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의 기복적 요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런지요?
기복과 수행은 상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런지요. 훌륭한 수행자들 가운데에서도 불보살께 의지하여 득력하고 불사를 원만히 성취한 분들이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분들보다 훨씬 못한 저같은 중생이야 불보살께 의지할 일이 한 둘이 아니지만
기복이 집착을 키우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답변하겠습니다.
2004년도에 대승불교 비불설 문제로 법보신문에서 여러 필진에게 의뢰하여 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법보신문 기자분이 저에게 대승의 입장에서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기고했던 에세이에서 기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 그러나 필자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승불전이 설혹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교리는 아함이나 니까야, 율장과 같은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면 먼저 기복적 신행에 대해 검토해 보자. 우리는 초기불전 도처에서 기복과 작복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를 대하실 때 해탈의 가르침 이전에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베푸셨다. 이를 차제설법이라고 부른다. 또, 대열반 이후 사리탑의 관리를 재가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발복을 권하셨다.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물을 올리고 탑을 조성하며 사원을 건축하는 것이 복을 짓는 행위임은 초기불전 곳곳에서 강조된다. 물론 기복과 작복이 불교신행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의거할 경우, 기와불사, 법당불사, 가사불사 등을 위한 시주와 지계 등의 선업으로 인해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이치는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설사 그것이 기복적 동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러한 작복적 신행에만 머물려고 하는 마음가짐은 계도되어야 할 것이다. ....
(법보신문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861 에서)
이 글은 제가 자발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기자가 대승의 입장에서 옹호하는 연출을 해 달라고 부탁해서 쓴 글인데, 이 이후에 저는 대승 옹호론자가 되었고, 또 위에 인용한 기복 관련 글 때문에 기복 옹호론자가 되었습니다. 신문사 입장에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그것을 연재할 경우, 구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계속 논쟁을 부추겼는데, 이 기고문 이후 저는 논쟁적 글쓰기 부탁이 들어오면 양해를 구하고 모두 거절합니다. 그 당시 법보신문에서 다시 모 교수님에게 부탁하여 응용불교 관련한 저의 학문을 비판하는 글을 쓰시게 한 후, 저에게 그 분의 글을 보이면서 그에 대해서 반박하는 글을 써달라고 하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든 위에 인용한 글 가운데 기복에 대한 제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사찰에 시주물을 올릴 경우 나에게 복이 옵니다. 스님을 복전(福田)이라고 부르듯이, 스님께 공양이나 시주를 올릴 경우 나에게 복이 옵니다.
<대품반야경>에 대한 용수 보살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에 의하면 “축생에게 보시할 경우 보시물이 100배로 되어 내게 돌아오고, 악인(惡人)에게 보시할 경우 1000배가 되어 돌아오며, 선인(善人)에게 보시할 경우 10만배가 되어 돌아오고, ‘욕심을 버린 분(離欲人)’에게 보시할 경우 10억만배가 되어 돌아오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의 성인들에게 보시할 경우 무량한 복이 되어 돌아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내가 공덕을 지을 경우에, 내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인과응보의 이치이고, 기복의 종교행위도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락의 세계에서조차 벗어나는 해탈, 열반을 지향하는 전문수행자의 경우 기복은 무의미할 겁니다. 그러나 세속에서 복락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기복과 발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기복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복을 성취하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기불전의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할 때, 나에게 복이 오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위의 인용문에서 썼듯이 '보시와 지계'입니다.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고, 지계는 자기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만나는 사람마나 잘 대하고, 내가 맡은 일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보시행이고, 근검, 절약하면서 철저하게 계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지계행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덕목을 덧붙인다면 정진을 들 수 있습니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모든 성취는 정진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즉 출가하신 스님께서 도를 성취하는 것도 부지런하게(정진) 수행하셨기 때문이고, 세속에서 재가자가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얻게 되는 것도 부지런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보시, 지계, 정진의 삶을 사는 사람의 경우, 앞날은 점점 밝아집니다. 나의 인생을 유복하게 만들고, 내가 하는 세속의 사업이나 사찰의 불사를 원만히 성취하는 지름길은 보시와 지계와 정진입니다. 기복의 성취를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상은 기복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불교 수행을 하려면 복력(福力)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수행에 장애가 많다고 합니다. 몸이 아프든지, 뜻하지 않은 곤란을 당하든지 ... 하다 못해 세 끼 밥 먹고, 눈비를 피할 공간의 복력이라도 있어야 불교 수행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박복(薄福)하면 기복(祈福)을 하고, 작복(作福)을 해서 득복(得福)을 해야 합니다. 전문수행을 하든, 세속사업을 하든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기복이 아니라 작복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기복과 작복은 별다르지 않습니다. 기복 행위에 작복이 수반되고, 작복을 할 경우 기복의 마음이 배어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바라는 바가 있을 때, 법당에 가서 소원을 마음에 떠올리고 불단에 절을 올립니다. 시주물을 올리고 절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절을 올린다든지, 시주물을 올리는 것이 '작복'의 행위입니다. 내가 절을 올리는 행위는 불교를 존중하게 만드는데 일조하며, 내가 시주하는 행위는 사찰의 운영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중되고, 잘 보존되며, 널리 전파될 경우 우리 사회는 평화로워지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 보다 행복해집니다. 나의 기복적 기도행위이지만 작복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불교 신행을 위해 복력의 뒷받침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복이 아쉬울 경우 기복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기복의 기도를 올릴 때 절, 독경, 시주 등의 작복이 함께 합니다.
기복만 해선 안 되겠지만, 박복하면 기복을 하고, 작복을 하고, 득복을 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전자전기공학 전공하신 교수님께 여쭈어 보니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신 내용입니다.)
불교의 기도법은 이웃 종교의 기도와 다릅니다. 기도 중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든지, 108배를 하든지 불교 기도법의 공통점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몸에는 뉴런이라는 신경망이 그물처럼 퍼져 있는데, 우리가 말을 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신경망에 전기가 흘러서 근육을 수축시키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는 것 역시 뇌 속의 뉴런에서 일어나는 전기현상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을 소리내어 외치든, 마음 속에서 염하든, 몸을 구부리며 절을 하든, 불자들이 기도할 때 같은 행위를 되풀이 합니다. 그 때 해당 근육을 수축시키기 위해서 우리 몸의 신경망에 일정한 패턴의 전기가 흐를 텐데, 되풀이 기도를 통해 그런 전기의 흐름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전파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파의 종류를 얘기할 때 싸이클이나, 헤르츠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1초 동안 몇 번 되풀이 되었는가를 수치로 나타낸 겁니다. 진동(되풀이) 회수의 대소에 따라서 장파, 단파, 초단파, 극초단파 등 다양한 전자파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불자들이 염불이나 절을 되풀이하게 되면, '장파'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잡념 없이 되풀이 할 경우, 그 파동이 균일하기에 전파의 힘이 강력할 겁니다. 초단파는 직진을 하기에 장벽을 만나면 반사되는데, 장파의 경우는 굴곡과 장벽이 있어도 사이사이 파고 들어서 널리 전달된다고 합니다.
불교의 기도법이 '되풀이 방식'으로 정착된 것은, 그 효험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되풀이 되는 전기의 흐름은 전자기파를 발생시키고, 전자기파는 허공으로 퍼져나가 불보살님께 전달됩니다. 법당에서 기복의 기도를 올리고자 하는 분들은 먼저 일념으로 관세음보살과 같은 불보살님의 명호를 여러 차례 되풀이 하든지, 일념으로 여러 차례 절을 올린 다음에, 끝에 가서 마음 속에서 원하는 바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전자기파의 발생원리에 비추어 볼 때, 먼저 염불이나 절을 되풀이 하여 불보살님을 모셔 온 후, 기도 마무리에서 시주물을 올리고 발원을 떠올리는 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전자기파는 전파라고도 하는데, 전기장이 발생하면 자기장이 생기고, 그렇게 생긴 자기장 때문에 다시 제2의 전기장이 생기고, 또다시 그런 제2의 전기장 때문에 제2의 자기장이 생기는 방식으로 전기장과 자기장의 교차가 순식간에 일어나면서 허공을 통해 전파된다고 합니다. 빛도 전자기파이 일종입니다.)
첫댓글 명쾌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04년도 논쟁 때 그런 오해를 사신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답변하기 껄끄러우셨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에도 자세히 답변해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박복한 중생이 현실에서 한계를 절감하고 진실하게 드린 질문이니 아무쪼록 교수님 소중한 답변이 시비거리가 아니라 저와 다른 분들께 진정한 유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신구의로 되풀이하는 신앙 행위가 전파가 되어 시방법계에 한순간에 퍼질 수 있다는 교수님 설명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러고보니 불교, 특히 밀교에서 각각의 본존들에 부여된 상호의 색깔이나 진언 등도 모두 파동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불보살들께 맞닿고 공명하여 복력이 증장되고 뜻한 바 이루도록 일념정진하겠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