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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서편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전사자들의 묘역. 수많은 묘비들 가운데 유독 시선을 멈추게 한 어느 미망인의 남편을 향한 묘비명(墓碑銘)이다.
이 비문이 지나치는 발길을 멈추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동안 보아왔던 한시(漢詩)를 방불케 한 전통적인 한국형 비문과는 구별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그리 길지 않은 글귀이지만 망인을 못내 그리워하는 추모의 정이 애틋하고 담담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이후 우리의 묘지문화가 변화되면서 비문에 관한 양식도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어려운 한문이 아닌 쉬운 한글로, 그리고 고인의 일대기가 아닌 고인을 향한 가족이나 지인들의 뜻 깊은 메시지가 담긴 비문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지아비의 애끊는 심정 묘사
길지 않은 짧은 글, 난해하지 않은 쉬운 문장, 그러면서도 애도의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는 묘비명을 찾아가 본다.
서울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1시간쯤 달리다 보면 경기도 파주시 금촌역에 다다른다.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20여분 비포장도로를 지나다 보면 개활지가 보인다. 그곳을 가로질러 대전차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는 낙석로를 통과하면 곧바로 낙원묘원(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아동리)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는 3천5백 여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데, 재래식 분묘와 봉분 하단을 석재로 치장한 직사각형의 현대식 분묘가 각각 절반가량의 비율로 설치되어 있다.
묘원의 널찍한 마당 옆으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20여기의 분묘가 매우 인상적이다. 분묘의 우측에 파수꾼처럼 서있는 가로 1m 세로 50cm 정도 되는 비석들의 뒷면에는 구구절절이 아쉬움과 비애감이 맺혀 있는 비문들이 새겨져 있다.
함박눈이 온 누리를 덮던 그날
눈의 요정 따라 가버린 임이여
오직 아빠와 3남매를 위하여
생을 바친 여인이여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하늘나라에서
더 큰 소망 이루소서
못 다부를 서러운 노래 부르며 편안히 쉬소서
잊지 못한 사람들을 가슴으로 부르며
순간을 영원처럼 살다간 여인이
여기에 고이 잠들었노라
군산사범 동문 드림
고인의 대학동문들이 한마음으로 새겨 놓은 듯한 비문이다. 「오직 아빠와 3남매를 위하여...」라는 글귀에서 고인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헌정시」라는 제하의 비문이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당신은 나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사랑을 갈라놓을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더욱 완전케 하리로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향한 사랑은 영원하리로다(후략) -1990년 1월 하영득」
잠시 옆 동네로 발길을 옮겨 본다. 「사랑하는 아내여 편히 쉬오/ 삶과 죽음은 본디 하나라지만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은 끝이 없구려/ 당신의 사랑과 정성이 없었으면 어찌 오늘의 우리가 있었으리오/ 당신은 이제 잠들었지만...(후략) -남편 허 창」
아내에게 전하려고 만리장서를 써 놓았지만 정작 수취인의 주소를 알지 못해 그만 마음에 새겨버린 듯, 지아비의 애끓는 심경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비문에 새겨진 말처럼 어쩌면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졸업은 어원처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윤회론을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윤회론을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승과의 하직, 그것은 아쉬움이요 그리움과 서러움의 상징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영혼은 불멸하다」는 종교적 신념들이 비문의 곳곳에 나타나 있다.
「법성원융은 무이상이라/ 제법부동은 본래적이라/ 법이 두 가지가 없고 본래 고요하고 또 고요한 것이다/ 나 이제 고요히 부처님의 은혜에 고요히 잠들지라/ 나는 아쉬움도 그리움도 미움도 서러움도 다 잊고 편히 쉬리라/ 꽃피는 언덕위에 고이 잠드소서 -당신의 처 이일순 드립니다」
「법성원융」 「제법부동」 등의 어귀는 불가에서 자주 쓰는 말들로 느껴질 분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헤아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법이 두 가지가 없고...」라는 글귀의 저변에는 윤회를 기원하는 아내의 소망이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남편을 향한 그리움을 남편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려놓은 것 또한 여느 비문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어버이날 세 자매가 쓴 비문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바친 연서형 비문들 외에도 자녀들의 애달픈 비문도 눈에 뜨인다. 「일찍이 두 분과 더불어 따사롭고 푸르렀던 이 산하/ 애석하고 그리운 날들이/노을 진 산기슭에/ 목메어 불러도 대답 없으셔라/ 여읜 서러움/못 다한 정의 눈물은 끝없이 가슴을 적시우는데-/ 어머니 아버지!/ 고달픔의 한 생애 잊으시고/ 하나님 품안에 편히 잠드소서 -어버이날에 세자매」
세 자매가 적어 놓은 비문을 바라보면서 흘러간 옛 노래 「불효자는 웁니다」의 노랫말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부모를 여읜 자식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가 항상 가슴의 못 박힘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치는 우정어린 비문도 길게 자란 풀숲에 한적하게 새겨져 있다.
「남산/ 이곳에 고이 잠들다/ 그의 모습 영원히 못 보리/ 낮 밤 가림 없이 같이 노닐던 우리/ 못내 그리워하며 명복을 빈다」
규격화된 인쇄체 글씨와는 달리 생전에 죽마고우였던 한 친구의 자필로 보이는 비문이 초가을의 해질녘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윤색되지 않은 풋풋한 글귀가 오히려 끈끈한 우정의 맛을 더해주고 있다.
묘원의 남쪽 기슭에는 반구형(半球形)의 독특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태국의 그림엽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한 사원의 모양새이다. 화장한 유골들을 집단으로 보관하는 장소(납골당)이다. 납골당이 갖는 의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정된 땅을 잘 활용하자는 이른바 「묘지의 절약화」가 주된 취지이다. 보사부의 추정 통계(91년 12월 31일 현재)에 따르면 분묘의 감소요인은 없고 매년 20여만 기의 묘지가 새로이 생겨 10㎢(여의도 면적의 1.2배)의 공간이 잠식된다고 한다. 때문에 앞으로 이러한 납골 묘지는 더욱 확산될 것 같다. 이곳의 묘원만 보더라도 어느 곳 하나 빠끔한 구석이 없다. 사방이 분묘이다. 그런데도 또 납골당이 있는 걸 보니 무척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축은 자가 이렇게도 많을까?」어리석은 질문을 혼자서 주고받으며 산등성이를 내려왔다.
낙원묘원을 빠져 나와 다시 북진을 계속했다. 또 다른 묘비명들을 찾아 북동쪽으로 약 5㎞를 나왔다. 갈림목에 이정표가 보인다. 「통일전망대-직진」 「탄현면 법흥리-우회전」 법흥리 방면으로 시오리 쯤 가다보니 좌측에 「기독교 묘원」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71년도에 설치된 이곳 기독교 묘원(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산43)에는 현재 8천여기의 분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재래식 분묘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갑자기 맥이 풀렸다. 왜냐하면 며칠 동안의 취재 결과 비문이 있을 만한 묘원은 금방 「감」으로 알 수 있는데, 이곳은 느낌상 그런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비문은 대부분 현대식 분묘에만 보아왔던 터였다.
전방까지 북진했던 품이 아까워 그냥 되돌아가기가 무척 섭섭했다. 그래서 후퇴(?)하는 도중에도 뜻 깊은 비문을 찾아보려고 이리 저리 한참을 헤맸다. 그러나 가끔씩 성경 구절을 옮겨 놓은 비문만 보일 뿐, 대부분「성도 ○○○의 묘」라는 싱거운 표식들만 보였다. 차선책으로 기독교인 묘비에는 어떤 성경 구절이 많이 새겨져 있는지 통계를 내보기로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후략)-요한 3:16절」이 제일 눈에 많이 띄는 구절이다. 이 외에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후략)-요한 5:24절」을 비롯하여 요한계시록(14:13절), 히브리서(9:27절), 누가복음(16:2절)등이 비교적 자주 보였다.

한 나그네와의 대화
비석에 새겨진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은 낙원묘원에서 보았다.「무여열반(無餘涅槃)하소서」라는 비문과 어딘지 모르게 공통분모가 있어 보였다. 비록 교리는 다르지만 성경의 「영생을 얻으리로다」와 불가의 「무여열반」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숙명인 「죽음과의 랑데부」를 풀고자 하는 소망들이 제각기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묘원을 나서면서 성묘객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한 마디로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필자에게는 그는 반어법으로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죽음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모든 기회의 종말입니까, 아니면 축복의 시작이 됩니까? 또한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선택은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는 「최근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해괴한 교리 때문에 진리를 농담으로 흘려듣는 세태가 심화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그네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 생과 사 그리고 영생 등, 실로 풀리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명제들을 숙제로 안아 버렸다. 아울러 이러한 명제들은 비문 취재에 또 다른 문제의식을 가져다주었다.
이승에서의 모든 것이 헛되다면 묘지에 세워진 비석(비문)의 의의는 과연 무엇일까? 생자를 위함일까 아니면 망자를 위함일까? 또 다른 비문을 찾아 나서는 버스 안에서 이런 저런 형태의 비문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죽음과 삶이라는 명제가 교차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 비문이 감동적이냐, 누가 어떻게 쓴 것이냐는 그저 보통의 시각만을 가지고서는 곤란 할 것 같았다. 버스는 경기도 용인을 향하고 있었다.
「용인 공원묘지(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 산 67)」는 용인읍에서 북동쪽으로 약 3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묘지까지는 하루에 네 번 셔틀버스가 운행(용인 고수부지에서 오전 11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출발)하고 있는데, 평일에는 성묘객보다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경비가 많이 소요되지만 성묘객들을 위해 특별히 미니버스를 운행하고 있다」는 묘원 관계자의 말이다. 이른바 호화묘지들이 있는 묘원이 아닌데도 성묘객에 대한 교통서비스는 매우 인상 깊다. 대부분의 공원묘지들은 교통편이 좋지 않은 산골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처럼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묘원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린 아빠를 영원히 사랑해요」
「용인 공원」은 묘지의 형태나 단지가 두 부류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기 전, 우측으로는 현대식(계단식) 묘지가 마치 인삼 농장처럼 잘 꾸며져 있고, 북동쪽의 낮은 산에는 재래식 분묘들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현대식 묘역의 멧부리에 올라서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 아파트 단지를 연상케 한다. 「○-○○」이라는 묘지 번호도 영락없이 아파트의 호실 번호와 흡사하다.
노란 국화가 꽂혀 있는 어느 유택을 방문했다.
「우리들의 곁을 떠난 우리들의 아빠/ 우리들의 내일을 위하여/ 이것에서 피곤한 마음을 식히고 계시리라/ 아! 사랑합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자녀들의 비문은 옆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빠 우린 아빠를 영원히 사랑해요/ -아들 기원, 딸 지연」
비문에 적힌 「사랑한다」는 짧은 글귀가 이처럼 진한 여운을 남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느낌들을 글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문자가 갖는 한계인 것 같다. 까마귀들의 음산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옆 묘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의 사랑 꼬마 아가씨/ 너의 미소와 너의 자상함과/ 너의 노여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며/귀여운 유리나와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남편 전영걸 딸 전유리나」
먼저 간 아내의 대면서「꼬마 아가씨」, 생전의 아내 모습이 현실과 교차되는 듯, 착잡한 남편의 심경이 함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략) 고고청청하신 임이시여/ 청산청정 속/ 날으는 새 흐르는 물/ 한 결로 임 반겨 기리오니(후락)」
간간이 한자가 섞인 비문인데도 그리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은 비문이다. 옆 묘지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듯한 3~4평 되는 예비분묘들이 마련되어 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예정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누워야 할 한정된 공간들을 보면서 삶의 무상함이 저며 온다.
충남 천안 삼거리에서 성화대학을 지나 시외버스로 약 50분 가량을 가다 보면 천원군 광덕면 삼거리가 나온다. 천안 묘원(천원군 광덕면 신덕리)까지는 북쪽으로 다시 1㎞를 더 들어가야 한다. 30분 가량을 걸었다. 묘원에 들어서면 이반 공원으로 착각할 정도로 주변경관은 말끔하게 잘 단장되어 있다. 공원묘지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무학산 줄기에 마련되어 있는 5천여기의 분묘들은 호수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마련되어 있다.
유실수가 심어져 있는 나무들 사이로 「A단지」라는 푯말이 보인다.
묘지번호 A-○○, 김○○지묘 「딸 넷 아들 둘/ 오붓했던 우리 집에 청등 꺼지고 어둠이 깃들던 날/ 통곡도 목이 메어 안으로만 흐느꼈고/ (중략) 당신은 야속히도 떠나갔지만/우리들 가슴속 깊은 곳엔 언제나 당신 생각 함께 있다고/ -지애비는 글을 짓고 천묘하다」
「서로 다른 부모님 혜택 속에 태어나/ 한 부부 한 뜻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세상을 살얼음 걷듯 조심하며/ 훌륭한 가정 이뤄 기쁨만이 넘치더니 순식간에 하늘같은 임 놓쳐 버렸네(중략) 당신을 홀로 보내나 못 잊어 하는 마음들이 함께 있으니 외롭다 마시고/ 때가 되면 여한 없이 당신 곁에 오고저/ 정성을 다하여 유택을 만듭니다 -아내 한천심 드림」
D묘역, 규격화된 묘비들 사이로 50㎝쯤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동상이 뭔가 깊은 사연을 말해주는 듯이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다. 요절한 듯한 젊은이의 묘비에는 예감대로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18년/ 항상 누구에게나/ 겸양하고 온화한 자세 지녀/ 우정의 꽃도 피우고 도타운 정도 쌓고 가신...(중략)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운동하고 놀던 그 모습이 여기서도 보일까 해/ 가슴에 손 얹고 비오나 하늘의 세례를 받고 튼튼한 몸을 받아 다시 이 세상에 오소서/ 승일군 그럼 편히 다녀오십시오」
여행 떠나는 아들에게 말하듯 「편히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표현 속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고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저 세상에선 마음껏 피어다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한 자식이야말로 불효 중의 불효라는 옛말이 있지만 이것 또한 인위적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운명의 문제라지만 꽃다운 젊은 나이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부모에 대한 큰 불효는 옆 비문에도 담겨져 있다.
「동인아! 너 한마디 말도 없이 홀연히 가버리니/ 아쉬움이 쌓이고 또 쌓여 한으로 이어지다/ 너와 나는 유명을 달리해도 너를 내 가슴속에 묻으니 너의 정 내가 알고 나의 마음 너는 알리라/ 피기도 전에 꺾인 비운의 꽃송이여!/저 세상에선 마음껏 활짝 피어다오 -묘비를 세우면서 아버지 씀」
호숫가에 인접해 있는 D묘역 가장자리, 시전이 멈춰 선다. 자그마한 비석 옆에 고인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유품들이 플라스틱 통에 담겨져 있다. 손거울, 빗, 어린이용으로 보이는 액세서리들- 그리고 비석의 앞면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경재가 우리 곁에 있어 준 8년8개월을 고마워하면서」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그것을 마음에 묻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짧은 비문이다. 요절한 슬픈 묘소들 사이로 생저에 교육자였음을 암시하는 비문이 그 동네의 분위기를 약간은 안정시켜주고 있다.
「생(生)은 수요 사(死)는 귀라 하였으니/ 어찌 아니 돌아가랴/ 일생일업(一生一業) 외길 걸어 정열을 바쳤노라(이하생략)」
고인을 그리워함에 있어 이 말 외에 더 이상의 표현은 없을 듯한 비문이 눈길을 끈다.
「당신을 가장 사랑했던/ 당신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

짧은 글 속의 깊은 恨
비문들을 살펴보고 내려오는 길에 포클레인을 발견했다. 요즘에는 장사를 지낼 때 삽이 아니라 포클레인을 이용하는가 보다. 기분이 울적해진다. 「4평형」 「6평형」 「9평형」이라고 쓰인 묘지 안내 팸플릿은 우울한 기분을 더욱 착잡하게 만든다. 아파트의 분양 안내 책자와 너무나 흡사했다. 나는 몇 평짜리에 해당될까? 하는 묘한 기분을 가눌 수 없었다.
광주 공원묘지(광주시 북고 망월동)는 이른바 5.18 희생자 묘역이 구분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으로 5.18묘역이 있고 좌측으로는 일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5.18 묘역의 비문들은 대부분 짧은 글들이 많다. 그리고 5.18이라는 역사적 상흔이 말해주듯 비문마다 깊은 한들이 서려 있다.
「아빠 안녕」
「지천에서 피는 꽃 흐드러질 때 해방으로 잉걸 졌던 넋이여」-묘지번호 135, 최○○의 묘.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묘소 앞 영정에는 사인(死因)도 적혀 있었다.
「임신 8개월 된 임산부가 계엄군의 총에...」
분노와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한편의 자작시로 대신해 놓은 비문도 있다.
「늘 장미 밭을 가꾸시고 비둘기를 기르시다가/ 문득 사슴을 사랑하신 어머님/ 어머님 가슴에 길이 남으시리」
성과 이름 대신 「무명씨」라는 표식만 되어 있는 비석 옆을 몇 걸음 지나다 보면 끓어오르는 감정을 절제한 듯한 짧디 짧은 글들이 시선을 멈춰 세운다.
「아빠 편히 잠든 곳에/ 우리 마음 함께 있어요」
「필아! 우리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5.18 묘역을 지나 일반 묘역으로 향했다.
「어즈버, 한 줌의 흙이련가! 아쉽다/ 피기도 전에 저버린 동훈아!」
확실히 남도 쪽의 비문은 다른 지방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필자의 취재결과 남도의 비문들은 서울, 경기, 충청족의 비문들보다 간결하고 시적인 의미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비문도 그 고장의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특히 군인들의 묘역은 사후에도 규율이 엄격해 보였다. 모두들 「계급순」대로 정렬되어 있는 비석들이 그러하고, 그 중에서도 상급자는 앞줄에 하급자는 뒷줄에 안치되어 있는 모습들이 더욱 그러하다. 생전의 계급이 통용되고 있었다. 또한 일반 사병의 비석에는 대부분 이름과 계급만 새겨져 있는 것에 반해, 장교들의 묘역은 저마다 얇은 상석들이 놓여 있어 이런저런 약력도 써넣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장교들의 비석 앞에 놓여 있는 상석은 사양선택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것도 일반 사병들의 묘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애국충정만은 계급에 상관없이 하늘을 치솟을 듯하다.

한 무명 소위와의 푸른 이야기
「무심한 솔바람이여/ 너는 알고 있는가/ 내 슬픈 눈물 내 붉은 피는 누구를 위해 흘렸는가 / 오! 조국이여(이하 생략)」
비석의 약력 란에는 「1950년 8월 북괴 제 12사단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다 전사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비석 옆에 놓여 있는 장미꽃은 고인 색깔을 발하고 있다.
「육군 소위 문헌남의 묘」라는 관등 성명 아래에 새겨져 있는 비문이다.
「돈암동/ 마지막 그 한 소리/ 의와 용기 투철한 그대 몸은 여기 잠들고 넋은 벗과 영원히」
다음은 월남에서 전사한 군인 묘역의 비문들이다.
「전우! 작열하는 폭음과 더불어 산산이 흩어(흩어)진 임이여/ 임의 조국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영원히 살리라」
「공수야! 그 충천하던 의욕 그 통쾌하던 웃음(웃음)소리/ 너 이제 죽음이란 생소한 말 속에 여기 누웠으니(하략)」
「푸른 조국 떠나면서 산천이 청청하면 돌아온다지/ 청산이 되고나니 전사통지서 아! 언제 만날거나 산포도들아 -산포도 일동」
「웃으며 죽을 수 있는 사람/목숨보다 더 중한 조국에의 사랑/행복합니까? 행복합니다 -지북성 동기생 일동」
「세계의 평화」라는 구호 아래 조국을 떠났던 백마부대, 청룡부대 용사들. 이들이 조국을 떠날 때의 비장한 각오는 비문이 새겨진 그대로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었다. 「세계의 평화」라는 깃발 아래 이국땅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젊은 한국군들의 묘비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6.25 전사자들의 묘역 제2단지 가장자리에서 우연히 이름 없는 묘비를 발견했다.
「묘지번호 1659, 육군소위 김○○의 묘」
김소위라는 표식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새겨져 있지 않다. 전사자들의 경우,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묘비의 뒷면을 보면 무명에 얽힌 사연들이 자세하게 적혀져 있다.
묘비 뒷면에는 조선일보(64년 6월 16일자)의 기사가 그대로 비석에 옮겨져 있었다. 비석에 새겨진 「격전지에 피고 진 어느 우정」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읽다 보면 黃圭萬씨(62.대한해운 고문)가 등장한다. 바로 黃씨와 무명 소위와의 「부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950년 8월 낙동강 도하작전이 절정에 달해 공산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경북 안강 지구 전투. 당시 수도사단 제26연대 소속의 소대장이었던 黃씨는 적에게 빼앗긴 385고지의 탈환임무를 띄고 그 고지 남쪽 능선 밑에 진을 쳤다. 8월 27일 아침7시쯤 어느 낯선 소대장이 인솔하는 1개 소대가 지원차 도착했다. 그 소대장은 黃씨에게 「자신은 제 1연대에서 왔으며 시홍보병학교 갑종간부 1기생인 김소위」라고 했다. 이 신임 소대장은 직접 지형 정찰을 해야겠다면서 참호 밖 능선 위로 달려 나갔다. 순간 적의 기관총탄은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의 옷을 뒤져 보았으나 주머니 속에는 거울 한 개와 몇 가지 소지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黃씨는 대검으로 근처에 있는 소나무 등걸 밑을 파고 시체를 묻고는 후일을 위해 그 위에 돌 하나를 얹어놓고 후퇴를 했다. 세월은 흘러 14년 되던 해(1964년 5월) 黃씨는 경북 월성군 강동면 단구리에서 김소위의 유골을 가까스로 발견했다. 그 후 김소위는 전우인 x씨에 의해 전우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 후 (1990년), 黃씨는 수소문 끝에 김소위의 이름이 「壽泳」이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黃씨는 1990년 11월 18일 비로소 김소위의 비석 앞에 상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고 육군중위 金壽泳」이라는 이름을 또렷하게 새겨 놓았다. 黃씨는 『김소위를 국립묘지에 안장시키기까지는 그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다』며 그 때의 일을 회고했다.
『14년이 지난 후에 지도(5만분의1) 한 장을 들고 김소위를 찾아 나섰습니다. 온종일 헤맨 끝에 관통된 고인의 유골을 발견했습니다. 14년 전 내 손으로 묻었던 전우의 모습을 보니까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黃씨는『요즘에도 잊지 못한 옛 전우인 김소위의 묘소를 자주 들러 본다』며 옛 시절이 생각났는지 어느 새 눈가에 이슬이 맺혀진다.

어머니에게 쓴 딸의 편지
서울에 있는 망우리 공설묘지(중랑구 망우리 산 51)에는 보사부의 통계(90년 12월 말 현재)에 의하면 3만 8천61기가 매장되어 있다. 매장된 기수와 총 가능 기수의 숫자가 같은 것으로 보아 숫자상으로는 현재 더 이상 묘를 쓸 수 있는 유용면적은 없는 셈이다.
90% 이상이 재래식 묘지인 이곳에서 비석(비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집에서 제작한 듯한 석물위에 「○○○지묘」라는 표식만 되어 있을 뿐이다. 어떤 묘소들은 나무로, 또는 아예 비석이 없는 곳도 태반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하여, 조봉암, 장덕수, 지석영 등 애국선열 및 저명인사들의 묘소가 있기는 하지만 망우리 묘지는 이른바 「없는 사람」들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곳에서 비문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른다.
상석 위에 놓여있는 소주병, 반쯤 타다 남은 값싼 담배꽁초, 부패된 음식물 위를 한가롭게 오고가는 개미들의 움직임 속에서 왠지 쓸쓸한 기분마저 든다. 그런데 우연히도 약수터 근처에서 따뜻한 글귀를 접할 수 있었다.
묘지 관리소 근처에 있는 약수터에서 서쪽으로 약 2백m를 가다보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10여기의 분묘들을 볼 수가 있다. 그 중 제일 뒤쪽에 있는 묘소 앞에는 이런 내용이 붙어 있었다.
「어머님/ 현경이가 요즈음 많이 아픕니다. 그리고 현우는 얼마 전 반에서 1등을 했습니다/ 엄마가 계셨더라면 좋아하셨을 텐데/ 그날 현우에게 떡볶이만 500원어치 사줬어요/ 어머님! 요즈음 날씨가 시원해져 가네요. 어머님도 여름보다는 시원하시죠/ 어머님! 그리고 어머님 비석 만들려고 저축을 하고 있는데 다음 달이면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석 만드는 공장에 갔더니 5만원 정도만 더 있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어머님! 값비싼 비석이 아니더라도 저의 이러한 편지가 그래도 마음에 드시죠/ 그럼 다음 주에는 동생들이랑 같이 올게요 -큰딸 현숙 올림」
비석 모양을 본뜬 직사각형의 판자(비목) 위에 비닐로 덮여 있는 이 편지는 아마 소녀 가장이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비문은 아니지만 모녀지간의 정이 흠뻑 배어 있는 글이다.

추모와 그리움의 공간
비문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비문은 어떻게 씌어져야 할까? 또 어떤 비문을 뜻 깊은 비문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갖고 출발했던 비문 취재는 뚜렷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종교라든가 비합리적인 관습 등을 배제하고 좀 더 합리적인 발상을 전제 한다면 망인을 추모하는 비문을 적음에 있어 일정한 법칙이 있을 수 없다. 추모자의 심경을 어떠한 틀에 맞춰 토로해야 한다면 그것은 습관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식장에서의 애국가 제창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비문이 망인을 추모하는 가장 적절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이 또한 우문으로서 뚜렷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오랜 관습상 이것을 순전히 묘비문학(에피그램)적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더더욱 그것에 어떠한 평론을 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추모의 글을 새기는 것은 한시대의 관습인데, 그것이 만고에 변하지 않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우리의 의식들이 변했는데, 8백년 전 주자(朱子)의 예법에 근거하는 형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왕조시절에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망인의 묘비에 「학생(學生)」「유인(孺人)」「공(公)은...」등의 문투는 어딘지 어색한 구석이 있다. 고사에 의하면 「학생」은 벼슬 못한 양반에 대한 왕조시절의 존칭이며 「유인」은 그런 사람의 아내 또는 9품관의 아내에 대한 왕조적 존칭이다. 다시 말해 「양반」「상놈」찾던 시절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특히 고관대작을 지낸 유명인들의 비문들을 보면 대부분 순한문이다. 어지간히 유식한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해독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것은 추측컨대 한글은 어딘지 모르게 가벼워 보이고 한문은 좀 더 품위가 있어 보인다는 예로부터의 잘못된 관념이 그 주범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관념은 만연된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 풍토와도 그 뿌리가 연결된다고 불 수 있다.
추모의 정이 담겨 있어야 할 비문이 그동안 토지 계약서처럼 경직되고 정형화된 글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랑의 위력
비문, 그것은 고인의 화려한 이력서보다는 무덤 앞에 서면 언제든지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루 수 있는 수필과 같은 그런 것이 좋을 듯하다. 수필 같은 비문, 그것은 주제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장점과 특징을 갖고 있다.
「그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제도 오늘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만날 것입니다/ 생전에 그대와 나는 못 만났다 할지라도/ 이제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대! 천국에서 꼭 만납시다/ 그땐 그곳에서 천국결혼을 멋들어지게 해 봅시다 -영원한 당신의 사람 ○○○」
무슨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비문이다. 비문을 적은 사람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비문에 얽인 사연을 묻는 질문에 김정광씨(51.회계사)는 간단하게 대답을 했다.
『부모님의 결혼 반대로 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더 이상 어떤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현재까지 미혼인 김씨는 젊은 시절 그때의 애정을 지금도 꼬깃꼬깃 간직하고 있었다.
『제 나이 쉰이 넘었소만 아직 혼자입니다.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 삶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해서 였습니다』
김씨와의 대화 속에서 사랑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희경아! 그곳은 자동차가 없어서 좋겠구나/ 차 조심 하라는 너의 마지막 말/ 우리식구 모두 잘 지키고 있다/ 부디 자동차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어라(하략) -희경이를 그리며 아빠씀」
고인의 아버지인 박현철씨(45.교사)는 『애비보다 먼저 간 희경이가 어떤 때는 야속하게 느껴진다』면서 괴로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오는 승용차에 그만...』
사고 즉시 병원으로 옮겼으나 3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딸애의 마지막 유언이 「아빠 차 조심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희경이의 염려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서 「식구들 모두 차 조심 잘하고 있다」는 말을 비문에 적었습니다』
지금도 자동차만 보면 가슴이 뛴다는 박씨는 『자동차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윤 창 환(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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