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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금강산(내금강) 여행 2007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첫째 날
금강산이 개방되어 관광이 시작된 것이 금년에 10년째라 한다. 금강산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해 한 번도 안 갔는데 이번에 59년 만에 내금강이 개방되었다고 해서 관광대열에 끼어 보았다.
새벽 5시 광주역에서 출발하여 금강산으로 향했다. 속초 설악동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속초의 외곽도로를 따라 가는데 설악산 전체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7-8개의 설악산봉우리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영암을 향해 가면 월출산이 전부보이는 것과 같았다. 처음으로 설악산 전체를 바라보았다. 동해바다를 많이 보면서 가는 것도 흐뭇했다.
13시경 금강산 출입 티켓을 받는 고성에 있는 현대아산휴게소에 도착했다. 목에 걸고 다녀야 되는 관광증을 받은 후 북한으로 들어가는 동해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 가서 남측과 북측에 출입국절차를 밟고 15시경에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사무소에서 절차를 거친 후 북한 땅에서 운행되는 현대아산의 버스로 바꾸어 타고 가는데 아무런 제지도 없고 그대로 북녘 땅으로 들어가니 북한에 가는 것이 너무 쉬운 것 같았다. 무표정한 인민군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것이 북한 땅의 표시였다.
맨 먼저 순 바위산으로 된 낙타봉이 눈앞에 바로 나타났다. 금강산의 12001번째 봉우리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고 도로 양옆으로는 철조망으로 된 울타리가 처져 있고 영산강변에 있는 것 같은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직 가로등은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훗날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4시경 온정리에 도착했다. 넓은광장이 있는 온정리는 금강산으로 빙 둘려 있었다. 흐린 날씨로 구름이 약간 끼인 봉우리도 있었지만 대체로 산봉우리들이 잘 보였다. 숙소 배정을 받아 짐을 풀고, 곧 이어 4시 30분부터 6시까지 교예공연을 관람했다.
우리는 보통 써거스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그쪽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했다. 수준 높은 예술이기 때문에 교예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세계경연대회에 나가서 최고상을 많이 받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예술단이라고 자랑했다.
TV를 통해서 더러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그 묘기들이 너무너무 놀라웠다. 인간이 몸으로 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자꾸 생각되어졌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가 아닐까 싶었다. 한참 보고 있다가 내 입이 벌어져있는 것을 느꼈고,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한없이 위험스럽기만 한 묘기를 보일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안쓰러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나게 한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나중에 밖에 나왔을 때 가이드가 울고 나오신 분들도 있을 거라고 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거기 출연자들은 돈 많이 받고 아주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일행 중에 한사람은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으면 저렇게 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인민군들도 저렇게 할 정도로 훈련할거라고 한다. 너무 생각이 비약하는 것 같았다. 보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교예관람 후 저녁식사를 했다. 뷔페식으로 괜찮았다. 식사 후는 자유 시간이었다. 식당 옆에 있는 선물가게에 먼저 들어가 보니 별 것이 없었다. 배정된 방에 들어가 일찍 쉬기로 했다. 숙소는 콘테이너를 개조한 것 같은 건물로 원룸이고 4인이 사용하도록 해 주었지만 나와 같이 배정받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행을 찾아갔기에 일행이 없는 나에게는 독방차지가 되었다. 7-8명이 사용하기에도 넉넉한 방이어서 끼리끼리 모이는 것 같았다. 방안에는 냉장고와 TV가 있고 전기난방에 에어컨도 갖추어져 있었다. TV를 켜니 우리 방송이 잘 나왔다. 뉴스도 드라마도 모두 볼 수 있었다. 뉴스에서 광주에 비가 55mm 왔다고 했다. 하지만 금강산은 비가 오지 않았고 2박 3일 동안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아주 좋았다. 숙소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별도 건물에 있는 것이 다소 불편했다. 북한에서의 첫날밤이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둘째 날
아침 6시 30분에 식사를 하고 8시에 내금강을 향해 출발했다. 온정리에서 내금강까지 46km 거리인데 두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형버스가 다닐 수 없게 굴곡이 심하고 험한 산길이다. 35인승 소형버스만이 다녔다. 도로변에는 반듯반듯하게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미인송이라고 했다. 나무가 곧게 자라서 몸매가 예쁘고 얼굴도 예쁘다는 것이다.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가지가 길지 않고 짧게 자란다고 한다. 가지에 눈이 얹히면 꺾이기 때문에 짧게 자란다는 것이다. 날씬한 모습그대로 미인송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맨 앞에 인민군 선도차가 가고 10대의 버스가 그 뒤를 따랐다. 각 버스에 북한안내원이 2명씩 탑승하여 안내를 맡아 주었다. 우리 차에도 남자 1명과 여자 1명이 동승했다. 관음정봉과 만물상 사이를 구불구불 따라 올라가면서 남녀가 교대해 가면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반갑습니다’를 합창하자고도 했다. 문필봉, 수정봉, 곰바위, 눈꽃바위 등을 설명하면서 금강산에 얼킨 전설들을 이야기하다가 노래를 불러주다가 한다. 금강산은 불교와 관련된 전설들이 많았다. 김삿갓 이야기, 서화담 이야기, 김홍도에 대한 이야기, 여러 임금들, 원님들과 얼킨 이야기들도 많았다. 두 시간동안 쉬지 않고 교대해 가면서 이야기 하고 노래를 불러주고 했다. 여자가 주로 노래를 많이 불렀다. 찔레꽃, 두만강, 고향의 봄 등 남쪽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북쪽노래라고 하면서 불러도 준다. 하라고도 안 하는데 계속 하니까 측은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일행은 별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북쪽 안내원이 오기 전에 주의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도 맞추지 말고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갈 때는 모두 긴장한 채였다.
808m라고 하는 고개정상에 오르니 온정령이라고 하면서 터널이 나타났다. 터널을 통과하니 비포장도로이다. 30분 정도 올라오는 길은 세멘포장길이었다. 앞으로 1시간 반은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고개 길을 내려가서 들판과 마을들을 지나갔다. 여기저기에 수해로 입은 피해현장이 눈에 보였다. 금강이라고 한 강이 도로를 따라가는데 비가 많이 와서 사람도 함께 떠내려갔다고도 했다. 도로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7,8명이 돌을 쌓고 세멘을 이겨서 삽으로 떠 붙고 있었다. 들에는 가끔 사람이 보였고 마을들에는 별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군사시설도 몇 군데 보였다. 5대의 군용트럭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한 대에서는 하얀 연기가 나고 있어서 이상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목탄차라고 했다. 100여 년 전에 구 쏘련군이 쓰던 목탄차가 지금 북한에서 굴러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분명이 연기가 나는 트럭을 본 것은 사실이다.
소를 두 마리 보았고, 하얀 염소 떼가 10여 마리씩 들판에 있는 것을 두 번 봤다. 흑염소는 없었다. 읍소재지(금강읍)를 지나가기도 했다. 충충한 세멘벽돌건물들이 제법 있었다. 우리와 같은 승용차 같은 것은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민군들이 있는 곳에도 자전거가 여러 대 세워져 있기도 했다. 북한의 모든 모습을 공개한 것 같았다. 대단한 용기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에는 크거나 작거나 할 것 없이 직사각형모양의 기둥 같은 탑과 그 옆에 커다란 게시판 같은 것이 잘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자동차가 그 탑 바로 옆을 지나갈 때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붉은색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세로로 두 줄이 새겨져 있고 게시판에는 김일성이 여인을 격려하는 모습이나. 또는 혼자 어딘가 가르치고 있거나하는 여러 모습들을 그려놓은 것이었다. 김일성의 추모탑이라 했다. 도로변에도 비석같이 세워진 돌기둥에 ‘군민일치’니 ‘일치단결’이니 하는 말들을 새겨 세워 놓았다. 볼품없는 허름한 돌들이다. 내금강에는 바위에다가도 무슨 구호 같은 것이 많이 새겨져 있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 글들을 새겨 놓은 조형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통일이 되면 아무 필요도 없을 것을 다 어떻게 해야될까하는 괜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두 시간이 지나 내금강등산로 입구인 표훈사주차장에 도착했다. 금강산의 4대 사찰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세 군데는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산행길이는 약3km의 거리로 왕복하는데 2시간 정도 걸렸다. 표훈사 경내를 지나 두 개의 바위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 같은 금강문을 지나 완만한 길을 올라갔다. 계곡물이 깨끗했다. 침을 뱉어도 안 되고 손발을 물에 담가도 안 된다고 했다. 물을 떠 오는 것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니까 식수로 쓰라는 것이었다. 뱀사골이 생각났다.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작은 폭포가 있고 웅덩이가 많았으며 웅덩이 이름이 붙은 것들도 있었다. 묘길상까지 갔다. 큰 바위에 커다랗게 부처님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절을 하며 불전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았다. 절벽에 세워진 보덕암은 신기했다. 우리 TV에 소개된 것을 한 번 본적이 있지만 실제로 가서 보니 너무 신기했다. 절벽에 기둥을 받쳐서 지어 놓은 방 한 칸 정도의 암자로 단층인데 지붕은 삼층으로 만들어 놓았다.
단풍리라는 마을을 지나 갈 때는 부녀자들 3,40명이 한복을 입고 춤을 추며 놀고 있었다. 무슨 좋은 기념일이어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있다고 했다. 쇼인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 내금강 관광객이 지나가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진 쇼 같았다. 현재까지는 내금강은 하루에 한번 버스 열대만 관광할 수 있다고 했다.
산행에는 우리 안내원과 북한쪽 안내원들이 모두 함께 했다. 안내원들이 중간 중간에 서 있으면서 설명도 해 주고 안내도 했다. 북쪽 안내원들은 담당구역이 모두 있는 듯 했다. 내려오다가 우리 차에 함께 탔던 여자안내원을 만났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긴장되어 있는 거냐고 나에게 묻기에, 오면서 하도 주의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오래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잠시 몇 마디 나누고 하산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바로 그 여자의 뒤에 앉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여자가 설명하거나 순서를 맡으면 기다리고 남자가 순서를 맡으면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가족관계를 비롯해서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재미있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디카 카메라를 보면서 얼마짜리냐고 묻기에 300불 정도라고 했다. 금강산에서는 물건 값이나 모든 돈에 관한 것은 딸라로 했다. 1불을 무조건 천원으로 계산해서 한국 돈도 그대로 쓰였지만 표시는 전부 딸라였다. 북한 사람들도 딸라로 잘 이해했다. 내가 딸이 삼성전자에 근무한다고 하면서 딸이 준 카메라라고 했더니 딸이 한 달에 얼마나 받기에 그런 비싼 것을 주느냐고 한다. 그래서 한 달에 이 카메라 열 개정도 살 수 있는 월급을 받는다고 했더니 입을 크게 벌리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마른 체격이지만 얼굴이 예쁘장했고 자기의 형제는 육남매이고, 어머니는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으며 자기는 딸딸이 엄마라고 했다. 딸이 둘 있다는 것이다. 아무 스스럼없는 친해진 두 사람의 대화 그대로였고 측은 하면서도 정드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허물이 없는데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길며 어렵기만 한 것이냐고 서로 이야기했다.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 자기가 내 딸이 되어 금강산 12,000봉을 전부 안내해 줄테니 늙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통일이 되는 날에 만나게 될 딸 하나를 북쪽에 두고 왔다. 온정리 마을에서 산다고 했다. 마침 가지고 간 딸라가 있어서 40불을 손에 가만히 쥐어 주었더니 감사하다고 잘 쓰겠다고 하면서 받아갔다.
북쪽에서 가장 염려하는 것이 남쪽 사람들과 만나는 사람들이 물드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안내원들만은 이미 물이 다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금강 곳곳에서 남과 북의 사람들이 어울려 이야기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북쪽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아쉬었다.
내금강은 전나무 숲이 좋았다. 울창한 전나무들이 즐비했다. 정양사, 장안사 등 터만 남은 절터들을 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내금강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도 두 시간 내내 안내원들이 열심히 설명을 하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여자가 노래 여섯 곡을 계속 부르기에 좀 쉬라고 하면서 내가 답례로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고 했더니, 마이크를 주기에, 노래 한곡을 하고 다음에 또 한 사람을 시켜 부르게 하고, 그 사람이 또 지명해서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게 하니 우리판이 될 상황이 되어갔다. 그러니까 남자안내원이 얼른 마이크를 잡고 자기 이야기를 했다. 우리에게 마이크를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정리로 돌아 온 우리는 곧 온천욕을 했다. 게루마늄 온천이라고 했다. 개운한 몸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두 번째 밤을 맞이했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의 합창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나이트가 있는 곳 주변은 환했다. 온정리는 북한 속에 있는 온전한 대한민국임을 알 수 있는 밤이었다.
*셋째 날
8시 15분 온정리를 출발하여 만물상으로 향했다. 어제 내금강에 갔던 길이었다. 온정령굴 못 미쳐서 만물상으로 오르는 입구가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다. 만물상 산신령이 우리가 몹시 보고 싶어서 날씨를 좋게 한 것 같다고 가이드가 조크한다.
만물상은 원래이름은 오봉산이었다고 한다. 봉우리가 다섯 개인 것이다. 정상은 두 군데였다. 둘 중에 한 군데만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해발 1,042m인 망향대로 갔다. 해발 936m인 천선대와 갈림길에서 망향대까지는 30분, 천선대까지는 15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망향대에 오르니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 왔다. 만물상 바로 아래를 하얗게 물보라를 치며 바다가 부딪치고 있다. 주변경관도 너무 좋다.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오래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아쉬었다. 말이나 글로 그 경치를 다 설명하라고 한다면 경치를 모욕하는 것이 될 것 같다. 직접 눈으로 가서 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느 시대인가 임금이 신하에게 금강산을 물을 때 직접 가서 보시라는 말밖에 할 것이 없다고 했다는 말도 전해 온다고 했다. 금강산은 만물상 때문에 더욱 유명한 것 같다. 세계 곳곳에 금강산보다 더 아름다운 산도 많이 있다. 중국,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등지에서 아름다운 산을 나도 보고 다닌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직접 산에 올라서서 보기는 처음이다.
망향대에서 내려오니 시간 여유가 많아서 다시 천선대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더 가깝다고 천선대쪽으로 몰려 있었다. 80도 정도의 급경사를 이루는 철사다리가 100m이상 될 것 같은 곳에 사람들이 빈틈이 없이 늘어 서 있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더디게 오르다보니 정상까지 가는데 망향대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한 군데만 갔다가 오라고 했는데 두 군데를 다 간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하산 길은 따로 있어서 되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대로 따라 올라 갔다가 하산 길은 빨리 내려올 수가 있어서 서둘러 내려왔다.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고 여유 있게 내려왔다. 우리 일행 중에 두 군데 다 갔다 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려와서 이야기하니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온정리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금강산을 떠났다.
해외에 다녀온 것과 똑같이 면역검사서, 세관신고서도 작성 제출하면서 출입국절차를 밟고 남쪽으로 오니 전혀 딴 세상에 갔다 온 기분이었다. 너무나 초라하고 꾀재재한 북한의 모습들을 보고 온 탓에 밝고 환한 남한의 모습이 새삼 새로움을 주기도 했다.
정치가 잘못되어 희생당하고 있는 북한의 우리 동포들을 하루 빨리 구해내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를 안겨주어야 할텐데 남한의 정치에도 크게 기대가 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해야 될까요?
2박3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게 해 주었는데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도 고민해 보아야할 것 같다.
★중국 황산에 다녀온 이야기 2008. 4. 23(수) - 26(토)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3박4일 중국여행은 한마디로 아주 좋았다. 1990년 12월에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인정한 황산을 본 것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행복하게 할 것 같았다. 또 보고 다시보고 한없이 바라보고만 싶은 산에 다녀온 기행문을 써 두고 자꾸 읽어보면서 좋았던 감정을 오래오래 간직해 보려고 한다.
첫날 오후 4시 광주광천터미널에서 37명이 만나 무안공항으로 향했다. 무안공항에서 오후 6시20분 출발예정인 전세기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深川(심천)항공 비행기가 지연되어 오후 7시에 출발하게 되었다. 비행기의 창가에 자리를 배정받아 창밖의 야경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항주에 가까워지면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거리가 모두 일직선으로 반듯반듯하게 보였다. 아마 가로등을 켜 놓은 거리들인 것 같았는데 길게 일직선으로 된 도로가 많이 보이는 것이 좋게 보였다. 2시간 정도의 비행 후에 중국 절강성의 중심도시인 항주의 호산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마중 나온 가이드를 바로만나 안내를 받으며 관광을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 37명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6호차에 14명, 7호차에 23명으로 나뉘어서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나는 6호차에 배정되었다. 우리 팀의 가이드는 윤씨 성을 가진 교포 3세로 함경북도가 할아버지의 고향이라고 했다.
가이드의 첫 인사 중에 여러분은 차이나에 왔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한국과 중국이 바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차이나라는 것이다. 차이가 난 곳에서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이드를 만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밤 9시(한국시간은 10시)가 가까워서였는데 한군데 관광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항주시내 오산의 꼭대기에 있는 성황각이라는 누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림으로 본 듯한 낯설지 않은 탑 모양의 7층짜리 건물이었다. 4층까지 아주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후 걸어서 맨 위까지 올라갔다. 건물들이 내려다보이고 호수와 강이 보이는데 희미했다. 서호와 605km의 길이로 항주시내를 통과하는 전당강이 보였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건물들 사이로는 나무가 많았다. 도시의 40%가 녹화되어 있다고 했다. 성황각은 높이 41.6m로 송나라 때에 건축된 건물이며 역사적인 유물과 사연들이 깃든 곳이라 한다. 밤인데도 관람객이 많고 복잡했다.
탑에서 내려와 곧 시장의 야경을 보았다. 性河거리라고 한 곳의 야경이었다. 도로의 양쪽과 중앙에 각종 가게들이 있고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였다.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해 가다가 과일들이 화려하게 진열된 가게에서 가이드가 바나나 두 개와 사과 한 개씩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사서 나누어주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손님은 가이드를 잘 만나야 되고, 가이드는 손님을 잘 만나야 되고, 날씨가 뒷받침 해 주는 것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여행에서 우리 팀은 세 가지가 다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 일행도 동의했다. 밤 12시가 넘어 호텔에 도착하므로 첫날의 일과가 끝났다.
24일 두 번 째날 집을 떠난 탓인지 간밤에 다소 잠을 설쳤지만 아침 6시 30분부터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식사를 하고 7시 15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황산으로 향했다. 밝게 해가 뜬 맑은 아침에 출발한 우리는 모두 기분이 좋았다. 황산을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서였다. 흔치 않은 참으로 좋은 날씨라고 했다. 가이드가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분들이 오신 것 같다고 했다. 항주시내의 도로들은 넓고 꽃길로 잘 단장되어 있었다. 시내를 통과하는 전당강은 한강보다 더 큰 강인 듯했다. 전당1교를 건너 시외로 나갔다. 전당1교는 순수하게 중국의 기술로 중국인들이 3년여에 걸쳐 놓은 다리인데 일본인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파괴했다가 1949년에 다시 건설된 다리라고 한다. 당시 이 다리를 설계한 사람은 중국 최고의 건축가였는데 파괴할 때 그 사람의 손으로 직접폭파를 했고 다시 건설할 때에도 역시 그 사람의 설계에 의했다고 한다. 다리 건너 강 옆에 우뚝 솟은 탑이 있었다. 항주의 상징이라는 六和탑으로 동서남북천지가 함께 전당강의 역류를 막아달라는 기원으로 970년에 건립된 목조 13층탑이다. 전당강은 하류가 좁아서 한 번씩 역류현상이 발생하고 그 때마다 피해가 컸기 때문이란다.
항주에서 황산까지는 4차선고속도로였다. 300km가 조금 못된 거리이다. 고속도로 좌우는 산간지대였다. 높은 산들이 시야에 많이 나타났다. 시간이 있다면 오르고 싶은 아름다운 산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평지가 드물고 산을 개간해서 유채와 차나무를 심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곳은 산꼭대기까지 사람이 사는 집이 보이고 유채가 심어져 있었다. 유채천지였다. 유채기름을 많이 먹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아마 중국인 전체가 다 먹을 수 있는 유채가 이곳에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보았다. 휴게소가 한군데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휴게소가 몇 군데 더 있을 거리이다. 해외에 다녀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먹고 잘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에도 중국의 여러 지역을 통과했지만 도시 지역 외에서는 호텔이니, 가든이니, 모텔이니 하는 것들을 하나도 본적이 없다. 버스 안에서, 이 나라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고속도로도 한가했다. 자동차가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많은 돈을 드려 건설된 도로의 활용도가 이러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앞에 가는 차가 전혀 없거나 두세대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산업도로가 아니고 관광도로 역할 정도하는 도로이고 이제 개통 된지 얼마 안 되어서 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도로주변의 주택에는 거의 전부가 태양열시설이 되어 있었다. 난방문제는 태양열을 이용해서 해결하는 것 같았다. 황산에 가까워지면서는 터널도 많았다. 4시간 반 정도를 달려 황산시내에 도착했다.
먼저 점심을 먹고 가까운 곳에 있는 ‘와호장룡’의 촬영지로 알려진 비취계곡에 갔다. 지리산을 비롯한 좋은 계곡이 많은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고 별로 신기한 것은 없었다. 바위와 비취빛을 발하는 웅덩이들이 깨끗하게 보였다. 입구에 장사들이 많았다. 나무로 깎은 지팡이 한 개 천원, 하다가 나중에는 두 개, 세 개까지 천원에 준다고 했다. 물건을 손에 들고 천원을 외치는 소리가 많았다.
황산을 보기 위해 시간을 아껴야할 형편이기에 비취계곡의 하이라이트라는 쌍폭포로 된 녹두지폭포가 있는 곳까지만 다녀왔다. 계곡의 전체길이는 6km나 된다고 했다.
버스에 올라 황산시내를 지나 케이블카를 타야 될 운곡사로 향했다. 지리산 성삼재를 오르는 길보다 훨씬 더 구불구불하고 먼 길을 올라갔다. 주변의 산이 온통 대나무 숲으로 덮여 있다. 엄청나게 커다란 죽순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였다. 온 산이 대나무 숲으로 된 것은 처음 보았다. 기후가 따뜻하기 때문이라 한다.
해발 850m지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2808m의 거리를 8-10분간 가서 1740m지점인 백아령 아래까지 올라갔다. 케이블카가 출발하면서부터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강산이 큰할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아름다운 황산의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시야에 펼쳐진 것이다. 사진 찍기가 바빠졌다. 한번 찍고 조금 오르면 더 좋은 곳들이 자꾸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버스 안에서 두 번째 황산에 온다는 김 영순 총무가 월출산과 도봉산 북한산을 합쳐서 생각하면 될 거라 한 말이 오히려 부족할 것 같았다. 어디에 아름다운 산이 있다면 더 가져다가 다 합쳐야 될 것만 같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우리일행은 등산로를 두 군데로 나누면서 A, B조로 두 팀을 만들었다. 나는 A조를 따라갔다. 백아령에서 곧바로 배운정으로 가서 서해대협곡을 가는 코스였다. 황산의 가장 아름다운 곳인 서해대협곡을 다 다닐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기위한 선택이었다. 황산은 넓이가 54만 평방킬로미터이고 36개의 큰 봉우리와 36개의 작은 봉우리, 합 72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다고 한다.
황산의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산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우리의 기분도 황산만큼 좋은 것 같았다. 황산의 5대명품은 소나무, 바위, 운해, 온천, 그리고 설경이라고 한다. 기암괴석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아름다운 바위들의 모습, 바위마다에 만들어진 소나무 분재들, 보고 또 보고 싶은 안아주고 싶은 소나무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다. 서해대협곡을 오르고 내려가고를 반복하면서 입이 벌어지고, 연신 탄성이 나오고, 서로 옆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저기를 보라고 한다. 명품 중에 바위와 소나무들을 마음껏 보는 듯했다. 사람들도 많았다. 굽이굽이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돌계단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든 등산로는 돌계단이었다. 계단의 수가 18만개라고도 하고 20만개라고도 했다. 계단이 많아 위험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황산은 걸으면서 보지 말고, 보면서 걷지 말라고 한다고 했다. 멈추어 서서 보라는 것이다. 등소평이 황산에 와서 보고 남녀노소 모두가 와 볼 수 있게 등산로를 만들라는 지시를 해서 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계단으로 되었기에 체력만 따라주면 급경사 길도 누구나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지금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곳도 있었다. 무거운 짐을 긴 막대의 양쪽에 매달고 운반하는 인부들이 있었다. 기본이 100kg이라 했다. 두꺼운 대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지고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름다운 황산에서 보게 되는 안타까움이었다. 전혀 기계가 사용되지 않는 원시적인 방법의 노동의 모습이었다. 불쌍한 마음에서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운해와 외국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는 온천, 그리고 겨울이 아니어서 볼 수 없는 설경은 짐작만 해야 되었다.
산위에는 5개의 호텔이 있었다. 우리는 서해빈관이 숙소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야경이 보고 싶어 밖으로 나오니 조명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캄캄했다. 아쉬움을 앉고 방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산위 호텔방에서 잠을 잘 자고 세 번 째날 아침 일찍 해돋이를 보기위해 숙소에서 1km쯤 떨어진 단하봉에 올랐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올랐다. 동쪽하늘이 밝아졌지만 구름 때문에 솟아오르는 해를 볼 수가 없었다. 환해지는 하늘을 보며 짐작만 하고 내려와야 했다. 내려오면서 문득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솜씨를 보면서 내 입에서 왜 찬양이 나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도착해서부터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십자가 하나 보이지 않은 거리를 왔기에 내 마음의 신심도 없어졌나보다. 먼저 감사해야 될 일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소리쳐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 틈에서 소리를 낼 수가 없어 휘파람을 불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 하여라 할렐루야----’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전날 B조가 다닌 코스를 우리는 역으로 갔다. 하늘을 나를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비래석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 황산의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인 광명정(1860m)에 올랐다. 축구공모양의 동그란 시설이 지붕위에 크게 놓인 천문대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통신시설이 있는 봉우리였다. 바라다 보이는 산들의 절경은 그대로이고 아름다움은 변화가 없는데 나의 감정은 그사이 많이 무디어져 있었다. 전날과 같은 탄성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제법 눈에 익숙해진 경관이 되어 있었다. 연속 3일간을 왔다는 가이드는 황산이 징그럽다고 했다. 아름다움도 맨 처음 볼 때가 가장 좋고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그 강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첫눈에 반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광명정에서 백아령으로 내려와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했다. 마지막으로 황산을 더 보려고 케이블카 안에서 열심히 눈을 돌려가며 아쉬운 마음을 접어야 했다. 황산에서 황산시내까지 고속도로는 작년 10월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전에는 2시간 30분이 걸렸는데 고속도로 덕택에 40분정도가 소요되었다. 황산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실크공장과 보석류를 판매하는 가게 두 군데 쇼핑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항주로 향했다. 황산의 기를 많이 받고 돌아오는 우리들의 모습이 많이 젊어졌다고 가이드가 조크 했다.
황산을 떠나오는 마음이 아쉬우면서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소원성취를 했기 때문일까, 험한 산을 무사히 다녀왔다는 자부심에서일까, 아니면 집에 갈 날이 가까워지기 때문일까,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황산을 떠나면서 또 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세계 여러 곳에 아름다운 곳이 많이 있으니 황산은 그만 오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른 곳에 가겠다고 했다.
바쁘게 서둘러 항주에 도착한 우리는 곧 영은사로 향했다. 문 닦기 전에 영은사 관광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도로가 막혔다. 영은사 가는 길에는 차가 많았다. 도로변에도 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가 탄차를 운전하는 기사의 솜씨가 위험했다. 바짝 옆으로 차들이 달려오고, 자전거에 부딪칠 것 같기도 하고, 차가 오고 있는데도 회전을 하고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시간 안에 영은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영은사는 중국의 10대 사찰 중에 세 번째로 큰 사찰이며 326년에 창건되어 전성기에는 승려의 수가 3000여명이었다고 한다. 입구 바위에 336개의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우리는 사천문, 미륵불(달마), 대웅보전(천안문보다 0.1m낮은 33.6m로 19m높이의 진흙으로 만들어진 석가모니불상이 있음. 뒤쪽에 지장보살이 있음), 약사전, 500나한전(동으로 제작된 불상들) 등을 수박겉핥기식으로 돌아보았다.
영은사에서 나와 녹차가게에 들려 쇼핑을 하고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항주의 4대 요리에 속한다는 동파육과 거지닭을 맛보는 식사였다. 동파육은 소동파가 항주의 성주로 있을 때 서호의 제방을 쌓는 인부들에게 먹이기 위해 돼지고기와 불을 섞어서 만든 요리라 하며, 거지닭은 임금이 순시 중에 거지들이 맛있게 해 먹는 요리를 보고 궁중에서 흉내를 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요리라 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안 먹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맛있게 잘 먹었다.
저년을 먹은 후 송성가무쇼(宋城千古情)를 보기위해 송나라시대를 연상케 한다는 민속촌으로 이동했다. 항주가 옛 송나라의 수도였기에 그 유적이 많이 있는 곳이다. 송나라시대의 복장을 하고 장사하는 가게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1000년이 되었다는 향장목이 있고, 염소와 원숭이를 가지고 동물 쇼를 하는 곳도 있었으며, 사진촬영을 위해 宋城이라는 높은 벽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거리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쇼를 보러갔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큰 홀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형화면과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는 쇼가 장관이었다. 레이저를 이용한 빛의 향연이 곁들여졌다. 송나라시대의 옛 모습을 재연하는 각종테마의 공연인데 북한의 교예라는 써거스를 연상케 하는 절묘한 묘기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황산을 보면서 자연의 한계가 어디일까를 생각했고, 쇼를 보면서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게 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도, 인간의 재능도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쇼를 보고난 후 발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1시간여의 발 마사지는 매우 흡족했다.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우리의 답례가 적다는 생각이었다. 규정대로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고 싶은 마음들이었다. 호텔에 들어가니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넷째 날 아침. 우리 일행들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산에 다닌 것과는 다른 복장을 하고 나오니 여자들의 옷이 새뜻해지고 많이 예뻐져 있었다. 오전에 서호에 가서 유람선을 타는 마지막 일정만 남았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9시경 서호로 이동했다. 유람선을 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자그마한 유람선에 우리 일행만 탔다.
서호의 유람선에는 화장실이 없고 배는 밧대리를 이용해서 움직인다고 한다. 호수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음식점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곳 한군데뿐으로 귀한 손님이 올 때 모신다고 했다. 호수의 깊이는 3-5m이고 한 달에 한 번씩 전당강물이 유입되도록 해서 썩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호수에는 인공 섬이 3개 있고 주변에는 3개의 산이 있으며 한쪽은 항주시가지에 연결되는데 호수에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도록 고층건물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두 개의 제방이 있고 성황각이 보이며 장개석별장도 있는데 공산당에게 쫓겨 다니던 장개석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전설의 미인인 서시를 기념하는 호수라고도 하며 서호는 맑은 날은 서시가 화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고, 안개 낀 날의 서호는 서시가 화장을 한 모습이며, 그 다음 아름다움은 비가 온 날, 제일 아름다운 때는 달밤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제일 안 좋은 서호의 모습을 본 셈이다. 구멍이 다섯 개인 석탑이 3개 있는데 달이 뜨면 구멍마다에 달이 하나씩 보이고, 그 달들이 물에 비치고, 님의 두 눈에 달이 있으며 하늘에 달과 그 달이 물에 비친 것, 모두 34개의 달이 있게 되고 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에 달이 있어서 35개의 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은 두 개이지만 달은 하나라야 되고 만일 두 개가 되면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서호에서 잡히는 초어요리는 항주의 4대 요리 중에 하나이기도 한다.
서호에서 유람선관광을 마치고 라텍스 공장으로 쇼핑을 하러갔다. 50분 정도의 거리를 가면서 가이드의 제안으로 우리는 퀴즈놀이를 했다. 가이드의 가방에 있는 파스가 상품이었다. 여자의 배꼽아래에 있는 ‘지’자가 들어가는 신체부위 세 가지는? 첫 번째 문제이다. 거시기는 물론 아니다. 두 번째는 검정염소끼리 밤에 교미를 시켜 낳은 새끼는 검정색이고, 하얀염소끼리 낮에 교미를 시켜서 낳은 새끼는 하얀색이다. 그러면 하얀색에 검정색 점이 있는 새끼는 언제교미를 시킨 것일까? 다음 흥부가 아들 셋을 낳았다를 다섯 글자로 표현하면? 또 흥부가 자식 열을 낳았을 때를 일곱 글자로 표현하면? 양식과 한식의 차이는? 등의 문제들이었다. 한분만 답을 맞춰 상을 받았었다.
쇼핑을 마치고 식당에 가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삼겹살고기가 곁들인 상추쌈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없었으면 좋았을 것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 단체에서 이탈하여 개인행동을 취한 것, 가이드와 다투는 것, 비행기 안에 반입 불가의 물건을 가지고 오다가 적발되어 여러 사람에게 염려를 끼친 것 등이다. 내 자신의 완전하지 못한 것들도 생각 했다.
황산! 참으로 좋았다. 오래오래 머릿속에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좋은 여행을 할 수 잇게 해 준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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