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2:20-23...믿음은 복음으로세워져야 한다.
(골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하고 바울은 반문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은 ‘스토이케이온’으로 원형은 ‘진열하다’ ‘나란히 세우다’라는 의미가 있는 동사 ‘스테이코’에서 유래되어 ‘알파벳의 요소’ ‘만물의 기본 요소’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기술이나 학문 또는 훈련의 기본 요소로서 기본적이고 일차적이고 기초적인 원리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그 당시에 헬라철학, 영지주의 금욕주의 천사주의 규율등등이 다 그리스도에 비하면 초보수준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는 죽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율법을 좇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다시는 그 초등학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서’라는 단어 ‘아포’는 분리를 의미합니다. 초등학문에서 이제 그리스도인은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페다네테’는 죽어서 감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왜 분리 되었는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분리되었고 죽어서 감각이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왜 또다시 얽매이는가 라는 질책을 받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벧후2:20, 우리는 이제 율법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더 높은 하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법에는 간음하지 마라 했으나 나는 너희에게 명하기는 마음에 음욕이 있는 자는 이미 간음을 했느니라 요한복음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우리는 영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또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은 하라 하지마라 의 초등 수준입니다. 그러나 고등 수준은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고 깨달아졌으면 이제 그 깨달은 수준에서 주의 말씀을 분변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성한 사람입니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라가야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기 위함입니다.(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는 일들이 특히 주의 일이라 하는 것에서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사람의 계명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은 젖혀두고 사람의 뜻을 더해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열심히 해놓고도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마치 무엇과 같을까요. 손발을 깨끗이 닦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법인양 법으로 정해놓고 안하면 정죄를 하고 상처를 주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 말로 실족시킨 그 사람도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경배하나 (마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것들은 지혜가 있어 보이나 조금도 유익이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23절에서 ‘자의적 숭배’‘에델로드레스키아’는 원하다, 갈망하다,라는 뜻의 동사 ‘델로’와 ‘예배’‘숭배’‘경건’을 가리키는 명사 ‘드레스케이아’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인간이 제멋대로 만든 종교 혹은 예배의식을 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만족을 위한 예배라면 그리스도를 높이고 영광돌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닌 것은 자의적 숭배, 혹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23절을 다시 보면 ‘겸손’이 나오고 있습니다.
‘타페이노프로쉬네’라는 단어는 낮은 겸비한 이라는 의미의 ‘타페이노스’와 ‘고삐를 매다’의 동사의 ‘프라오’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자신의 의지로 겸비함을 나타내는 가장된 겸손을 의미합니다. 즉 바리새인이라는 뜻입니다. 내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사의 모습은 사단도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단은 끝임없이 노리고 틈새를 치고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외형으로 위장하는 것은 마귀의 전유물입니다. 혹 나는 위장하는 일에 능수능란하면 회개해야 합니다.
괴롭게한다는 것은 금욕주의로 자기 몸을 해치면서까지 음식을 절제하는 그리고 자기의 몸을 학대하는 중세 수도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몸을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으로서 잘 보존해야하고 성령이 거하시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정결해야 합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금욕주의가 아니어도 성령의 임재속에서 절제하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속에서 죄도 다스릴수 있고 끊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로서 하려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자란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과 같아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 서시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죄에 대한 자제력은 오히려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불행을 가지고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죄성을 혹은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을 했습니다.(롬 7:22.23)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는 우리의 죄는 십자가의 못 박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드려야 하지만 그러나 그 결말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결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능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 2장은 이단과 거짓교훈에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단과 거짓교훈에 술수는 교묘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내세워서 그것으로 신앙의 앞을 유톤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따라가다가 미혹당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설사 하늘에서 불이 내려도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거기서 돌아설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보이는 현상에 뿌리를 내리면 결국 마지막 재앙에서 넘어가게 됩니다. 복음에 굳게서서 흔들리지 말아야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세상도보고 종교도 보고 그래서 가치 있는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말씀위에 서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