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0.26 ~1949.8.5 할보: 轄甫)
1863년 미국 버몬트(Vermont) 州 "뉴헤이븐"(New Haven)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버리 대학교"(Middlebury College)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고종(高宗)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 공원"의 운영과 교육 내용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한 "헐버트"는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는데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필수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5년동안 교사생활을 하다가 학교가 문을 닫자 귀국했다가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口傳)으로만 전하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했다.
"헐버트"는 평소에도 역사, 문화, 언어, 예술분야에 해박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의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한국 땅에서 머물며 선교사로, 교육자로, 언론인이자 저술가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아 최 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대한제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 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 활동을 하였고,
후에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순회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기회가 있을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루즈벨트의 대한 정책을 비판하며 한국을 잊지 않고 돕는데 앞장섰다.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대한제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 활동을 하였고 3.1 운동을 지지했다.
정부에서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를 중심으로 문서 선교에 관여하여 한국을 알리고,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학장을 맡았다.
또한 한국 토속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입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만들어 1896년 처음 세계에 소개하여 제1회 서울 아리랑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한글과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글 발전에 공헌하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그를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에 조성된 주시경 마당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이 같은 그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광복후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내한했지만 온지 일주일만에 86세의 노쇠한 육신으로 쓰러져 1949년 8월5일 세상을 떠났다.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윗면에는 "I M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 이라고 씌어 있고,
앞면에는
"천팔백육십삼년 일월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천구백사십구년팔월오일 서울에서 별세
선각자요 한국의 친우인
헐버트 박사의 묘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팔월십일일
헐버트 박사 장의 위원회 세움"
몇개의 파인 홈은 6.25때의 탄흔(彈痕)인듯하다.
묘비의 옆면에는 "묘비명"(墓碑銘)에 대한 이야기가 씌어 있다.
이 묘비는
본디 1949년 8월 11일의
영결식에 제막된 것으로서
이승만대통령께서 묘비면을
쓰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건국 초기의 어려움으로
새겨 넣지 못한 채
50년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자리에
그 분의 50주기를 맞이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새겨 넣는다.
1999년 8월 5일.
독립유공자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묘비 옆에 또하나의 기념비가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 풍의 신사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이곳에 잠들다."
헐버트 2세 "셀던 헐버트"(Sheldon Hulbert 1896.2~1897.3)의 묘.
"셀던 헐버트"의 묘는 A묘역 끝(A-57)에 있다.
그는 1896년 2월에 태어나 다음해인 1897년 3월에 죽어 양화진에 묻혔다.
"헐버트"는 1888년 9월, "한나"(May B. Hanna)와 결혼하였고,
부인은 2남 3녀의 자녀를 낳고, 1948년 11월 별세했다고 한다.
성장한 다른 아들 헐버트 2세인 "윌리엄 체스터"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6년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