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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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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 8.12 | 대한민국관광트랜드 |
2일차 | 8.13 | 관광해설사의 역할과 자세 |
3일차 | 8.14 | 관광객 특성이해 |
4알차 | 8.16 | 한국문화관광자원의 이해 |
5일차 | 8.19 | 글로벌관광해설사 모범 사례 |
6일차 | 8.20 | 대한민국테마10선, 4권역 역사 문화관광(거제,통영,남해,부산) |
7일차 | 8.21 | 거제문화자원의 이해 |
8일차 | 8.22 | 거제에 대한 전문 지식 이해 |
9일차 | 8.23 | 시나리오 작성/ 관광해설 실무 |
10일차 | 8.26 | 원탁토의( 거제 관고항 해설을 위한 스토리 발굴) |
◎ 제1차 강의 ( 2019년 8월12일 ( 09:00~12:00)
주제: 거제,거제도,거제시 일반 알기...강사 거제대학교 이현
Ⅰ. 섬이란
문1: 섬에 다리를 놓으면 섬인가 육지인가?
도서개발촉진법시행령
[일부개정 2001.1.29 대통령령 제17115호]
제2조 (도서의 범위) ①도서개발촉진법(이하 "법"이라 한다) 제2조에서 "해상의 전도서"라 함은 만조시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한다.<개정 1997.12.27>
②제1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방파제 또는 교량으로 육지와 연결된 도서로서 육지와 연결된 때부터 10년이 지난 도서는 법 제2조의
규정에 의한 "해상의 전도서"로 보지 아니한다. 다만, 방파제 또는 교량으로 육지와 연결된 때부터 10년이 지난 도서인 경우로서 법
제4조의 규정에 의하여 개발도서(이하 "지정도서"라 한다)로 지정되어 법 제6조의 규정에 의하여 수립된 개발사업이 완료되지 아니한
도서인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신설 1997.12.27.>
섬: 물로(대양,바다,호수)둘러싸인 육지를 말하며 여러섬들이 집단으로 있는 것을 군도(群島)라 한다. 군청소재지가 있으면 군도((郡島),
읍.면이 있으면 邑面島, 사람들이 적게 모여 살면 落島라 한다
(섬이란)
1)섬(島): 물로 둘러싸인 육지
2)도서(島嶼): 섬보다 작은섬= 큰섬 도(島) + 작은섬 서(嶼)
3)점(점(苫) ; 서보다 작은 것은 점이라했다.
4)초(焦): 암초 (岩礁)...바위 덩어리가 물에 잠겨있으면 암초
물위에 나와 있으면 여(礖)이다(여섬)..낚시꾼이 좋아하는 섬
※ 해양(海洋): 큰바다 양(洋)+ 작은바다 해(海)
하천(河川): 큰하(河) + 작은천(川)( 강은 한글, 하천은 한문)
전도서(全島嶼)/부속도서
※ 거제도 다리 : 대교 (거제대교, 신거제대교, 거가대교) 연육교( 칠천도, 가조도, 산달도)연도교 ( 황덕도)
한국 10대 섬과 거제 10대 섬
한국의 10대 섬 | 거제의 10대 섬 | |||
1 | 제주도 | 1809.9 ㎢ | 칠천도 | 9.05㎢ |
2 | 거제도 | 378.8 | 가조도 | 5.92 |
3 | 진도 | 363.8 | 산달도 | 2.79 |
4 | 강화도 | 360.0 | 화도 | 1.09 |
5 | 남해 | 298.4 | 이수도 | 0.39 |
6 | 안면도 | 105.4 | 지심도 | 0.34 |
7 | 완도 | 85.3 | 내도 | 0.26 |
8 | 울릉도 | 72.9 | 황덕도 | 0.22 |
9 | 돌산도 | 68.9 | 외도 | 0.12 |
10 | 거금도 | 62.4 | 고개도 | 0.06 |
※ 계도는 유인도로 처주지 않는다. 외도는 두사람이 살고 있고, 계도는 불법이다.
전국의 섬 : 행안부(371/ ) 해수부 : 470/2,878) 통계청 : 470/2,767)
거제의 섬: 유인도 10개섬, 무인도 : 63개
거제도 법정동면과(19) 행정동면 (18) 마전동추가
한국의 광역시: 18광역시
한국 시군구: 243개
결론 섬이란
육지와 떠어져 있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다. ( 음식, 옷,풍습, 말 등)
해설사는 단순히 육지와 떨어져 있는 곳으로 해설하지 말고 그들이 보고 느끼고 머리에 담아갈수 있도록 구성하여 해설해야 한다.
섬에서는 평등해야하고 동일한 개념으로 살아가야 한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처럼 살아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인간을 크게 도우라( 인간존중, 평화, 인본주의)
Tip;
1) 이씨: 이(李)↔십(十)에 팔(八)을 뻬니 3이 아니더라
2)헌(憲) : 임금이 갓을 쓰고
3) 여자연창단체: (女子演唱團體)...걸그룹
4) 우상명성(偶像明星)...아이돌 ...이헌 표현하면 (I石)
5) 환정편연시 (幻灯片演示): 파워포인트 (이현 力点)
6) 카드 : 卞
Ⅱ 거제도의 이름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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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239~58 | 삼한시대 병한12개국 중 (두루국-도로국-독로국) |
AD 677 | 신라문무왕 裳郡( 3속현, 아주현, 남수현, 명진이현) |
AD757 | 신라35대 경덕왕 3속현(아주,송변,명진) |
AD983 | 기성현, 둔덕면 거림리 |
AD1272~1422 | 자즌 왜구 침략으로 피난감( 거창 제창현, 진주 영선현) 거창에 가면 거제와 지명이 같이곳이 있다. 수월,아주,송변,ㄷ오호,가조 등 |
AD1419 | 세종1년 이종무대마도 정벌 |
AD1422 | 거제군 환군 (수월) |
AD1489 | 거제현 거제부로 변경하고 기성관 건립 |
AD1592~1598 | 임진왜란 (1592.5.7.옥포해전승리,5.12고현성함략, |
AD1597.7.15.~16 | 원균의 칠천량해전 (파손: 판옥선110척, 거북선3척, 전투선139척 사망자1만여명) |
AD1593/1597 | 삼도수군통제영 오아포(가배에 설치) |
AD1953.1.1 | 거제군+ 장승포시 |
AD 1995.1.1 | 거제시 |
Ⅲ. 기타 강의 내용( 추가조사하여 올리겠음)
※ 거제도지형 ; 새, 독수리, 치마 ,두루
※ 거제도 문화제 : 고인돌, 거석, 조개무덤
※ 세종, 이종무, 대마도.. 대마도 정벌과 이종무
※ 한국사 연구: 우리말 우랄알타이 어족에 퉁구스 계영
1) 터키: 메스포타미아
2) 우랄알타이(유럽과 러시아)
3) 퉁구스 (배달민족)
4) 500년 역사와 조선왕조실록
- 실록은 왕이 볼 수 없다. 4본 만들어 1본은 적산산에 보관했다.
=========== 참고자료 ============
※ 고영화 역사보기( 거제도)
<거제도의 고대 지명, 독로(瀆盧) 주노(周奴) 상군(裳郡)> 고영화(高永和)
예전에 한때 부산광역시 여러 학자나 사학자들이, 독로국(瀆盧國)을 동래 지역에 있었던 고대 소국가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주장한 학자들에게 확인한 결과, 부산(영도)이 대마도와 직선거리가 거제도보다 더 가깝고, 옛 고분이 거제보다 동래가 몇 배나 많이 출토되고 있어 주장했다고 전한다. 이에 그 오류에 대해,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서술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당시 부산지역 대학 교수와 사학자들은 지역 이기주의와 지역 폐쇄성에 갇혀, ‘오분석(誤分析)’의 그릇된 판단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중국어 발음이나 고대 우리말은 물론, 남부지방의 여러 정황에 따른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기독로국여왜경계(其瀆盧國與倭境界)’ 즉, “변진에 독로라는 나라가 있는데 왜(일본)와 경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기 2세기 전후 독로(瀆盧)라는 말은 현재 우리말로 읽은 것이지, 당시는 음을 빌려 쓴 ’음차(音借)‘로, 瀆盧 한자어는 예나 지금이나 ’두루‘라고 중국말로 읽고 있다. ’섬‘이라는 단어는 조선초기에 처음 등장한 단어이고 고대에는 섬을 ’두루(빙 둘러 있다)‘라고 썼다. 그래서 중국말을 알거나 중국 역사학자는 모두 거제도라고 비정하고 있는 이유이다. 동래가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왜와 접하고 있다.‘라는 뜻은 단순 거리가 아닌 해류와 조류, 바람을 이용한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거리를 말한다. 왜와 경계하고 있다는 말은 왜국으로 가는 경유지(기착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고대에는 부산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쓰시마 난류와 해풍의 영향으로 인해, 거제도에서 대마도로 향했다. 이는 항해술이 발달되기 전인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몽고원정, 대마도 정벌, 15C조선통신사). 덧붙여 ’독로국‘의 또 다른 거제도 지명인 ‘주노국(周奴國)’은 ‘두루’ 周에 종 奴를 써서, ‘섬놈 나라’라고 비하하는 말이다.
이후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섬 고을)은 치마 裳을 써, 빙 두른 섬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지명(周奴國, 裳郡)은 모두 한자어 뜻을 가져다 사용하는, 이른 바 ‘훈독(訓讀, 訓借)‘으로 표기한 것이고 ‘독로(瀆盧)’는 음을 빌려다 사용한, ‘음차(音借)‘로 표기한 것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여러 경우를 생각을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독로(瀆盧)를 동래라고 주장한 학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 다음은 각종 문헌에서 등장하는 거제도 비정설(比定說)을 살펴보자. 왜? 거제도인지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거제도가 독로(두루)의 이름을 얻고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변한 12개의 토호국이었던 삼한시대였다. 군장이 있어 제정을 통할하였고,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변진전(弁辰傳)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의 낙동강 유역 진한 12국,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변한 12국 등 변진 24개국 가운데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이라는 국명과 “기독로국여왜경계(其瀆盧國與倭境界)”라는 기록이 있다. 즉, "변진 독로국은 일본과 경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독로국의 위치가 어딘지에 대하여 부산의 동래설과 거제설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거제도임을 분명해 보인다.
① 거제도가 동래(부산 영도 제외)보다 일본에 실제 더 가깝기도 하지만, 당시 ㄱ) 진한의 땅인 동래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 ‘내산국(萊山國) 또는 '장산국(萇山國)'이 있었음이 역사 기록에 뚜렷이 등장하기 때문이고, 또한 ㄴ) 고대인의 관점에선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독로국(두루국)은 단순 거리가 아닌 해류와 조류, 바람을 이용한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거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ㄷ) 왜와 경계하고 있다는 말은 왜국으로 가는 경유지(기착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고대에는 부산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쓰시마 난류와 해풍의 영향으로 인해, 거제도에서 대마도로 향했다. 이는 항해술이 발달되기 전인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
②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낙하생집에서 '거제부는 변진 때 소국이 있었는데 ‘독로(瀆盧)’라 일컬었다가 후에 여기에 상군(裳郡)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며[巨濟府 弁辰時有小國 曰瀆盧 後置爲裳郡是已], ③ 청나라 학자 정겸(丁謙)이 말하기를 '독로는 경상도 남쪽 거제도이며 이 섬은 동서 거리가 멀지 않았고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瀆盧, 當卽今慶尙道南巨濟島. 此島, 東西相距不遠, 故曰接界]고 했다. ④ 또한 양주동의 고가연구, 선석열의 경남대 문헌에서 본 가야와 고대 일본에 대하여 거제도에 독로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거제 섬은 상당한 세력을 갖춘 해양문화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변진(弁辰)은 가야,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계승했는데 당시 변진국에 동래 지역이 포함되지 않았다.
정약용(丁若鏞)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거제의 옛 이름인 ‘상군(裳郡)’과 ‘독로국’이 음으로 서로 통하고[독로=두루·도로=상], 독로국 남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을 고려한 것이었다
⑤ 중국학자들은 예로부터 모두 ‘瀆盧’를 거제도로 비정하였다. 瀆盧를 중국어로 읽으면 ‘두루’라고 발음하며 고대어 ‘섬’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학자가 모두 거제도로 주장하는 이유이다. 고대에는 오늘날 사용하는 ‘섬’이란 단어가 없었고 대신 ‘두루(두로)’라고 불렀다.
⑥ 독로국의 또 다른 거제도 지명인 ‘주노국(周奴國)’은 ‘두루’ 周에 종 奴를 써서, ‘섬놈 나라’라고 비하하는 말이다. 이후 설치된 상군(裳郡 섬 고을)은 치마 裳을 써, 빙 두른 섬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지명은 모두 한자어 뜻을 가져다 사용한, ‘훈독(訓讀, 訓借)‘으로 표기한 것이고 ‘독로(瀆盧)’는 음을 빌려다 사용한, ‘음차(音借)‘로 표현한 것이다. 근현대의 학자들은 중국어나 고대어를 잘 모르면서, 앞서 발표된 논문을 참고하여 인용하다 보니 ’동래‘라고 주장한 글들이 더 많이 양산되었는데, 지금에야 ‘瀆盧’를 모두 거제도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거제도에는 ‘裳’자 명문 기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참고로, ‘상군’(裳郡)과 ‘독로’(瀆盧)의 의미에 대하여 허재영 건국대 교수 기고문을 살펴보자. / 거제도(巨濟島)는 남해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이 섬 이름이 한 때는 ‘상군’(裳郡)이라 불렸다. 뜻으로 본다면 ‘치마’인 셈인데, 이 섬을 ‘치마’와 연관지어 부를 만한 연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최남선의 <동경통지>에서는 거제를 상군으로 부른 연유를 두고 한 구절 설명을 덧붙인 바 있다. ‘치마’를 뜻하는 속어로 ‘두룽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두룽이’라는 말을 문헌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비가 올 때 입는 ‘도롱이’는 짚이나 띠로 만들어 허리에 매어 입었으므로 ‘치마’를 뜻하는 ‘두룽이’가 속어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두룽이’의 한자 표기는 ‘독로’(瀆盧)인데 우리말의 ‘도랑’에 해당하는 말이다.(실제 중국어로 '두루'라 읽는다) ‘도랑’이나 ‘두룽이’, 그리고 ‘도롱이’는 모두 ‘두르다’ 또는 ‘돌다’에서 파생된 명사다. 우리말에서 ‘두르다’에서 나온 명사는 흔치 않지만 ‘돌다’에서 파생된 말은 비교적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도리’는 ‘둘레’를 뜻할 때와 ‘주기’를 뜻할 때 쓰인다. ‘도리 기둥’이나 ‘두리 기둥’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돌려 얹히는 나무를 뜻한다. 거제도의 땅이름이 치마나 비옷을 뜻하는 ‘두룽이’ 또는 ‘도롱이’였던 까닭은 섬 주위로 물길이 돌아들기 때문이었다. 외형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독로’, ‘상군’, ‘거제’가 모두 섬의 지형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말이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도 고유어와 한자어의 대응 관계가 성립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 이 자료는 현재까지 10 여년 동안 학계의 정설로 굳어진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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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랄 알타이 어족 ”한국어의 계통은 무엇인가?
‘우랄 알타이 어족’이란?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 말을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접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름부터 어려운 ‘우랄 알타이’라는 낱말이 과연 한국어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 우랄 어족 분포지도
‘우랄 알타이 어족’은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을 함께 일컫는 말로서, 우랄산맥 근처의 어족과 알타이산맥 근처의 어족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 하면 어떠한 공통점에 의해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이 하나의 어족관계로 묶일 수 있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곧 ‘공통 조상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라는 말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세계의 언어들, 몽골어, 만주어, 튀르크어들과 조상 언어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긴 세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서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고 배워왔고, 이것은 국민 상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어의 조상 언어를 찾기 위한 최근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어는 다른 언어와 공통의 조상 언어가 없는, 계통적 고립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배우고 알았던 상식이 이제는 상식이 아니게 된 것이다.
교과서에서 일보 후퇴!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 말을 듣게 된 경로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대부분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그렇게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음은 1948년부터 7차 교육과정까지 교과서에서 언급한 한국어 계통에 관한 내용이다.
▲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속 한국어 계통 소개 변천
1948년 문교부 교과서와 3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와 비교해 보자. ‘우랄 알타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알타이로 바꾼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변화이다. 심지어 4~6차 교육과정은 3차 교육과정에서 한 발 더 물러나 ‘한국어는 퉁구스 계통에 속한다’는 표현을 뺐다. 이제 중등교육 교과서에서 한국어 계통에 관해 한국어는 알타이 어계에 속한다는 내용만 남게 된 것이다. 7차 교육과정 교과서에서는 진술의 강도가 더욱 약해져 ‘한국어는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표현으로까지 후퇴했다. 위풍당당했던 초창기 교과서에서 보여준 언급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한국어와 ‘알타이 어족’의 연관성은 그저 가까운 사이로 그치고 말았다.
정말로 우리말이 ‘우랄 알타이 어족’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흔히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과 같은 계통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에는 몽골어파, 만주-퉁구스어파, 튀르크어파가 있다. 몽골어파에 속하는 언어에는 몽골어, 부랴트어, 칼미크어 등이 있고, 만주-퉁구스어에는 만주어를 비롯하여 러시아와 중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소수민족의 언어들이 있다. 튀르크어파에 속하는 언어에는 터키어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키르기스어 등이 있다. 그러면 한국어가 알타이언어와 어떤 공통성이 있어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게 되었을까?
우선 말소리의 특징이 비슷하다. 만주-퉁구스언어, 몽골언어, 튀르크언어, 한국어에는 모음조화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문법도 비슷하다. 아래 예는 각각 몽골어파의 한 언어인 다고르어와 만주-퉁구스어파의 한 언어인 어웡키어의 문장이다. 이를 살펴보면,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서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순서이다. 어순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어미가 발달되어 있다."
즉 알타이어족의 특징, 교착어, 모음조화, 두음법칙 등 어법과 문법이 유사하다..그런데.
"그러나 우리말에는 알타이언어들과 말소리의 대응이 성립되는 단어들이 그리 많지 않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 없어,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학계에서는 위의 세 어파를 묶어 알타이어족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동의하지 않는 학설도 있어, 알타이어족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아직 불확실한 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 한국어의 계통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타당하다고 하겠다.
알타이어족이 성립한다면,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직 비교언어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어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어족에 속하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앞으로 알타이어족의 여러 언어들을 더 철저히 조사하여 한국어와 비교하여 체계적인 말소리 대응을 찾아 증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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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왕의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다. 1387년 왜국 격멸에 큰 공을 세운 정지가 건의한 바 있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벌을 결행할 때까지 꾸준히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백척 이상 되었던 것으로 보아, 1만 정도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해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또, 원수 김종연(金宗衍)·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 고려인 남녀 1백여 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정벌에 대한 기사는 너무 간략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과가 컸던 것으로 보아 왜국의 피해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들의 개선은 왜국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이에 창왕도 그의 공을 찬양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그 뒤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어들고 유구국(琉球國)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모두 대마도 정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태조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국에 대한 소탕과 변경의 방어를 엄중히 하였다. 그러나 사절·향화왜인·흥리왜인의 내왕이 빈번해진 반면, 침입도 1393년부터 1397년까지 모두 53회나 되었다.
정벌의 발단은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는 120척으로 동래·기장·동평성을 함락,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만호를 살해하였다. 또, 같은 달 18일 통양포에, 23일 영해성을 침략했으며, 11월에도 5회나 침입하는 등 이 해에만도 13회나 침입함으로써 이에 대한 강력한 응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월 30일에 돌아올 때까지 약 2개월간의 사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정벌이 주원방포(周原防浦)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 걸린 것을 미루어보면 김사형이 그 동안에 대마도를 정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더욱이, 김사형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고,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정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벌은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조선 최초의 대마도정벌이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동정(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라 함.)이었다. 1398년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후 거의 매년 와서 예물을 바치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 갔다.이들 사절은 도주 소(宗貞茂)와 그 아들 및 도내의 각포만호(各浦萬戶)가 보낸 자들이었다. 이에 따라 상인들도 급증해 항구에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자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그것도 행장(行狀 : 통항증명서로 文引 또는 路引이라고도 함.)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많은 왜인이 거주하였고, 그들 가운데에는 풍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의 허실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1418년(태종 18) 3월 경상도의 염포(鹽浦 : 지금의 울산광역시 동면)와 가배량(加背梁 :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이렇게 왜인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 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60여 회나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주 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흥리왜선을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소가 죽은 후 아들 소(宗貞盛, 都都熊丸)가 아버지의 직을 이었으나, 도내의 실권은 산미(三味多羅 : 대마도 만호 혹은 早田萬戶라 함.)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번 조선과 통교한 적도 있지만, 왜구의 두목으로 동족과 함께 도내에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그런데 기근이 들어 생활이 궁핍해지자, 대마도의 왜적이 명나라에 약탈하러 가는 도중 조선의 연안을 약탈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해동정이 결행되었다. 태종은 재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양위하고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군무(軍務)만은 계속하고 있었으며, 기해동정도 태종에 의해 시행된 것이었다.
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 : 충청남도 서천군 동면 도둔리)을 침탈한 때문이었다. 이 싸움에서 병선 7척을 잃었고,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金成吉)와 그의 아들, 아군의 태반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같은 달 12일 왜선 7척이 해주를 침입, 약탈했고, 13일 황해도조전절제사 이사검(李思儉)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선 38척에 포위되어 식량을 요구받는 등 대규모의 왜구가 연안을 침입하였다. 이에 태종은 14일 대신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각 도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또, 정벌에 앞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에 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즉,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咸吉道)로 보내고, 흉악한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을 분치시켰다. 이 때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준비를 마친 다음 이종무는 9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올랐다. 그 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만 7285인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20일에 먼저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에 이종무는 지문(池門·望沙門 : 태조 때 항복해 귀화한 자)을 시켜 도주 소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권했으나 대답이 없자. 정벌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그 결과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했으며,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129척의 선박을 노획해 쓸만한 것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렸으며, 131명의 중국인을 찾아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또, 이종무는 적이 내왕하는 중요지점에 책(柵)을 세워 오래 머무를 뜻을 보여주고, 29일 두지포(豆知浦)를 수색해 가옥 68호와 선박 1척을 태우고, 적병 9명을 참하고 중국인 15명과 본국인 8명을 찾아내었다. 한편, 이로군(尼老郡)에서 좌우군을 이끌고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朴弘信)·김해(金該) 등 장수와 군사 백수십인이 전사하였다. 일본사료 ≪조선통교대기 朝鮮通交大紀≫에는 이 때 아군 1,500인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하나, 과장된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박실의 패전이 있은 데다가 대마도주 소는 아군이 오래 머무를까 두려워서 퇴사(退師)해 수호하기를 애원하므로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동정(東征)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죄는 묻고, 약탈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벌의 본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해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 시위로 왜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3일 왜구가 재침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중지하였다.
대마도주는 1420년 정월 지오(時應界都)를 보내어 항복의 뜻을 전해왔다가 뒤에 번복하자, 같은 해 11월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심껏 귀순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또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기해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동정 후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도둑들이 차차 평화적 내왕자(商倭·客倭)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년 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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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인돌 문화
한국의 고인돌과 고인돌문화... 吳江原(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I. 머리말
한국은 1995년 조선 왕조의 왕실 사당인 종묘가 유네스코에 의해 처음으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2014년 현재까지 북한을 포함하여 12건[ 종묘(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불국사ㆍ석굴암(1995), 창덕궁(1997), 수원 화성(1997), 경주 역사 유적 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지석묘 유적(2000), 고구려 고분군(2004), 조선 왕릉 40기(2009), 하회ㆍ양동 마을(2010), 개성 역사 유적 지구(2013), 남한산성(2014)]이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고인돌은 한민족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적인 상징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민족문화의 차원을 넘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에 못지 않은 소중한 인류 문화의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옛적 우리 민족이 남긴 이 땅의 수많은 고인돌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세워 놓았는지, 그리고 이 고인돌이 우리 민족문화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세계와 주변 국가에도 있는 고인돌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 어떤 것을 고인돌이라 하는가
고인돌은 과거 우리나라 민간에서 ‘고여 놓은 돌’이란 뜻으로 부르던 민간어를 우리나라 학계에서 학술 용어로 받아들여 정착시킨 용어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고인돌을 한자식으로 표기할 때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고여 놓은 돌’이란 뜻의 우리말을 고려시대 이래 지식인들이 한자로 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금(金)나라 이후 민간에서 부르던 ‘석붕(石棚)’이란 용어를 현대에 들어와서 학술 용어로 받아들여 고인돌을 ‘석붕’이라 부른다.
중국에서 말하는 ‘석붕’이란 것은 ‘돌로 만든 선반 또는 시렁’이란 뜻이므로 이 또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고인돌과 사실상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구미에서 고인돌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는 ‘돌멘(Dolmen)’ 또한 과거 유럽의 민간에서 ‘두 개 이상의 돌로 고여져 있는 큰 돌’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민간어를 근대에 들어와 학계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유럽 모두가 같은 형태의 구조물을 고인돌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고인돌은 우리나라 학계에서 탁자처럼 생겼다 하여 ‘탁자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탁자식 고인돌은 과거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는 적은 반면 북쪽 지역에는 많다고 하여 ‘북방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인돌은 탁자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다. 심지어는 땅 위에 굄돌이 없는 것들도 고인돌에 포함된다.
땅 위에 굄돌이 있기는 하지만 바둑판 받침과 유사한 작은 부정형 돌로 고여 놓은 ‘기반식(碁盤式) 또는 바둑판식 고인돌’, 땅 위에 굄돌이 있기는 하지만 기둥처럼 생긴 ‘주상(柱狀) 지석식 또는 기둥 굄돌식 고인돌’, 땅 위에 굄돌이 없고 상석(上石)만이 있는 ‘개석식(蓋石式) 또는 뚜껑돌식 고인돌’, 주검과 부장품을 넣은 땅 아래의 돌널이 땅 위로까지 얼마간 올라와 굄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지상석곽형 고인돌’, 고인돌 주변의 땅 위에 돌을 깔아 놓거나 얼마간 높이로 쌓아 놓은 ‘부석식 고인돌’과 ‘적석식 고인돌’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까닭에 고인돌의 학술 용어를 땅 위에 굄돌이 있는 형식만을 연상시키는 지금의 용어가 아니라 거대한 상석에 초점을 맞추어 ‘거석묘(巨石墓)’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유럽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고인돌을 포함한 큰 돌을 사용하는 무덤과 의례 유구를 ‘거석(Megalithic)’ 유적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굄돌로 큰 돌을 받쳐 놓는 구조물이 갖는 전통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이러한 류의 유적을 고인돌이라 통칭하고 있다.
고인돌의 여러 형식 가운데 기반식, 개석식, 적석식, 지상석곽식 등의 경우 땅 아래에 주검과 부장품을 묻어 놓은 별도의 시설이 있다. 땅 속을 평면 장방형과 타원형으로 파 놓기만 한 것(토광)도 있지만, 대개는 얇은 판석으로 널을 짜맞추어 놓거나(석관), 깬돌을 차곡 차곡 쌓거나 부정형의 막돌을 잘 쌓아 덧널 모양을 만들어 놓거나(석곽) 하였다. 적석식 고인돌은 하나의 적석 범위 안에 탁자식 1기와 여러 기의 개석식 고인돌과 석관묘 등이 함께 묶여져 있다.
1. 세계와 동아시아의 고인돌로는 무엇이 있는가
고인돌은 한반도 외에 가깝게는 중국 동북 지역, 산동성, 절강성, 일본 구주, 멀게는 유럽, 북아프리카(모로코, 튀니지), 남아시아와 서아시아에도 있다. 유럽에서는 스웨덴, 덴마크, 독일 서북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불가리아, 카프카즈 등지에, 남아시아에는 파키스탄, 인도 남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 서아시아에는 이란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고인돌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굄돌을 고이거나 거대한 상석 아래에 묘실을 마련하여 놓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동아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고인돌은 우리 식의 고인돌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대한 돌을 수반한 거석묘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거석 유적까지 포함할 경우, 유럽의 거석 유적은 프랑스 서북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거석 유적을 들 수 있다. 기원전 50세기 농경 중심의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이 지역에 유럽 최초의 거석 유적이 세워지는데, 이후 기원전 40세기에는 프랑스 남부의 대서양 연안 지역, 기원전 30세기에는 영국과 남유럽으로까지 확산된다.
북아프리카의 고인돌은 스페인 남부를 통해 확산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기원전 40~35세기에 유럽과 별개로 출현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동유럽의 고인돌은 기원전 30세기 이후 출현하여 늦게는 기원전 1300년 무렵까지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3세기 기간에 세워졌다. 인도네시아는 기원전에 세워진 것도 있지만, 보르네오섬 서남부 싸라와크강 하류 자옹(Jaong) 일대의 거석 유적처럼 기원후 700~950년 무렵, 또는 숨바섬처럼 1970년대까지 세워진 곳들도 있다(최몽룡 외 1999).
유럽 등지의 거석묘(고인돌)는 여러 형식의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탁자식이나 기반식 고인돌과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형 봉토․석실 수준의 묘실․무덤길 등을 갖추고 있어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유럽이나 서아시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시대뿐만 아니라 구조 또한 우리와 비슷한 고인돌이 축조된 곳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여러 지역인데, 이 가운데 중국 동북 지역, 한반도, 일본 서북 구주 지역이 가장 유사하다. V. 맺음말
고인돌은 요동 남부, 길림 남부,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그 주변 지역에도 일부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 세워진 고인돌은 세계의 많은 고인돌 가운데 가장 유사성이 높은 유적들로서 우리 민족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고인돌은 요동과 길림 지역에서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는 못하였지만,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무덤이자 때로는 묘표석과 기념물로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나아가 일본 문화의 전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고인돌은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우리 민족문화의 전개와 동북아시아와의 교류 및 성격을 밝히는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인돌이란 :支石墓,고인돌(한국) 石棚 (중국),Dolmen(유럽)...巨石文化라고도 한다. 청동기 시대 (BC 1000~3000) 지배자의 무덤이나 종교행사에 사용되었으며, 한국에는 15,000~20,000기 정도가 있으며 전세계의 2/3정도가 분포되어 있으며 주로 하천이나 바닷가의 구릉에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의 시대는 청동기시대이나 대부분 석기제품이다. (돌검, 돌도끼, 무늬토기,그물추, 돌낫,돌보습) 거제도에 고인돌이 많은 이유는 석기시대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 지역적으로 따뜻하고 바다가 있기에 먹을 꺼리가 많아 자연적으로 이동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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