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소명// 눈과 귀와 마음을 막을 소명
1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뵙다.
2-4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모시고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고 그 소리로 성전의 문지방이 흔들리다.
5 입술이 부정하고, 부정한 사람 틈에 살던 이사야가 하나님을 뵙게 되어 죽는 줄로 알고 탄식함
6-7 스랍이 제단의 숯불을 이사야의 입에 대다. 악이 가시고 죄가 사하여 지다.
8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이사야가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다.
9-10 하나님의 명령: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말고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는 말라 하라고 명하심//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성해지지 못하도록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막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라
11-12 이의 때에 대한 이사야의 질문에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멸망당하여 다른 나라로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까지)
13 남겨진 1/10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그루터기가 나무의 베임에도 남음같이 거룩한 씨가 남아 있으니라.
웃시아 왕이 죽던 해는 기원전 739년입니다. 16세에 재위해서 52년을 통치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좋은 왕으로 기억이 되고 있지만 마지막이 온전치 못한 부분이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좋게 시작하여 나중이 나쁘게 끝나는 경우는 우리도 지금 많이 보는 모습입니다. 작은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큰 교회가 되고 작은 교회의 목사가 대형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개척교회 때의 어려운 삶과 가난한 삶을 포기하고 사는 모습을 보고 사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이 나중에 회개하고 낙원이 보장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나중이 좋은 것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의인이 되고 의인이 죄를 지으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늘 끝이 좋은 것이 좋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 한결같이 좋은 것이 가장 빛나는 삶입니다. 한결같음 변치 않음은 너무나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사람이 어려울 땐 신실하다가 먹고 살만 해지고 성공하게 되면 변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고 남녀의 관계도 일생을 같이 변치 않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살다가 변심하는 경우도 우리가 보고 삽니다. 다 죄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소명장임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참으로 올바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아는 사람도 드뭅니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명하시는 내용은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여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라는 말씀을 북 이스라엘에게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하고 마음으론 깨닫지 못하게 해서 성하게 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저는 이런 명령을 이사야가 어떻게 수행을 했는지 아직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의 멸망을 마음에 두시고 이와 같이 이사야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약 17년이 흐른 후 기원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또 이로부터 약 136년이 흐른 후 남 유다도 586년에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도 북 이스라엘의 경우는 17년의 기간이 있고 남 유다에는 1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더 참고 계십니다. 그리고 남 유다에는 히스기야와 같은 좋은 왕이 더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피의 제사법을 가지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서도 결국은 민족적이고 또 왕과 권력자들의 범죄로 인해서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6.25이후에 경험한 바요, 또 일본의 36년의 압제하에서 당한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명령하신 내용을 수행하려면 우선 그 시대 남 유다의 백성에게 가서 율법을 읽고 율법의 강론을 듣기는 하십시오 그러나 깨닫지는 마십시오라고 전해야 하고 또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게 해야 하고 또 깨닫게 하지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상함을 면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즉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용서를 받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그대로 보면서 이해되는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용서가 어렵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시고 다시 설명을 해 주시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짓는 상태로 그대로 두라는 말씀이고 죄를 깨닫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눈과 귀를 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6장에서 받는 이사야의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세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허락을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셨고 죄인이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평소에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멸망 때까지 또 100년 이상을 참으셨습니다. 이 속의 깊은 하나님의 뜻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웃시아 왕의 후손이 히스기야 왕의 시절에 번영과 주변의 적으로부터 유다를 지켜주시고 또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하셨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남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악하게 살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동시에 볼 수가 있습니다. 6장의 마지막 절에서도 이의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전체나 남 유다 전체의 멸망을 예언시키지만 여전히 거룩하게 사는 남 유다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보호와 자비는 늘 이렇게 표현을 하십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의 멸망은 당시에 죄를 짓던 이스라엘인이나 거룩한 이스라엘인이나 모두에게 비극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나 에스겔 선지자나 예례미아와 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도 조국의 멸망은 큰 비극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민족의 범죄로 멸망을 시키면서도 모든 세상의 악 속에서도 의롭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와 보살핌이 절대로 쉬지 않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죄로 물들고 믿는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아서 참으로 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민족적으로 임할 때에도 언제나 의롭게 사는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알고서 어떤 경우에도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한국의 현실을 보면 북으로 김정은의 핵의 위협이 있고 남으로 늘 지진의 위협이 또 있고 주변 강대국의 자국의 이익만 챙기는 모습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에는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고 또 부동산으로 부를 획득하려는 시도가 맹렬하고 너무나 직장 문제와 자녀의 교육 문제가 심각해서 결혼도 아니하고 자녀도 낳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부를 획득하고 누리고 사는 법에 대한 설교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대로 하루에 너무나 이 세상에서 살기가 어려워서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매일 30명이 넘습니다.
과연 이사야 시대의 남 유다와 지금 한국에서의 삶이 어디가 더 선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모든 10억이 넘는 부자는 그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거나 자살 방지 자금으로 내놓고 자신이 필요한 부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부를 추구하는 주장이 이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질의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손과 발을 놀리면서 성실하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면 누리면 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되는 집과 땅을 통한 부의 추구도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됨은 화가 반드시 미치고(이사야 5:8-10의 말씀 이런 자의 집은 흉가가 되고 땅에서 소산이 없을 것을 말씀하심. 이런 사람이 많으면 온 한국이 이렇게 된다는 말씀임)
6.25의 불행과 일본의 억압의 역사가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고 우리에게도 민족적인 불행이 반드시 올 수가 있음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죄의 용서가 절대로 아니고 죄의 벌은 믿는 자에게도 살아 있음을 이런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6장을 보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