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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미네이터, 천국말살자>의 줄거리:
차미네이터라는 말을 아십니까? 지칠줄 모르고 움직이며 공을 걷어내는 축구 국가대표 차두리 선수의 별명입니다. 차두리와 터미네이터의 합성어지요. 천미네이터는 천국과 터미네이터의 합성어 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천국을 철저하게 말살하는 자입니다. 차두리가 공을 걷어내듯 천국을 관심 밖으로 몰아내는 자들입다. 대체 누가 이 끔직한 천미네이터란 말입니까?
천미네이터, 천국 말살자
(마12:38-42)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천미네이터, 천국 말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차미네이터라는 말을 여러분 아십니까?
국가대표 축구선수 ‘차두리’라는 이름과 ‘터미네이터’라고 하는 기계인간의 이름의 합성어입니다.
이 차두리 선수가 체력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래서 수비수로서 쉬지 않고 뛰면서 상대방의 최종적인 공격을 다 걷어내니까 이 ‘차미네이터’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원래 터미네이터라는 말은 ‘종결자’로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마지막 매듭을 짓는다’라는 것이고 또 말살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차미네이터, 우리 진영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다 걷어내니까 차미네이터가 되죠.
그러면 천미네이터는 무엇일까요?
천국을 말살하는 자입니다, 제가 만든 단어예요.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천국은 그 누구도 말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을 말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에서 천국을 말살시키는 자, 사람의 관심의 영역 바깥으로 천국을 몰아내는 자, 그게 천미네이터입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실재의 천국은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말살할 수도 없고, 마귀도 말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에서 관심 바깥으로 천국을 몰아내고, 사람 마음 안의 천국을 말살시켜버리는, 실재의 천국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버리는 천미네이터가 있다는 것이에요.
자,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우리가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천미네이터가 어떻게 사람 마음에서 천국을 말살해 가는가? 보는 거예요.
이해하기가 참 힘든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부터 이해가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싸인이라는 말입니다, 싸인.
간판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구체적 현실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기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기적을 일으켜서 예수님 당신 속에 천국이 들어와 있음을 싸인으로 나타내 달라, 그러면 그 싸인을 보고 우리가 당신 속에 천국이 들어와 있음을 알 것이 아니냐?’고 얘기를 합니다.
‘당신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여 달라’
이게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바로 위에서 귀신에 들려서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낫게 해주십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해서 주님께서 ‘내가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는 것이면 너희 가운데 이미 천국이 임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천국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 싸인이 바로 앞에 보여 졌어요, 바로 앞에 뿐만 아니라 수백 수천 건의 기적이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 모든 기적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가져오셨고, 예수님 안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천국을 -심리상태의 편안함 이런 게 아니라- 갖고 오셨고, 그 천국이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다는 표시, 표적, 싸인이 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표적을 구하느냐 이겁니다. 그게 이해가 안 가요.
그 당시는 ‘메시아가 오셔서 싸인을 보여줄 때 물이 거꾸로 흐른다든지, 쓰러지는 담벼락이 멈춰서 그대로 서있게 한다든지 하는 싸인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이런 식으로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던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짜 하나님나라를 가져 온 자라면 그 싸인을 보여 달라’
그래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게 다 천국이 왔다고 하는 싸인노릇을 못하는 겁니다.
이해가 안 가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더 이해가 안 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표적은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바울도 말하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그 표적이에요.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만에 다시 나온 사건으로 같이 연결을 시키시는 것이죠, 상응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사건은 예표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사건의 예표로서 얘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만이 어떻게 천국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바로 앞에 분명히 그러셨잖아요?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이미 천국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해놓으시고,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보일 표적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기적이지요, 하나님나라가 예수님께 임했다고 하는 싸인이고 간판입니다.
그러나 왜 그것만이 보일 수밖에 없는 유일한 표적이라고 얘기하십니까?
도대체 그 수 천 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듣고서도 또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은 뭐며, 그런 표적을 구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대답 속에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표적으로 일으키시면서 천국이 도래한 싸인으로 간판으로 드러내시면서 오직 십자가사건만이 너희에게는 천국을 가리키는 표적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참 오해도 많은 본문이고, 두루뭉술한 이해가 지방덩어리가 엉기듯 엉겨붙어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천국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어떤 기적을 성령의 도움으로 일으키셔도 결코 그 기적을 천국의 싸인으로 볼 수가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결코 볼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어제 말씀드렸죠?
성령‘나’가 있고 육체‘나’가 있습니다.
육체‘나’는 뭐지요?
사람의 마음은 마음 자체로 있을 때는 아직 인격이 아닙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생겨야 돼요.
그런데 그 자아의식은 반드시 ‘너’가 있어야 돼요.
그러면 육체‘나’는 어떻게 해서 ‘나’가 됩니까?
마음과 육체가 결합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고 있고, 내 마음이 불안해하고 있고 내 마음이 기뻐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육체를 통해서 접하는 이 세상일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고 사는 겁니다.
마음이 육체와 연합되어 있는 상태예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육체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성령과 연결이 되어서 이루어진 ‘나’입니다.
하나님을 ‘너’로 하고, 예수님을 ‘너’로 해서 생긴 ‘나’예요.
하나님을 ‘너’로 하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님을 ‘너’로 해서 생긴 ‘나’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나’가 됩니다.
몸을 통해서 생긴 ‘나’는 자식 앞에서 나를 아빠로 만들고, 아내 앞에서 남편으로 만들지요.
여러분, 이렇게 제가 자주 반복해서 얘기하는데도 우리가 이런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론이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힘드시나 봅니다.
어제 동서남북에서 말씀을 나누시는 가운데 이게 참 이해가 금방 되지를 않는다는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자, 어쨌거나 그런 육체의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통해서 마음은 세상을 느끼는 거예요.
육체가 없다면 마음이 세상을 못 느껴요.
성령을 통해서 마음이 천국을 느끼는 거예요, 성령이 없다면 마음은 실재하는 천국을 느낄 수가 없어요.
이 지구 위의 삶이 실재해서 몸을 통하여 마음이 이 땅의 삶의 형편을 느끼듯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듯이, 성령님을 통하여 천국이라는 객관적으로 있는 실재의 그 세계를 내가 느끼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승천하신 주님과 교통을 하는 겁니다.
마음이 있으면 하늘 쪽을 향해서 성령이 매개를 하시고, 이 세상 쪽을 향해서 육체가 매개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육체‘나’, 마음이 몸과 연결된 상태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싸인이 바뀌어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고 한다면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그 기적은 싸인이고 간판이에요.
예수님 안에 천국이 들어와 있다는 간판입니다.
천국의 간판, 천국의 싸인이라는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너무 상식적인데도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면 그 기적을 대할 때 그 기적이 ‘예수님 안에 천국이 들어와 있구나!’ 하는 싸인으로 받아들여져야 됩니다.
여기서 이 싸인의 의미가 뭡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마음이 지금 천국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천국의 싸인이 필요한 겁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부산이 300Km 라는 싸인이 있습니다.
그 싸인을 왜 봅니까? 부산을 가기 때문에 부산의 싸인이 필요한 거예요.
여수를 갑니다, 여수가 250Km 남아있다는 이 싸인을 왜 봐야 되는 겁니까?
여수를 가기 때문에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그 싸인을 보고, ‘아, 이제부터 내가 천국을 가야 되겠구나!’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 기적을 보고 어떻게 대하는가 하면, 육체의 ‘나’의 상태에서 마음이 몸과 묶여있고 몸의 종노릇하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의 싸인을 보여주시면 그 천국싸인을 이 지상에서의 싸인으로 바꿔버립니다.
이 땅 위에서 좀 더 잘살 수 있는 형편으로 가는 싸인으로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객관적으로 이 한반도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실제로 미국이 있듯이 그렇게 천국이 객관적으로 있어서 그 천국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천국의 싸인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 안에도 천국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있는 것처럼 들어올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천국 몇 Km 라는 싸인으로 기적을 보고, ‘아, 이제는 내 마음이 천국으로 가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육체의 ‘나’의 상태에서 이 지구 위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5년 뒤에는 더 좋은 아파트를 구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이 지상에서의 소원을 향해 가는 싸인으로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객관적으로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지금 펼쳐져 있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천국으로 마음이 지금 가야 될 이 모든 상황을 마음에서부터 그 천국에 대한 관심을 다 말살시켜버리는 거예요.
우리 마음의 관심의 영역 안에서 천국을 터미네이터처럼 천미네이터가 되어서 천국을 말살시켜버리는 상태가 이 육체의 ‘나’의 상태라는 겁니다.
여러분,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 기억나시죠?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큰 영역으로 분류하자면 주제가 신데렐라입니다.
그런데 그 흔해 빠진 신데렐라라는 주제에 SF 요소를 집어넣었어요.
공상과학적 요소를 집어넣어서 자칫하면 아이들 장난처럼 유치해질 수도 있는 드라마가 아주 신비하게 남녀의 사랑을 그려내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 두 남녀의 사랑이 ‘시크릿 가든’이라고 하는 비밀스러운 환상적인 요소를 통해서 맺어지게 되는데, 이 드라마의 특색을 결정짓는 ‘시크릿 가든’이 출현하게 되는 과정이 간판을 바꾸면서부터 일어납니다.
어찌어찌 하다가 주인공들이 제주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마운틴 바이크로 바이킹을 하게 되는데 높은 언덕에서 길게 험한 산길을 타고 내려가서 바닷가의 등대까지 가는 시합을 하게 됩니다.
남자 둘과 여자 한 사람이 시합을 하는데, 앞의 남자가 지나가고 두 번째 남자가 지나가면서 해변길을 가리키는 팻말을 어깨로 툭 치고 가는 바람에 그 팻말이 다른 쪽 길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뒤늦게 쫓아오던 여자주인공이 그 바뀐 팻말을 보고 숲속길로 들어가면서 길을 잃게 되고, 여기서 주인공이 이 여자를 찾아 나서서 둘이서 ‘시크릿 가든’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얘기에요.
어깨로 툭 친 바람에 간판이 바뀌어버렸어요,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히 이것은 천국, 해변으로 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간판이었는데 그 간판을 툭 치면서 등대가 아닌 전혀 다른 쪽으로 가는 간판으로 바뀌어버리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 몸이 마음의 주인노릇을 합니다.
마음이 몸이 접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반응하면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이 상태에서는 성경을 보면서 어떠한 예수님의 기적을 대하더라도 전부 간판을 바꿔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고, 시각장애인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신 이 모든 궁극적인 이유가 당사자들이 불쌍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에 기록되게 하신 이유가 그 기적이라는 간판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떠나 몸에 묶여 있는 상태를 벗어나서 전부 천국으로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하시려고 벌려놓으신 기적들인데, 그 기적들을 보면서 다들 어떻게 바꿔버리느냐 하면 육체의 ‘나’의 현실 속에서 그 기적이 이 지상 위에서 더 나은 형편으로 나가는 간판으로 다 바뀌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보여주셔도 하나도 싸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육체의 ‘나’인 현실에서는.
마음과 몸이 묶여있는 현실에서는 그 누구라도 교황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육체와 마음이 묶여있는 육체‘나’의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성경을 대하고, 어떠한 예수님의 기적을 보아도 전부 예수님의 천국 싸인이 지상에서의 천국, 내가 바라는 천국, 더 나은 형편으로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게 비전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비전.
그러니까 교회가 이 지구 위에 예수님께서 갖고 오신 천국을 드러내야 될 교회가, 지금 현재 몸이 살아있는 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천국으로 가게끔 만들어야 될 교회가, 천미네이터가 되어가지고 중간에서 전부 방향을 어디로 바꿔버립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이 땅 위에서 삼박자 축복을 얻기 위해서다’ 삼박자 축복의 핵심적인 액센트가 어디에 들어가 있습니까?
병이 낫고, 하는 일이 형통하며, 부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에 액센트가 들어있는 거예요.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것이고 죽기 전에 우리가 이루어야 될 것은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이다.’
그러면 초대교회 때 순교한 사람들은 잘못 믿었습니까?
250년을 카타콤에 들어가 사람들은 뭡니까?
사도바울이 톱에 켜서 순교했다는 이 말이 전설이지만 어쨌든 순교했겠지요?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고 순교한 이분은 도대체 뭐예요?
교회가 지금 미쳤습니다.
천국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완전히 말살시키고 있는 거예요.
이 지상의 천국을 향해서 간판의 방향을 바꿔놓아 버린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싸인들을, 이 땅에 대한 관심을 죽이고 천국을 향하도록 한 모든 싸인들을 다 바꿔버리는 거예요.
앉은뱅이가 나은 기사를 설교하면 어떻게 설교가 됩니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안 되는 일이 없다’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다 천미네이터가 돼버렸습니다, 천국을 말살하는 자들이 돼버렸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요나의 사건만이 유일한 표적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리새인으로부터 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악하고 음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갖고 있는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기준과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악한 것과 거리가 멀고 음란한 것과 거리가 먼 자들이에요.
그런데 왜 음란하고 악하다고 하십니까?
마음은 육체에 붙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통해서 접하게 된 이 세상 그 누구에 그 무엇에 대해서도 붙으면 안 됩니다.
그 붙은 상태가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음란함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누구라도, 갓 태어난 아기라도 거기에 마음이 붙어있으면 그게 지긋지긋한 음란함이고 더러운 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유일한 표적이 되는 것은 이렇게 악하고 음란하게 마음이 몸에 붙어있는 상태, 이 더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천국이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간판은 그 육체와 마음이 연합된 상태가 죽어서 끝장이 나는 십자가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오직 십자가사건이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천국에 가고 싶어 하도록, 천국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하는 간판이고 싸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모든 기적은 다 지상에서의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간판을 바꿔버리고 오히려 그 기적을 이야기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서 천국을 말살시키기 때문에…
교회가 천미네이터가 되어 있어요.
이런 상태에서는 객관적인 천국을 볼 수 있게 하고, 이 지상에서 마음이 떠나서 천국을 갖게 하기 위한 싸인으로서의 역할은 오직 육체‘나’의 상태를 종결지어야 하는, 다시 말해 이 지상에 대한 관심을 터미네이팅해 버리는 십자가사건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십자가사건만 천국을 보게 하고 천국으로 가게 하는, 마치 부산이라는 간판이 부산으로 가게 하고 여수라는 간판이 여수로 가게 하는 것처럼 오직 십자가사건에서 육체‘나’의 구조, 마음이 몸에 종속되어 있는 이 구조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천국은 드디어 관심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십자가사건만이 유일한 표적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지상에 천국을 주려는 종교가 아니고 지상에 천국을 주려고 메시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의 어떤 좋은 상황보다도 객관적으로 아버지가 계시고 천부가 계시고 예수님이 승천해 계시는 그곳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이 지상을 떠나 그곳으로 마음을 보내게 하려고 주님께서 오셔서 천국의 싸인을 드러내신 겁니다.
천국을 갖는 것이지, 지상에 천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지상에 천국을 이루고 싶어 하는 육체의 ‘나’들이 객관적인 천국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고 이 세상에 천국이 흘러들어가야 될 것을 차단시켜버리고 교회가 바로 그러한 천국을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의 영역에서 말살시키고 있는 천미네이터의 역할을 지금 아주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바리새인과 다를 게 없어요.
악하고 음란합니다.
내 마음이 육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을 대할 때 천국을 가고 싶다고 느끼고,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천국을 나도 내 안에 모셔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능력이면 그 지혜면 이 지상에서 나의 미래를 천국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완전히 마귀의 종노릇하는 상태로 신앙인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에요.
왜 주님의 십자가만이 표적입니까?
육체의 ‘나’의 상태가 끝장나지 않고서는 객관적인 천국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천국을 향하게 하는 싸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유일하게 십자가만이 천국을 향하게 하는 표적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가 악하고 음란하게 마음이 몸에 연합되어 몸의 종노릇하며 몸의 오감관으로 접하는 세상일에 일희일비 하면서 살아갑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상태가 끝나게 해주셔서 성경 안에 들어있는 그 수많은 천국의 싸인들을 대할 때마다 천국을 향한 사모함이 넘치게 하시고, 실제로 천국을 향해 가게 하시고, 실제로 천국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