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하니아 ~ 이집트 포트사이드 첫날
2023년 3월 8일 오전 5시 30분. 출항의 아침이다. 먼저 배의 쓰레기들을 다 배출한다. 일단 중요한 고장들은 어제까지 다 마무리 했다. 돈 엄청 썼다. 그래도 그 돈으로 안전을 산 것이니 후회는 없다. 아내의 명령대로 감자를 10개 깎아놓고, 계란 20개를 삶았다. 미리 반찬을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하니아에서 포트사이드까지는 3일 23시간, 522Nm 디젤은 161.5리터 소모 예정이다. 모든 것이 다 좋을 때 이야기다. 출발하면 4일 만에 도착이다. 일요일이 되네. 에이전트가 일요일 근무하나? 잘 모르겠다. 일단 출발과 도착을 메일로 보냈다. 담당 에이전트의 연락처를 다시 확인한다. 포트사이드 근방에 가면 전화하자.
수에즈 운하 통과 에이전트 Menna Salah : Operation Specialist 메나 살라 +20663206970 Felix Maritime
아침 9시에 크레타 해양경찰에 가서 TEPAI 영수증을 주고, 바로 육상 경찰에 가서 여권에 출국 스탬프를 받았다. 출국 수속이 끝난 거다. 이제 부식과 냄비 등 몇 가지만 사면 출항이다.
오후 1시. 점심으로 피자 두 조각을 샀다. 아내가 냄비는 너무 비싸서 못 샀다고 한다. 품질에 비해 비싸다는 의미다. 배에서 피자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바로 출항이다. 이제부터 4일. 수에즈의 관문인 이집트 포트사이드로 간다. 하니아 마리나 바로 앞은 암초다. 왼쪽엔 초록색 부이 오른쪽엔 등대를 두고 좁은 수로를 조심히 빠져 나와야 한다. 초록색 부이 왼쪽으로 가면 끝장이다. 기억하자. 초록 부이와 등대 사이!
출항하자마자 맞바람 15노트다. 어제까지 서풍이 잘 불더니 내가 출항하니 바로 동풍이다. 어째 바람의 도움이 별로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으로 위안을 삼자. 하니아 해양경찰에서 들은대로 VHF 채널 16번으로 수다 포트 컨트롤을 부른다. 여기는 제네시스, 나는 파이어 엑서사이즈(화재연습)가 필요하다. 몇 번 불렀더니 수다 컨트롤에서 알겠다고 연락이 온다. 하지만 이들의 통신은 전혀 오리무중. 하나마나한 통신이다. 알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다. 만약 한국이라고 가정해 보자. 아마 문자로, 어떤 법령에 의거하여 어디 어디 지점에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누가 어떻게 화재훈련을 실시한다고, 계속 가라거나 어느 지점에서 대기하라거나, 협조에 감사하다고 장문의 연락이 올 거다. 그런데 크레타는 ‘알겠다’ 란다. 지들은 알지 몰라도, 이방인 세일러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고속 인터넷도 물론이지만, 발전이라는 의미에서는, 이들과 우리의 시스템은 점점 더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물론 행복과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아참, 어제 타소스와 이야기를 하다가 쓰레기통이 부서진 이유를 알았다. 여기는 그리스 학생들이 수학여행 오는 곳이다. 한국의 경주 같은 곳. 그동안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무지하게 봤다. 그런데 여기 가톨릭 고등학생들과 수학여행 온 프로테스탄트(신교도)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단다. 평화로운 크레타에서 웬 종교전쟁? 다친 학생들이 없기를 바라지만, 쓰레기통은 무슨 죄인가?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을 모조리 쌓고 불이나 확 질러요. 누가 알아요? 그러면 혹시 사람이 될지.”
오후 2시 10분, 웨이포인트를 조금 일찍 바꾸니 빔 리치 12노트다. 2/3 세일 펴고 엔진을 끈다. 속도 6.1 노트. 바람이 이대로 라면 몇 시간은 범주로 제대로 세일링 할 수 있겠다. 지금 이 순간이 요티들이 꿈꾸는 항해다. 아름다운 크레타 해변을 조망하며 우리 가족은 지중해 마지막 구간을 항해 중이다. 그러나 한 시간도 안 되어 바람이 가라앉았다. 범주 속도는 3.4노트, 다시 엔진을 켜고 5.1노트를 유지중이다. 레이더 가드존의 알람이 울렸다. 파도였던 모양, 배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지상 최고의 레이더다.
크레타에서도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친절한 사람들, 좋은 인연들이었다. 지중해식 삶에 대해 한층 더 깊이 피부로 느낀 기분이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같지만 사는 방식은 다 다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은, 보나마나 거짓일거다. 다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 사는 거다. 하니아에서 몇 가지 맘에 걸렸던, 배의 고장을 깔끔하게 수리했다. 예상 못한 곳에서 수리를 하니 더 개운하다. 타소스가 카타마란으로 요트 체험 사업을 하고 번창 하여 언젠가 한국으로 여행오기를 기다린다.
아까 12시 30분에 마리나의 관리자 Mr 스피로에게 하루치 계류비를 더 내고, 아직 10유로가 남은 페데스탈 카드를 주었다. 누군가 다음 세일러가 남은 비용을 사용하라는 의미였다. 그는 내게 다시 카드를 돌려주며 페데스탈 기계에서 자동 환불을 받고, 그 카드는 나중에 여기 올 때 다시 쓰라고 한다.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 진다. 나는 크레타에, 여기 하니아 마리나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카드를 그때 다시 쓸 수 있을까? 크레타에 완전한 타인으로 와서 다시 완전한 타인이 되려는 순간, 묵직한 그의 초대에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일회성 직진 항해중이다. 인생처럼.
하니아 마리나 바로 옆 배 44피트 지뉴 썬오디세이가 있다. 부모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 정도로 보이던 아이들은 언제나 배에서 놀고 있었다. 오늘 그애들이 등대로 패들보드를 타고 왔을 때, 아내가 너희들 참 멋지네. 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었다. 마리나에서 출항하던 순간, 그 아이들이 힘차게 손을 흔들어 배웅해 주었다. 우리도 아이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며 항구를 빠져 나왔다. 항해가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 그리스인들의 밝은 미소를 뒤로하고 방위각 79도. 내 인생은 지금 지중해를 건넌다.
오후 4시 40분. 중간에 몇 번 더 수다 포트 컨트롤을 불렀지만 답이 없다. 아내는, ‘아까 수다 컨트롤 부르고, 그 사람들이 알겠다. 한 게 훈련 아니에요?‘ 믿을 수 없지만 사실 일 수 있다. 하니아에서 20마일 이상 멀어지는데도 무전기는 침묵하고 있다.
오후 5시. 쿼터 런 15노트 바람. 집과 메인 세일을 80% 펴고, 범주 속도 6.1~6.3노트로 순항중이다. 여기는 늘 서풍이 부니 걱정마라. 하던 타소스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이 계속 맞기를 기대한다. 모처럼 따스한 햇살아래 순풍 범주를 하니 행복하다. 이제 6~7시간 후에 이라클리온 근처로 갈 때, 만약 인터넷이 된다면 그곳 앞바다를 지나는 중이라고 문자를 보내야 한다. 이라클리온에 거주 하시는 한국인 한분이 우리에게 응원을 보내주고 계신다. 생면부지의 분이시지만, 바다와 요트, 그리고 같은 한국인이라는 반가움이 만든 인연이다. 이렇게 자꾸 인연을 만들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러면 괴롭다. 이국땅에 정을 두고 몸만 멀어져 가니 그렇다.
오후 6시 45분. 풍향은 RUN. 풍속 5노트, 집세일을 접는다. 배 뒤편, 서녘 하늘에 노을이 불타오른다. 저녁노을은 뱃사람의 기쁨이라고 하니, 내일 날씨도 기대해 보자. 오른편에 Roumeli 의 불 빛이 보인다. 크레타에 밤이 오고 있다. 전방의 어둠 속을 주시해도 불 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레이더도 공활하다. 모처럼 거금 들여 고쳤는데,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다가오는 배가 없다. 배 정면에서 붉은 달(Luna rosa)이 떠오른다. 한참 달구경을 하다 뭔가 이상해 마스트를 올려 보니 항해등이 꺼졌다. 전구가 나간 것 같다. 오비이락. 타소스가 마스트에 올라 풍향계를 고친 다음에 전구가 나갔다. 에이 미리 나갔으면 같이 갈아 달라고 할 것을. 아내는 나더러 눈을 좀 붙이라고 성화다. 별로 졸리지 않았지만 눈을 붙이자 곧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오후 10시 56분. 눈을 뜨니 크레타 이라클리온 앞을 지난다. 속도는 6노트. 인터넷이 된다. 몇몇 분들께 나비오닉스를 캡춰해 보낸다. 현재 크레타의 중심을 지나고 있다. 나는 여기를 지납니다. 달이 너무 밝아 새벽 같이 보이는 밤바다입니다.
이집트 포트사이드의 에이전트에서 Whatsapp으로 Genesis-Egypt 라는 단체 톡방을 만들었다. 나는 마지막 포트사이드의 계류장을 캡춰해 보낸다. 여기가 맞나요?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내게 정확한 위치를 다시 보내 주겠지. 대단히 편리한 세상이다. 나는 인공위성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항해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에이전트에서 답이 왔다. 나는 포트 사이드 앞 바다에서, VHF 채널 12번으로 포트사이드포트 컨트롤을 호출하고 파일럿을 따로 태워야 한다. 혼자서 포트사이드에 계류할 수 없다. 잘 알겠다. 답변을 보냈다. 아내와 리나는 선실 2층 침대의 아래층에서 잠들었다. 나는 아직 이라클리온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다. 포트사이드까지는 아직 462해리, 3일 5시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