로 경고하고 책망합니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예레미야죠. 누구 말을 들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말입니다. 그럼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들 자신의 책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마에 나는 흉악한 이리라고 붙이고 나옵니까? 나는 거짓으로 당신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라고 광고하고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리이지만 양의 옷을 입고 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듣기 좋고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은 어그러진 말입니다.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고 찾는 이가 없으면 생명의 길이라도 안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많다고 판단되면 멸망의 길이라도 기꺼이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참된 복음은 그렇게 듣기 좋은 말들이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당부하면서 자신이 삼 년 동안 어떻게 가르쳤다고 했습니까? 너희 각 사람에게 눈물로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에 달콤한 말씀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전하면 관계가 거북해지고 멀어질 수 있는 말씀들이 많아서 전하는 자들이 눈물로 훈계해야 하는 말씀들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지만 사람들은 바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한 묘책이나 주술처럼 전하기만 전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고 금방 변화시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은 사기꾼들이 더 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들이 수긍할 때까지 기다리고 설득하는 방식으로 역사하기에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눈물로 훈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이 볼 때는 어리석게 보이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여서 들으려 하지 않아 눈물로 전해야 하는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의 교훈입니다. 흉악한 이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단을 쇼하는 무대처럼 변질시켜 사람들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고 부추기지만 그들의 지도와 가르침은 넓은 문과 넓은 길로 가게 하는 사망의 가르침들입니다.
결정적으로 이들을 진리와 생명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16-18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누가 참 선지자이며 거짓 선지자인지, 누가 천국 백성이며 누가 가라지인지는 마지막 심판대에 가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알 수 있는데 열매를 보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이죠.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매라고 생각하고 미혹되는 것인데 22-23절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기적과 권능과 귀신이 쫓겨나는 일들을 열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들은 열매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불법을 행했다고 하십니다.
바른 열매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내용입니다. 팔 복의 성품이고, 인간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태도와 모습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물질과 사람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기능과 능력이 아니라 인격과 성품입니다.
이 열매는 나무에서 자연스럽게 맺히는 것입니다. 다른 데서 따와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는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적인 나무에서 선지자의 사역이라는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혀 아닌데 겉으로 열매를 따와서 걸어놓고 붙여놓습니다. 인격과 성품은 전혀 아닌데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권능도 행합니다. 그것도 주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성품이고 인격입니다. 어떻게 분별합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의 성패나 현상이 아닙니다. 안수해서 병자가 낫는 것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않습니다. 방언하고 예언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참됨을 뒷받침하는 열매가 아닙니다. 언제나 열매는 그 사람의 성품이고 인격과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바꾸십니다. 나무를 바꾸십니다. 사람이 바뀌면 열매는 자연히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바꾸고 엉겅퀴를 무화과나무로 바꾸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새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성령으로 심어주신 팔 복의 성품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매사에 주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들보를 보고 애통하게 하십니다. 헛된 자랑을 멈추고 십자가를 붙들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신자 노릇이 아니라 신자로 바꾸십니다. 나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나무가 바뀌어서 열매가 자연히 맺히는 것과 따와서 붙여놓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신자 노릇 하는 것과 신자로 사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노릇 하는 자들은 사람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가 다릅니다. 사람이 볼 때는 포도를 걸어 놓는데 사람이 없으면 어느새 가시가 나옵니다. 진짜 포도나무는 사람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언제나 포도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성취나 결과나 현상을 보면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시나무에 포도 한 송이를 걸어 놓고 포도나무라고 속이지 않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열매는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현상이나 일의 성취가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신앙인격이고 성품입니다.
갈5:19-22절을 보십시오. 겉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해도 그의 열매가 육체의 열매라면 그는 가짜입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탁월한 기능과 능력을 행사하는데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열매는 정작 육체의 열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능적 탁월함으로 진위를 가름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을 좇을 때 나오는 열매는 기능적이지 않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전부 기능적이지 않고 성품이고 인격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이 이 싸움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다듬으시고 깎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맞추어 성품과 인격이 성령의 사람으로 연마되는 것이지 그것 없이 어떤 일을 성취하고 기적을 꿈꾸고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여 대단한 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땅히 구비해야 할 정당한 신앙인격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우리는 지금 사교모임과 동아리 모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길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늘 결단해야 하는 영적 전쟁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친목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동네 산책이 아니라, 천성을 향한 나그네 인생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참된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거짓 스승의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서 우리 구주 예수님이 걸으신 믿음의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혹, 고단해서 잠시 쉬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다시 일어나서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 혹, 두려워서 움츠러든 분들이 있습니까? 일어나 다시 이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유혹과 시험으로 딴눈을 팔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다시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시키시고 내미신 주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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