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등에 맺힌 땀방울이여
관악산 자락이 조금씩 조금씩 푸르러 갈 무렵이면 스님네와 신도님네의 손길이 빨라지고 거리에는 연등이 하나둘씩 내걸린다. 종로통에도 조계사 앞에도 아름다운 연동이 낮을 장식하고 밤을 밝힌다. 불구점마다 ‘부처님 오신 날’ 특수용품을 공급하느라 즐거운 비명이다. 우리 원각사도 신도들이 모여 예쁜 연등을 만들기에 바쁘다.
「해인」지로부터 몇 번이나 전화가 걸려온 모앙이지만 쉽게 연결이 되질 않았나보다.
‘이 시대에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 수행자들은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포교하며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 편집장 진각스님이 내게 청탁한 주제이자 내용이었다. 선뜻 허락은 해 놓고도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며칠을 끙끙대야만 했다. 벚꽃과 살구꽃이 온 도량을 하얗게 수놓고 게다가 노오란 개나리가 울타리 밑에서 봄을 노래하고 있다.
뙤똥나무꽃과 후박나무꽃 향기는 또 왜 그리도 진한지 일주문만 들어서면 온통 꽃향기로 가득하다. 그것도 거의 일 년 내내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이면 봄대로 여러 꽃이 피지만 여름이면 여름에 피는 꽃나무와 풀꽃들이 어우러지고 가을이면 국화와 단풍과 빠알간 감이 온통 도량을 장엄하고 겨울이면 또 가지마다 은색의 꽃송이가 소담스럽게 피어오른다. 얼마 전 입적한 창건주 양보리화 노보살님이 가꾸어 온 도량, 그래서 우리 원각사는 연등을 달지 않아도 연중무휴 그대로 화장장엄세계다. 내가 원각사를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대에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면 하는 주제 자체가 불필요한 말이면서도 또한 이 땅의 모든 중생들의 갈망을 대신 표현할 말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말이란, 부처님은 본디 오고감이 없으신 분이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부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며 공간을 뛰어넘어 우주에 충만한 분이며 중생들의 근기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아마 어쩌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찬미하느라 우리 도량내의 저 풀꽃도 꽃나무도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고 있는 것이리라.
부처님을 ꡐ청하지 않는 벗’ 이라고 한다.
일부러 청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 곳에 다가가 그를 위해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분이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무연자비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태양은 청하지 않는 벗이 되어 무연자비를 베풀고 있다.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모든 생명들에게서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가져다주며 생장과 숙살을 통해 이익을 베푸는 것이다. 공기 (산소)도 청하지 않는 벗이 되어 무연자비를 베풀고 있다.
우리는 한순간도 산소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물도 또한 청하지 않는 벗이 되어 무연자비를 실천하고 있다. 물이 없으면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무연자비와 청하지 않는 벗의 특징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떠났고 사랑과 미움올 뛰어 넘었으며 사량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답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하여 태양과 공기와 물이
더 많이 사랑을 베푸는 것도 아니고 추하고 밉고 증오스럽다하여 태양이나 공기가 스스로 베풀어야 할 양을 줄여서 베푸는 일이 없다. 상대를 떠나 고르게 베푸는 자, 고르게 이익을 주는 자가 청하지 않는 벗이고 무연자비의 실천자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어떠한가.
태양이 끊임없이, 그리고 분별하지 않고 그 밝은 빛을 비추어 주듯 부처님의 무연자비도 중생의 아릅답고, 추하고, 좋고, 더러움을 떠나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고 계신다. 하지만 그 태양열을 이용하고 방치함은 중생에게 달려 있지 태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과학에서는 태양열을 이용하여 우리의 실생활에 여러 가지 도움을 준다. 물이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모든 생명들에게 고르게 주어지지만 그 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슬기로운 자는 그 물을 잘 저장하였다가 가뭄이 계속될 때 활용한다. 달은 구별없이 어디에나 비추지만 그 달을 소유하려면 그릇에 물을 담는 노력이 필요하고,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프로그램도 그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기기가 있어야 우리의 실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하이텔이나 데이콤(천리안)에 수많은 정보가 쌓여있더라도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단말기와 그에 상용하는 대가와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아무리 부처님의 무연자비와 청하지 않는 벗의 공덕이 끊임없이 우리들 주변에 함께 하더라도 그 공덕과 가피를 받을 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이 수행에는 여러 가지 덕목이 있다.
계율을 외고 그것을 지켜가는 율사들의 삶도 있을 것이고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과 조사들의 어록과 대소승 논사들의 논문을 연구하고 전해가는 학자, 법사, 경사들의 삶도 있을 것이며, 염불과 기도로 정진하는 삶도 있을 것이고 가람수호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주지, 원주 스님네의 삶도 있을 것이다.
또 화두 하나에 생사를 걸고 불철주야 정진하는 선객들의 삶도 있을 것이며 불상을 조성하고 불화를 그리며 수행하는 아티스트(불모)들의 삶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가 아니다 수행자로서 표현하기가 좀 뭣하긴 하지만 늘씬한 몸매를 지닌 여인도 아니다. 그런 것은 언젠가는 다 스러져 갈 허상일 뿐이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 내가 가장 사랑하고픈 사람은 콧등에 땀방울을 매달고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가나오나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언제 어디서고 늘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고 염불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가나오나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언제 어디서고 늘 기도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 삶에는 육바리밀이 갖추어져 있다. 자기 일에 충실한 수행자에게 베푸는 마음이 있고 계율을 실천하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다. 인욕도 정진도 선정과 지혜도 따로따로 닦아야 하는 덕목이 아니라 하나를 완전하게 할 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래서 모든 것을 뒤섞어 놓은 범벅론이 될 수도 있겠지만 범벅은 범벅대로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비로운 그 손길이 참다운 불심구요
너그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속들이 곱디고운 어여쁜 그 심성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ꡑ
하는 노래말이 있듯 하나속에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바라밀을 온전하게 닦는다면 그 속에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경전을 번역하는 사람은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자연히 계는 갖추어지고 인욕도 하게 되고 정진은 물론 선정과 지혜와 보시바라밀까지 모두 함께 닦게 된다.
가람을 수호하거나 수필이나 시나 소설을 쓰거나 경전을 연구하거나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주력을 하고 포교를 하고 개혁 불사를 하고 그 무엇을 하든 오로지 그 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할 때 거기에 온갖 바라밀이 갖추어진다.
콧등에 땀방울이 맺힌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땀방울이란 육체적 노동을 할 때 흘리는 물리적 생리적 현상이지만 그 땀방울에 배어 있는 의미는 참다운 바라밀의 실천을 뜻한다. 우리 절집안에서 ‘비구가 땀을 흘리면 어쩌구저쩌구ꡑ 하는 말이 사실은 불교를 쇠퇴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본디 오감이 없고 앉고 누움이 없고 고정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부처님의 실체를 알기 전까지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고, 만일 현실적으로 이 시대에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일까.
법당의 탁자위에 모셔진 분처럼 근엄하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콧등에 땀방울 맺혀 있는 모습일까. 아니, 부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인가.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시며 어떤 가르침을 펼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땅 오탁악세에 부처님을 다시 오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부처님을 이 시대, 이 땅에 다시 오시게끔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 없이 부처님은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자기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조계종단의 개혁이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해주는 등불이다. 같은 햇빛과 공기와 수분을 섭취하면서도 개나리는 노랗게 , 철쭉과 진달래는 붉게, 벚꽃, 살구꽃은 하얀꽃을 피워낸다. 모두 제가끔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창 열고 바라보니 푸른 후박나무 가지 사이로 노랑나비, 흰나비가 더불어 난다.
첫댓글 글을 올려준 카페지기 실린달 보살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