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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울 흑석동 학창시절
1)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 수학
참아버님께서는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여 1941년 3월 8일 제3회로 졸업하셨다. 경성상공실무학교는 1934년 6월 경성부 연건동에 설립했다. 그리고 1936년 6월에 흑석정(黑石町), 즉 지금의 흑석1동 225-6으로 이전한 후 1945년 10월까지 운영했다. 그 후 변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로 정착했다.
참아버님 학적 기록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꾸밈없이 진지하고, 강인하고 건전하며, 스스로 앞서서 모든 일에 대해 열심히 한다.”, “신체가 건강하고, 출석상황이 양호하며, 특히 축구를 좋아한다.”라고 평가돼 있다.(98)
천도를 밝히고 뿌리 깊은 자기 인격을 완비하기 위해 늘 침묵하셨다. 하루 종일 말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솔선수범하셨다. 가장 일찍 등교하셨고, 교실 청소를 도맡아 하실 때도 많았다. 동급생들도 어려워했고 함부로 하지 못했다. 고민을 의논해 왔으며, 생활비 관리를 맡겨 오기도 했다.(98~99)
수업 시간에는 집요한 질문 때문에 수업이 중단된 적도 많았다. 스스로 검증하기 전에는 쉽사리 수긍하거나 믿지 않으셨다. 백점주의, 일등주의를 지양하고 근본문제 추궁에 주력하셨다. 수업 집중력과 요점 파악능력은 무섭게 예리했다. 정성이 밑바탕 된 학구열로 정확한 예지력을 키워 나갔다. 예상 문제를 짚어 확률순대로 메모해 뒀다가 시험 때 일괄적으로 암기하면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70점 이상 맞을 수 있었다.(99)
천명 완수의 제일 밑받침이 건강이라는 것을 아시고 이때부터 줄곧 체력단련에 정진하셨다. 아령, 철봉, 축구, 복싱, 씨름, 호신술 등 할 수 있는 모든 운동을 거치셨고, 평생 건강을 위한 특수운동법도 고안해 내셨다. 교내 체육대회 때는 각기 한 종목의 운동에 출전하게 돼 있었는데 축구를 선택하셨다. 어느 날엔 씨름 세 판에 교내 최고라는 정상을 점령하시기도 했다.(99)
느린 평안도 말투를 교정하고 말 빨리 하는 훈련도 하셨다. 처음 하숙집 아주머니의 빠른 말투에 자극받아 6개월간 방과 후에 골방에 들어가 발음연습을 하셨다. (중략) 학교 학예발표회 때는 매번 원맨쇼 프로에 출연해 장래 대중 지도를 위한 수완을 스스로 키우시기도 했다.(99~100)
2) 고행 감내와 이웃돕기
참아버님께서는 여러 해 동안 특히 자취생활 경험을 많이 하셨다. 고향 집에서 충분한 학비를 보내주셨지만, 자신의 손을 거친 밥을 드시고 싶었고, 여자들의 어려움을 몸소 겪으면서 그 생활이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101)
수양이란 일생을 통해 평상시에 해야 된다고 여기시고, 이때부터 30세가 되도록 점심은 늘 금식(禁食)하셨다. 배고플 때 하나님의 심정을 가깝게 접할 수 있었고, 만인을 위로하고 맞아 줄 수 있는 깊은 동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 밥에 대한 그리움 보다 민족과 나라를 더 그리는 길을 가시고자 했다. 그 점심값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셨다. 천명의 책임완수를 다짐하면서 생일에도 늘 금식하며 보내셨다.(101~103)
한겨울에도 일부러 보름씩 불을 넣지 않고 냉방에서 지내셨다. (중략) 전구(電球)를 끌어안고 주무시다가 덴 자국은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도 같이 울어 주실 심정도수에 도달할 지름길을 찾아 죄 없는 죄수의 모습으로 남다른 고행을 자신하신 것이다. (중략) 30세까지 새 옷을 사 입지 않으셨다. 고물상에서 헌옷을 사서 입고, 고개 숙인 걸음으로 후미진 길을 다니셨다. 좋은 길이 있다 해도 그 길을 내놓고 더 나쁜 길로 가려고 하셨다. 옷을 모두 꿰매 입으셨고, 속옷은 손수 지어 입으셨다. 어떤 때는 여장을 하고 시내를 다니며 여자들의 세계를 알아보시기도 했다. 세상살이를 샅샅이 접해 보시려니 이렇듯 하늘의 암행어사가 되셨던 것이다.(103~104)
처음 맞는 방학엔 고향에 가지 않으셨다. 가난한 집 자녀들이나 고향 못 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친구가 되시고자 했다. (중략) 집에서 학자금을 보내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느라 써버리고, 스스로 벌어 충당하시기도 했다. (중략) 통학 때나 시내왕래 때 전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왕복 전차비 10전을 노상거지들에게 적선(積善)하셨다.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는 간곡한 심정으로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손으로 치면서 ‘죽지 말고 나와 더불어 크자’고 읊조리며 걸으셨다.(104~105)
때로는 종로3가 유곽(遊廓) 등 뒷골목을 조사하셨다. “왜 예쁜 여자들이 저런 일을 해야 하느냐? 저들이 누이고 딸이라면 어찌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의식으로, 그들과 마주해 대화하며 눈물로 권고하셨다. (중략) 주말이면 한강다리 밑 빈민촌에 가서 어린이와 노인들의 머리를 깎아 주시면서 함께 정을 나누셨다. 이들이 행렬을 짓는 빈민굴에 들어가서 누더기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경험도 하셨다. 빈민굴이 심정생활의 첫 무대였다. 한마디만 해도 대성통곡하는 정서를 가진 그들의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106)
3) 오순절교회와 새예수교회
오순절교회는 일제하 제도권 교회의 독선적 교회행정과 교리 및 체제 중심의 신앙양태에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 주도한 한국적 성령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유입된 오순절운동에 접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취지의 새로운 교회운동을 모색하려 했다. 1928년 미국인 간호원 럼제이 선교사가 단독 내한해 용산에 오순절교회를 세웠다. (중략) 신사참배 강요와 조직적 탄압에 맞서 힘겹게 싸우느라 이렇다 할 발전은 보지 못했다. (중략) 서빙고동 오순절교회의 초기신도로서 인근에 거주했던 박운식 씨 가족이 흑석동으로 이사했다. 그때 서빙고교회의 후원으로 초가(草家) 교회가 개척됐다. 참아버님께서 흑석동 시절 초기에 이 교회에 인연되셨다.(107)
한편, 1930년대 초 초교파적 부흥운동의 여파로 제도권 교회의 이단 징계를 받은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이호빈, 백남주, 한준명, 박계주 등 116명이 1933년 6월에 평양시 신양리에서 새예수교회 창립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이용도 목사가 지병으로 원산에서 타계하자 그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이호빈 목사를 후임으로 선출했다.(108)
서울의 새예수교회 산파역을 했던 분은 강숙경 부인이었다. 강씨는 내자동 자택에서 (새예수) 교회를 운영하게 됐다. (중략) 평양에서 이호빈 목사, 박재봉 목사, 한준명 목사, 한의정 복음사, 김예근 씨, 김백문 씨 등이 자주 내려와 부흥집회를 가졌다. 그 무렵 참아버님은 오순절교회에서 강씨 부인의 둘째 딸 이기봉 씨 가족과 만나 새예수교회와 인연되셨고 그곳에 참여하셨다. (중략) 그리고 1939년 가을에 강씨의 주선으로 흑석3동에 교회를 세우고, 이듬해 ‘예수교 명수대예배당’으로 간판을 걸었다. 말씀 중에 “명수대에 가면 명수대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선생님과 몇몇 동지들이 지은 교회이다.”라고 하셨듯이. 참아버님께서는 경성상공실무학교 2학년 당시 교회 신축공사의 주역이 되셨다.(108~110)
4) 체휼신앙 및 실천생활
이기봉 아주머니 하숙집 시절에 참아버님께서는 큰 체격에다 평소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엄숙한 면모를 보이셨다. 그런 한편 정이 많고 걱정의 빛을 보이지 않는 밝은 모습과 항상 변함없는 기도생활로 깊은 인상을 주위에 남기셨다.(111)
참아버님과 같은 학년으로서 세 살 연하인 선린상업학교 재학생 곽노필씨가 있었다. 곽씨는 참아버님의 열성적인 신앙생활에 영향 받아 기독교신앙의 깊은 맛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중략) 문승룡 씨의 경우, 당시에는 불량배들도 많았지만 참아버님과 함께 다니면 든든하고 두려울 것이 없어서 아버지 같고 아저씨 같은 형님이었다고 회고한다.(111)
내자동 새예수교회와 흑석동 오순절교회 신도들이 자연적으로 합류한 명수대 새예수교회는 서빙고 오순절교회와도 상호 유대를 맺고 있었다. 어떤 때는 한강 모래사장에서 합동으로 주일예배를 갖기도 했다. 참아버님께서는 명수대교회와 서빙고교회를 오가시면서 주일학생들을 각별한 애정으로 지도하셨다. 한겨울에는 한강 얼음 위를 통해 다녔고, 대개는 멀리 한강다리로 돌아다녔다.(111)
당시 일제는 한국기독교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해, 학생들도 매달 남산의 신궁에 가서 참배해야 했다. 그러나 참아버님께서는 그때마다 요령껏 참배시간을 피하셨다. 정작 출석을 부를 때는 어느 샌가 제자리에 와 계셨다고 한다. 그 무렵 참아버님께서는 하루 12시간 이상 17, 18시간까지 기도에 몰입하신 때가 있었다. (중략) 원리를 찾기 위한 처절한 시련과정을 거치셨던 것이다. (중략) 한강대교 중간 중지도(노들섬)에 가서 한강 물을 바라보며 나라 위한 탄식의 기도를 많이 하셨다. “너는 천년만년 흐르지만 얼마나 붉은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품기 위해서 흐르느냐?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이 물인데, 이 비옥한 삼천리강산을 단장할 수 있는 샘, 어머니 젖 같은 한강수가 돼야 할 텐데…. 너는 못 하더라도 나는 할 거야.” 이런 결의 가운데 민족해방의 날을 손꼽아 기원하셨다.(113)
밤이면 기도로 흐느끼는 소리에 한방 사람들은 잠을 깨곤 했으며, 아침이면 방바닥에 눈물자국이 실개천을 이루어 있었다고 한다. 처절한 담판기도가 연일 계속됐다. 때론 친구들과 함께 뒷산에 오르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면 긴 시간을 그치지 않아서 모두 ‘하나님에게 미친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다. 한강변에는, 민족의 사정에 북받쳐 붙들고 울음으로 기도하던 바위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114)
5) 흑석동 시절 대표적 심정의 인연
참아버님의 흑석동 시절 가장 각별한 인연을 가진 집안은 역시 강숙경 할머니와 그 딸들의 가족이었다. 강씨의 맏딸 이기완 씨는 40세 가까운 중년부인으로서 아직 학생신분이던 참아버님을 존경하며 따랐고, 이기완 씨의 동생 이기봉 씨와는 모자(母子)처럼 가까웠다. 막내 이기연 씨와 문승룡 씨는 남매지간처럼 애틋했다.(115)
특히 이기봉 씨는 참아버님을 내심 사윗감으로 뜻을 뒀다. 참아버님께서도 그 맏딸 임길숙(1924) 씨에게 각별한 마음을 기울이셨다. 정결하고 온순한 데다가 두터운 신앙심과 효심을 가진 임길숙 씨는 주일학교 반사활동도 같이 했었다. 그러나 참아버님의 내심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이기봉 씨는 의아하게도 다른 학생과 약혼시켜 버린 것이다. 선대로부터 풍족하고 여유로웠던 임 씨 집안은 공교롭게도 이후로 줄곧 기우는 가세 속에 파란과 우환을 겪게 되었다. 천운의 은사와 축복에 뜻을 맞추지 못한 불가피한 탕감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115)
참아버님 말씀에 “신령한 집단과 하나 되어 가지고 이 집단을 통해서 결혼하며 뜻을 다 이루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장차 본격적 섭리 출발을 대비한 내적 준비시대에 오순절교회나 새예수교회와의 인연의 의미는 특별했다.
그런 만큼 어떻게든 거기에서 장래 뜻적인 신부와 그 기반을 찾으셔야 할 근본섭리가 있었을 것이다.(115)
그러나 결과적으로 소원하신 상대인연을 찾지 못하셨다. 그랬기에 참아버님께서는 1942년 초엽에 집안의 이모를 통해 소개받으셨으나 일절 관심두지 않으셨던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명문 신앙가의 규수 최선길(1925~2008) 씨에게 비로소 뜻을 두시고 하늘과 문의하셨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중순 귀국하신 후 하늘의 명에 따라 12월에 맞선을 보시고 약혼하셨다. 1944년 5월 4일 혼인에 이르렀다. 혼인 당시 특별히 새예수교회 선도감인 이호빈 목사를 주례로 초빙하셨다. 그리고 일찍이 새예수교회 일원이었다가 따로 독립했으며, 섭리적으로 이용도 목사의 사명을 대신했던 인물인 김백문(金百文: 1917~1990) 씨의 이스라엘수도원을 중심하고 해방 직후 새로운 섭리 출발을 도모하셨다.(116~117)
6) 서울 흑석동 성지
1965년에 제1차 세계 순회를 마치신 후 12월 31일 오후 1시를 기해, 세계 40개국 120개 성지 중 하나요 서울 일원 7대 성지 중 하나로 흑석동(黑石洞) 성지를 축복해 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흑석1동 194-15 명수대학사교회, 흑석2동 49-19 옛 이기봉 씨 하숙집, 흑석1동 173-186 흑석교회 매입 때 대금을 내리셨다. 서울 흑석동, 심정적으로나 섭리적으로나 민족현실로나 그 암울했던 시절 흑암의 골짜기가 이 전당들을 통해 만민에게 광명의 햇빛을 비춰 주는 전통의 기지가 되어 ‘백석동(白石洞)’이 되기를 염원하신 간곡한 뜻이 서려 있었다. 옛날 거기 살던 사람들은 만날 수 없지만 그들과 인연된 후손들이라도 다시 만나 역사를 부활시켜 그 시대를 꽃피게 하는 심정의 터전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118~119)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1권』(역사편찬위원회,2009) 인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