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보니 눈이 꽤 많이 왔다.
더 오지만 않으면 내일 운행에는 큰 문제가 없을듯 하다.
모두가 잠든 밤,
차가운 공기가 코를 스치며, 시간이 멈추듯 하다.
밤은 깊고, 보름에 가까운 달은 설산은 하얗게 빛내고, 별은 까만 하늘을 수놓고 있다.
세상은 고요하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그저 홀로 있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모르게 묘한 두려움.
평화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이 순간, 나는 그저 이 고요에 몸을 맡긴 채,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한다.
고산 트래킹은 단순한 하이킹이나 등산을 넘어,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고, 자연과 깊이 교감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다.
고산지대는 그 자체로 경이롭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미학과 신비로움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선사한다.
걷고 걷고, 오르며 우리는 일상의 소음과 번잡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으로 천천히 자신을 깊게 보게된다.
고산 트래킹은 그 자체로 인생을 변화시키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산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소에는 접하지 못했던 거대한 눈 덮인 봉우리, 고산지대는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트래킹을 통해 자연의 위대함과 그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고,
육체의 고통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모두에게 오늘은 그러한 날이 될 것이다.
바람이 거세진다.
다시 들어가 나머지 잠을 자야지.
이른 아침, 어제 힘겹게 지나온 골짜기 아래는 두텁게 가스층이 형성되어 있다.
오늘도 오후에는 날씨가 만만치 않겠다. 눈이 더 오면 안되는데...
팀의 마스코트, 막내 루리양은 밤새 내린 눈에 신이 난 듯 보인다.
하얗게 쌓인 눈을 보고는 기쁨에 찬 눈빛으로 뛰어다니며, 순수하고 무심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에서 젊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손으로 눈을 쥐고, 몸을 휘저으며 세상과 놀고 있는 루리양의 모습은 마치 겨울의 요정처럼 느껴진다.
그 즐거운 에너지가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는 것 같아, 모두를 미소짓게 만든다.
누구나 자기만의 에너지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루리양처럼, 한 사람의 에너지와 기쁨은 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때로는 긍정적인 마인드나 유머, 열정이 팀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오대장이 수시로하는 농담이나 허당끼는 같은 요소이다.
각기 다른 개성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시너지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팀의 다양성 속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바로 그 힘이다.
그런데 루리양은 어제 힌쿠동굴에서 힘들다고, 엄마보고 싶다고 울었다던데?
아침을 먹고 아이젠까지 착용하고 완전 무장으로 최종 목적지인 ABC를 향해 기운차게 나섰다.
데우날리를 출발해서 일부 구간은 위험구간이다.
어제 내린 눈의 양이 많지 않아 눈사태나 산사태의 염려는 적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을 수 없다.
자연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몇 년 전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 안나푸르나 2봉에서
천둥같은 소리가 내며 뭉개구름이 피어오르듯이 쓸려 내려오는 광경이 떠오른다.
그 순간, 자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눈이 산을 타고 내려오며, 모든것을 삼켜버리는 장면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의 긴장감과 함께, 자연의 위엄 앞에서 우리는 그저 작고 무력한 존재임을 생각한다.
이미 선두팀과 중간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늘도 단출하게 조선생님과 쌍계와 함께 걷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변 풍경이 더 깊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비스타리, 비스타리."
덕분에 눈앞에서 펼쳐진 풍경을 더 여유롭게 바라보며, 마음속에 새로운 느낌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이런 저런 생각이 풍성하고 자유롭게 머리속을 떠돈다.
깊은 계곡 구간을 지나자, 목적지인 ABC쪽으로 시원스럽게 트이며 멀리 안나푸르나 1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풍경이 한순간에 펼쳐지자,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마치 그 모든 노력과 고생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마음이 벅차 오른다.
아름다답다.
새삼스레 어제 궂었던 날씨가 고마워진다.
거친 비바람과 눈보라가 있었기에 오늘의 맑은 하늘과 청명한 공기와 설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주어 졌으니 감사한 마음이다.
자연의 변화 속에서, 어떤 날씨도 그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속에서 힘들었던 것들을 보상하는 선물 같은 느낌이다.
"아! 좋다. 뭘 더 바래."
늘 그렇듯이 꼴찌로 MBC 롯지에 도착한다.
늘 꼴찌는 행복하다. 뒤돌아 볼 필요가 없으니까.
롯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눈을 치우느라 부산하다.
점심이 라면이다.
할 수 없이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롯지 마당에 의자를 놓고 앉아 변화무쌍하게 마차푸차레를 휘감는 구름을 감상한다.
늘 선두로 도망가서 기회가 없었던 블랙봉님과 봉오리님 공장사진도 촬영하고.
좀 더 머물며 마차푸차레와 마주하고 싶었지만
몰려오는 구름이 걱정스러워 서둘러 ABC로 출발.
며칠전까지만 해도 눈이 없어 흙길을 걸어 올라갔다는데
이틀 전부터 내린 눈이 적설량이 적지않아 발목까지 눈이 빠진다.
꽁무니를 빼던 앞선 누군가가 둔덕위에서 소리를 지른다.
봉오리님이 지갑을 롯지마당에 두고 왔단다.
그 소리에 모두가 잠시 멈칫했지만, 다행이 뒤에 쳐져있던 쌍계가 롯지로 달려갔으나 찾지 못하고.
결국, 봉오리님이 뛰어 내려가 찾아 왔다.
다시 올라오며 더웠는지 옷을 벗어 던지고 반팔로 올라 오기에 한마디했는데.
결국 ABC에서 봉오리님은 에너자이저가 아닌 배터리가 다 된 사람이 됐다.
아마도 봉오리님은 그 밤을 두고두고 못잊을 것이다.
한 바탕 소란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서서히 선두와 중간그룹과 후미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계곡에서는 못느꼈는데 광활게 펼쳐져 멀리까지 조망되는 ABC로 가는 길에서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혹시라도 거리가 멀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무리할까 봐, 후미 인원을 더 신경 쓰며 천천히 걸어간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페이스를 찾으며 여유 있게 걸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나아간다.
사천 미터 고산지대에서 눈바람부는 눈길에 구름 속 가스층으로 숨쉬기는 더 힘들고,
간간이 눈발까지 날리는 상황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중요해진다.
공기는 희박하고, 차가운 바람과 눈발이 얼굴을 때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순간 집중하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온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며, 힘겹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WELCOME 간판 앞에 도착한다.
앞서간 사람들은 오래전에 지나간듯 간간히 내리는 눈발과 날려온 눈에 흔적이 묻쳐있다.
이곳에서 모두 모여 도착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했지만 선두와 중간그룹 그리고 후미가
너무 많이 벌어져 도착의 기쁨은 롯지 다이닝룸에서나 가능하겠다.
이제 코앞에 계단만 오르면 이번 여정의 정점에 다다른다.
이제는 성취의 기쁨으로 꾹꾹 눈위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나아간다.
한 명의 낙오도 없이, 큰 탈 없이 모두가 정점에 도달한 것에 감사한 마음을 걸음 걸음에 새긴다.
며칠간의 쉽지 않은 일정이
앞서 걷는 조선생님의 모습에서 고스란이 느껴진다.
”또 한 번 이 곳 에 도 착 했 다.“
롯지는 초췌해진 모습이지만 성취의 만족감으로 빛나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그래 이거지. 뭐있나. 힘들었던만큼 기뻐해야지.”
그나저나 이제 큰일났다.
이 맛을 알게되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텐데.
마실정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