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3:15-29, 하나님의 손길, 24.8.7, 박홍섭 목사
19장부터 계속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사울의 궁정에서 밤중에 집으로 갔다가 미갈의 도움으로 창문으로 도망쳐서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갔습니다. 요나단을 통하여 사울의 살해 의도를 확인한 후 성막이 있는 놉 땅으로 가서 아히멜렉 제사장에게서 떡과 칼을 받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가 미친 척하여 살아나와 아둘람 굴로 갑니다. 이곳으로 모인 다윗의 가족들과 환난당하고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400여 명을 데리고 오래 있을 수가 없자 모압의 미스베로 갑니다. 모압은 다윗의 증조모 룻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 유대 광야와 사해 바다 건너편에 있기에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에 적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통하여 유다 지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고 다윗은 모압의 요새를 떠나 헤렛 수풀에 이릅니다. 여기서 블레셋의 공격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일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배신으로 다시 십 황무지로 도망가 수풀 사이에 머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십 광야에 머무는 시점부터 시작합니다. 이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은밀하게 수풀에 있는 다윗에게 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다윗을 격려합니다.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며 다윗 네가 왕이 될 것을 사울도 알고 자신은 다윗의 다음이라는 요나단의 말에 다윗은 다시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십 사람들이 다윗을 밀고합니다.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 있으니 와서 잡아가라고 밀고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다가 바위로 내려와 급히 여기저기로 도망 다닙니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이 진행됩니다. 사울이 산 이쪽으로 추격하면 다윗은 산 저쪽으로 도망갑니다. 도망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침내 사울이 다윗을 에워싸고 이제 막 잡히려 하는 순간, 사울은 블레셋이 침략했으니 빨리 오라는 전령의 급보를 듣고 다윗 쫓기를 그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갑니다. 이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급했는지 오늘 본문은 그 장소를 “분리하는 바위”라고 표현합니다. 바위 하나를 두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고 이제 바위 하나만 넘으면 곧 잡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은 블레셋을 동원하셔서 다윗을 구출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엔게디 요새로 숨어듭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도망 다니는 다윗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확인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잡히지 않았던 이유는 다윗의 도망 전략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사울의 손에 다윗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좇는 사울의 손길이 집요했지만 다윗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은 더 집요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인간적인 의문이 듭니다. 차라리 사울의 손에 잡히게 하시든지 아니면 완전히 사울의 추격을 막아주시든지 하면 좋은데 하나님은 사울의 손에 잡히지 않게 간섭해주시면서도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계속 허락하십니다. 계속 이리저리 도망 다니게 하십니다. 요나단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고 전령의 개입으로 다시 용기를 내게 하시지만, 아예 상황을 바꾸어 도망 다닐 필요가 없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계속 도망자 생활을 허락하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십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계속 확인해온 사실입니다.
시편 18:1-6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이시요 나의 요새 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 시요 나의 방패 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 믿음의 고백을 만들어내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고 반석이요 요새요 나를 건지시는 이며, 나의 피할 바위고 방패며 구원의 뿔이라는 이 고백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학원에서 배우지 못합니다. 유튜브나 챗 지피티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고백과 노래는 자신의 삶으로 직접 경험하면서 “아, 이것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구나”하는 것을 배울 때 나옵니다. 하나님은 삶의 다양한 어려움과 만나는 사람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만 우리의 참된 도움이고 소망임을 가르치십니다. 때로 사람으로 상처받게 하시고 배신도 당하게 하십니다. 억울함과 모략에도 넘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셔서 계속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가르쳐가십니다. 요나단을 보내시고 급한 전령도 보내십니다. 나와 현실 사이에 나를 돕는 하나님의 바위 ‘셀라하마느곳’이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만 소망하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집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윗만 아닙니다. 사무엘상 2:1-10을 보십시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사무엘서는 이런 한나의 찬양이 어떻게 다윗의 고백이 되었는 지를 그의 도망자 생활로 설명합니다. 사무엘서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성도는 날마다 깨어지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이렇게 우리를 빚어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면서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다윗을 배신하고 밀고한 그일라 사람들과 십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이 힘과 권력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다윗과 특별한 악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일라는 자신들을 블레셋에서 구원해준 다윗을 배신하고 십 사람들은 다윗이 여기 있으니 잡아가라고 밀고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사울이 가진 힘과 권력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에게는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도망자 신세일 뿐입니다. 이런 다윗을 편들고 그를 도와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힘과 권력을 가진 자의 눈치를 보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모습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처신입니다. 그일라 주민들과 십 사람들의 행동은 인간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배신을 선택했습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밀고 당하는 아픔을 통해 사람이 누구며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배웁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왕으로 통치해야 할 백성들의 본질이 어떠하며 앞으로 감당해야 할 왕의 사명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음을 똑똑히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사람을 의지합니까? 나는 지체와 이웃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나 살기 위해, 나의 유익을 위해 지체와 이웃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손해 보고 죽고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지체를 살리고 돕고 세워주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와 지체, 이웃과 동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