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산행지도}
♣ 천황봉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루는 천왕봉은 함양 방면으로 칠선 계곡을 빚어내 물줄기를 토해 내며 산청 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 계곡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세갈래로 헤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한데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인의 젖줄이 된다.
천왕정상에는 현재 82년 여름 경남도가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있는데 전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이 표기돼 있다. 그 전에는 진주 산악인들이 남명 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이란 글귀를 새겨 표지석 으로 세워 두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 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 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겨져 성모상은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으로 해발 1,915m의 거봉이다.
천왕봉은 그 옛날 토속적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성모숭상의 유적인 석상과 마야부인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데 없으며 지리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천왕봉의 해돋이는 천지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장관으로 지리산 10경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천왕봉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쌓여 있어 맑은 날을 보기가 어려워 예로부터 3대에 걸쳐 선행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 우리민족의 기상과 혼, 정서, 그리고 애환이 깃들여 우리와 더불어 숨쉬어 온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 (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려 왔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頭流山) 이라고 불려지기도 하고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의 의미를 빌어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천왕정상에는 현재 82년도에 경상남도에서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 있는데 전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1915m" 란 글이 표기돼 있다. 그전에는 진주 산악인들이 남명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이란 글귀를 새겨 표지석으로 세워 두었다.
1967년 12월 27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는 지리산은 주봉 천왕봉(1,915m)에서 노고단(1,500m) 을 잇는 1백리 능선에 반야봉, 제석봉, 촛대봉등 해발 1,500m를 넘는 10개의 거봉이 구름 위에 솟아있고 이들을 호위하듯 해발 1,000m를 넘는 20여개의 높은 봉우리들과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
용트림하듯 길게 뻗어진 주능선의 길이만도 100리가넘는 지리산은 북쪽을 내지리, 서남쪽을 외지리로 구분하나 잘 통용하지는 않고 있다.
산릉은 주능선에 15개의 지능선과 15개의 계곡을 배열해 남북으로 흐르는 큰 강과 이어져 바다로 빠지게 연결시켜 두고 있다. 거산의 물줄기 큰 하나는 남강으로 또 하나는 멀리 덕유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봉우리와 재가 지리산의 위상이라고 보면 지리산의 실질이 되는 계곡은 이들 두 줄기 큰 물줄기를 만나기 전에 강으로 이어지는 계류천을 만든다. 화개천, 연곡천, 동천, 엄천강, 경호강, 덕천강, 횡천강 등 14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그것이다. 이들 하천을 만들기 위해 능선 사이사이에서 옥류청계를 자랑하며 그 하나하나가 비경을 이루는 것이 지리산 12동천이다.
청학, 화개, 덕산, 악양, 마천, 백무, 칠선동과 피아골, 밤밭골, 들돋골, 뱀사골, 연곡골의 12동천은 수없이 아름답고 검푸른 담과 소 비폭을 간직한 채 지리산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이들은 또한 숱한 정담과 애환까지 안은 채 또다른 골을 이루고 있는데 혹은 73개의 골을 이야기하고 혹은 99개의 골을 논하고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골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봉우리와 능선 그리고 계곡들은 대자연의 섭리와 어우러져 지리10경을 펼쳐 보이니 노고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낙조, 벽소령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가 그것이다.
지리산의 비경은 또한 3도 5개군 15개면에 걸쳐 484㎢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어 동식물의 보고로도 정평이 나 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식물류는 목본식물 245종, 초본식물 519종 등 모두 824종. 이 중 식용식물이 285종, 약용식물이 174종, 독초식물이 14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더 많은 연구 여부에 따라 더 있을 가능성이 많다. 수림이 울창해 동물류도 다양해 이미 호랑이 표범 불곰 등은 사라진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나 멧돼지, 반달곰, 사슴 등 짐승 22종과 조류 163종 등 421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면 최근에 반달곰 4마리를 방생하였다.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겨져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실정이다.
지리산은 가도가도 끝내는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천하제일경이라는 천왕일출과 석양낙조를 빚어내는 천왕봉은3대에 걸쳐 적선을 하지 않은이에게는 천지개벽을 연상케하는 일출 광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것이 그것이다.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있다. 이들 두 관문 이외에 천왕봉을 향하는 길목은 칠선계곡을 거쳐 마천에서 깍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비탈길과 멀리 대원사에서 치밭목~중봉을 거쳐 오를 수 있는 험난한 길 등 두길이 있으나 모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듯 해야만 주봉에 닿을 수 있으니 천왕봉은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5백년전 김종직, 김일손, 이육, 조식 선생 등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에서조차 그들의 내면세계 전부를 토해 내고도 모자란 듯 여운을 남겨 두었다. 남명선생은 그의 "유 두류록"에서 무릉도원을 지리산 어느 곳으로 여기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고 읊조렸다.
고려 말 이인로 역시 지리산을 찾아 헤매며 “두류산 멀고 깊은데 저녁 구름 나직하니 신선 사는 곳 어디인지 물을 길 없는데 시냇물에 꽃만 떠내려와 속객을 어리둥절케 하느냐”며 지리의 신비함에 탄복했다.
서산대사는 "지리는 장엄하되 빼어나지 않았다“ 며 수려하기 보다는 장엄 웅장한 남녘의 진산이라고 찬탄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지리산에 절과 암자가 3백50군데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가히 지리산은 수도처로서의 적지는 물론 문화유적의 보고라고도 할 만하다. 현재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칠불사를 비롯, 사적 7개소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에는 수많은 한국인의 시상이 발원하는 곳으로 부르며 마음의 고향으로 믿고 있다.
태고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을 둘러싼 선인들의 숱한 답사 기록과 풍류는 나아가 지리산을 매개로한 문학으로까지 발전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손꼽히는 "춘향전", "흥부전", "변강쇠타령" 등은 모두가 지리산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저변에 깔린 정서는 지리산속의 잠재된 변혁세력과 무관치 않음을 엿 볼 수 있다. "흥부전"의 본무대는 지리산 자락의 운봉여원치에서 함양 팔령재까지로 지금도 "흥부마을"이 있다. 경남과 전북 경계지점을 지나면 바로 나온다. 변강쇠타령은 알려진 대로 거의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일대인 등구,창원이다.
이같은 문학적 배경은 근세까지 이어져 박경리의 "토지",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 김동리의 "역마"등은 조선말기와 일제의 침탈 과정에서 빚어진 지리산과 한민족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근대화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더불어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80년대 이태의 "남부군", 조정래의 "태백산맥"등으로 이어져 지리산과 함께한 민족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사랑과 분노가 문학작품을 통해 감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의 모습은 천의 얼굴을 하면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기에 아직 그 누구도 지리를 다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멀리 천왕은 1백여리 능선길마다에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숨겨 놓은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켜봐 온 듯 넉넉함으로 남아 있는 산이다. 상세정보출처{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