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6> 정목 스님
일심의 지혜 증득해야 궁극의 깨달음 성취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진행중인 본지의 기획토론이 교단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정진의 길을 걷고있는 정목 스님과 재가불자 이종웅씨가 의견을 각각 보내왔다. 깨달음과 수행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이고,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입장에서 소개한다.
정목/ 양산 정토원
|
사진설명: 정목스님은 “염불수행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만 다를 뿐이지 일심(一心)의 바다에 나아가 동체대비심을 구현하고자 하는 대승불교 본래의 목적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기고문에서 강조했다. 사진은 염불수행중인 스님들. |
깨달음은 현실적으로 자아(自我)는 물론, 육경(六境)을 상대하면서 무아(無我)요 공(空)이라하고 육근(六根)으로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어야 고통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가? 소승과 대승을 막론하고 깨달음을 장애할 뿐 아니라, 모든 번뇌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무명이란 어떤 것이며, 무명을 비롯한 번뇌는 어떻게 소멸되고,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은 완성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무명이란 연기의 세계관 즉, 인연으로 생기하는 모든 법은 그 본질이 무아요 공이라는 도리를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意識)이다. 이러한 무명으로부터 모든 번뇌가 발생하고, 번뇌는 죄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일체 경계를 상대하면서 그것들이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탐진치(貪瞋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명마저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의 세계관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를 만나면 무명번뇌(無明煩惱)는 곧 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익혀 온 진리에 어긋난 관념 혹은 번뇌에 물든 의식이 어떤 계기를 만나 연기의 세계관으로 전환하면서 겪게 되는 ‘커다란 놀람’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으로 인해 지금까지 익혀 온 습관이 모조리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도록 물든 습성을 끊기 위해서는 육바라밀행과 회향의 실천이 요구된다.
만약 깨달음을 얻었지만 행위로 드러나지 않고 지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면, 자아(自我)가 경계(境界)를 이해하는 차원으로 10해(解)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머물러 있는 수행자이다. 이 경지는 번뇌가 멸진되지는 않았지만 범부의 경계를 뛰어넘어 대승에 들어서는 첫 관문을 뚫었으니 무척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으로써 행(行)하고, 회향(廻向)하여 일심을 증득할 수 있는 길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증득(證得)은 깨달음의 차원을 넘어 ‘일체 경계는 일심(一心)인 지혜’를 성취한 경지이다. 궁극의 깨달음인 일심(一心)의 증득(證得)은 의식적인 신해행(信解行)의 차원을 뛰어 넘어야 한다. 깨닫기 위해 관념적으로 쌓아 온 상아탑(象牙塔)이 무너지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아상(我相)과 더불어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도 부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객(主客)이 사라진 적정(寂靜)한 경지에서 일체 경계는 일심(一心)이라는 지혜를 얻는 순간을 증득이라고 말한다.
일심의 지혜를 증득하면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광대한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게 된다. 일심의 바다에서 증발심(證發心)으로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완성하고자 방편의 지혜로써 회향의 궁극에 이르면 마침내 성불(成佛)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말씀하신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행체계이다.
일심의 지혜 증득해야 궁극의 깨달음 성취
정토문의 염불수행은 해탈얻기 쉽도록 인도
반면에 어떤 사람은 본래공적(本來空寂)한 도리를 내세워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기도 한다. 단박의 깨달음으로 번뇌를 멸진(滅盡)하고 법신(法身)을 성취하여 수행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론 가능한 논리이며, 출가 장부의 신념이요, 희망일 수 있다. 누가 어떤 법을 주장하든지 깨달음을 성취하고 일심을 증득하는 것이 보리심의 꽃이요, 수행의 완성이라는 점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다만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깨달음! 돈오! 하고 외치는 한 편에 대부분 사람들은 번뇌와 죄업으로 고통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깨달음이나 법신이란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해결하기 어려운 번뇌에 불과할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이들에게 깨닫지 못한 죄를 추궁하겠는가? 범부에게 깨닫지 못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미혹한 범부가 구제받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새 것만을 찾는 사회심리를 따라서 새로운 법을 만들 것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일체중생이 구제되는 정토문의 염불수행을 바르게 펴 보여야 한다.
정토문의 염불수행은 부처님의 본원력에 힘입고 자비광명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기 쉽도록 인도한다. 무아(無我) 공(空) 무생(無生)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체험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윤회 없음’을 진실로 믿고 자신을 통째로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정토를 염원하는 그 마음에서 무아를 실현한다.
그러므로 염불수행에서는 믿음이 곧 생사해탈이다. 믿음으로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자비광명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 일심을 증득한다. 염불수행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만 다를 뿐이지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 동체대비심을 구현하고자 하는 대승불교 본래의 목적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어떤 수행문에서든지 깨달음을 논하면서 명심할 것은 ‘깨달음은 인가(認可)가 아니라 역사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 지혜로써 드러나는 행위의 흐름, 즉 자신의 역사가 말하고, 대중과 사회의 역사가 증명한다. 부처님이라 공경하고 보살이라 부르는 것 모두 그렇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논리적 지적 이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꽃은 지혜의 실천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정토는 보리심의 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종웅/ 울산시 남구 신정동
깨달음이란 중생심에서 깨어난 상황이다. 중생심이란 감성과 이성 곧 느낌과 분별지식이다. 생노병사 인생살이 전체가 중생심이 연출하는 꿈속 사정이요, 핵폭탄이 터지는 것도 꿈속에서 터지는 것일 뿐이니 죽어 없어져서 그렇게 끝나버리는 그런 것도 없다는 진실(완전)을 체험한 것을 깨달음이라 말한다. 생사대몽을 깨어난 상황이다.
깨달은 내용은 무엇인가를 꿈속의 이성적 이해로 말하건데 무변한 공간과 무시무종의 시간으로 전개 운행되는 우주는 본래로 완전임을 철견하는 지견을 말한다. 완전(完全)이란 개념되지 않는 개념이다.
불완전한 일체의 현상[有爲法]이 그대로 완전의 현현임을 살피게 되는 경지를 중관(中觀).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고 말한다. ‘유즉시무’요 ‘무즉시유’라. ‘비유이비무(非有而非無)’라고 설명하는 공(空)의 상황을 이성적 이해가 아닌 직관(直觀)으로 체달하는 경지이다.
수상행식하는 인식 ‘주관[我]’도 인식대상인 ‘객관[法]’도 공한[五蘊皆空] 진리의 근원인 완전에 계합된 지경이 삼매(三昧)다. 진짜는 인식으로 개념될 수 없는 완전인데 중생이 인지하는 유(有) 무(無) 생(生) 사(死)도 모든 모습은 가짜[凡所有相 皆是虛妄]라, 중생으로서의 내가 바로 진여(眞如)의 전인(全人)으로 윤회계에 여래임을 보게 된다[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깨달음이란 중생심서 깨어나는것
참선수행하기 전에 경전공부부터
이렇게 가짜인 진짜[眞如]를 개오[見性開悟]하여 스스로 여래임을 자각하고서 가짜 놀음을 진짜인 듯 연극하면서 영원히 자유로이 살자는 말이 모두 나요 우리임을 안타까이 여기시는[慈悲] 여래의 가르침이다.
보시바라밀도 나를 없애기 위해서 내 것이라는 소유를 먼저 떨쳐내는 일이요, 지계바라밀도 나를 이익되게 하려는 그 동기를 단속하여 나를 도모하지 말라는 그 뜻이요, 인욕바라밀도 내가 무너지지 않고 인정받고 싶고 손해 보지 않고 싶은 중생심을 녹여내는 인일 등 꿈속의 거짓 상황에서 깨어날 진실에로의 길이다.
육바라밀 가운데 지계는 승속 공동의 도덕이요, 지혜 또한 공동이 목적지이다. 빈도(貧道)로 화합대중 생활을 하는 승려에게는 보시할 재물도 다툼도 없는 것이 수행생활의 기본이니 일차적으로 보시와 인욕은 승려가 아닌 재가자의 도덕이다.
정진과 선정은 참선을 지칭하는 도목으로 스님의 도덕이다. 참선이란 소위 ‘활구경절문’으로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다 떨쳐버린 체 홀로 오로지 나아가는 불도 전업의 수행자인 스님에게 열려진 지름길[經截門]이다. 선정을 이루어 지혜를 성취하려는 활구참선은 지름길인 한편 지극히 위험스런 요인도 길목 도중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정안종사 선지식의 문하에서 참선하지 않는 한 외도의 길목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선각자들이 후학을 위해 참선의 지남으로 남긴 〈선문촬요〉도 〈선가귀감〉도 공부해야 하고, 최소한 〈금강경〉과 〈신심명〉 〈증도가〉는 한 구절도 빠짐없이 외울 듯 공부하여 문자선지식으로 숙지되어 있어야 할 일도 참선수행을 하는 스님에게 필수조건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72호/ 10월19일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