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do domus Sanctæ Mariæ Theutonicorum Ierosolimitanorum
□ 편제
튜턴 기사단의 군대는 교단 직속의 기사형제 및 서전트와 함께 기사단 영토의 보조병, 세속기사, 시민병과 외부에서 오는 십자군, 용병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십자군과 용병을 제외하면 기사단령 내부의 군대는 대략 다음과 같이 모였습니다.
교단 직속의 군관구, 즉 콤투라이(Komturei)에는 보통 12명의 기사형제와 60여명의 서전트가 있었는데, 이 숫자는 시대에 따라, 또는 관구의 위치나 크기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15세기 중반의 엘빙(Elbing) 콤투라이에서는 평균보다 4배나 많은 약 50명의 기사형제들이 소수의 성직자들과 함께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콤투라이의 군대는 교단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소속된 장원에서 세속기사와 그에 딸린 수행원들, 원주민 보조병들이 추가되었습니다. 표준적인 콤투라이에서는 100~200명 정도의 전투원을 출정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역 행정구인 포크타이(Vogtei)에서는 대부분 튜턴 기사인 포크트(Vogt)가 역시 관구의 기사들과 보조병들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숫자는 콤투라이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각 관구마다 차이가 있었습니다. 14세기 초의 어느 포크타이에서 동원된 병력은 튜턴 기사 1 명, 봉건 기사 31명, 서전트 60명, 원주민 귀족(Witinge) 60명, 수행원 40명, 자유민 60명으로 모두 합쳐 252명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사단 군대의 핵심은 기병이었으며 이러한 기병들은 1개 랜스(Lance), 혹은 글레베(Gleve)라고 불리는 기본 전투단위를 이루었습니다. 하나의 랜스에는 완전 무장한 기사 한 명과 그를 수행하는 2명의 기병을 기본으로 다른 서전트들이 추가되어 최대 7명까지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러한 랜스들은 서로 모여 하나의 배너(Banner), 즉 군기(軍旗) 아래 모여 더 큰 군사단위를 이루었습니다. 명목상 배너는 각각의 콤투라이나 기사단 내부의 주교령, 또는 자유도시들에서 출정한 군대 및 기사단에 고용된 용병단을 대표했습니다. 이러한 단위 배너들은 기사단의 배너 아래에 모여 사령관(마샬 Marschall), 또는 대 기사단장(호흐마이스터 Hochmeister)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또한 십자군이나 동맹군들 역시 각자의 배너를 가지고 종종 기사단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이러한 배너들의 이미지를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폼메라니아의 최대 교역도시 겸 콤투라이였던 단치히(Danzig)의 배너입니다. 원래 이름은 그다인스크(Gdansk)로 폴란드의 포메렐리아 지역에 위치한 공국의 중심지였지만, 1308년 튜턴 기사단에 의해 무단 점거되어 1332년까지 벌어진 기사단-폴란드 전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 폴란드 령의 콤투라이에서는 튜턴 기사들뿐만 아니라 옛 폴란드의 봉건 기사들도 기사단의 신하자격으로 참전했을 것입니다.
기사단 군대의 편성은 그때 그때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목표에 따라 달랐습니다. 이교도 영토에 대한 공격은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로 인해 대규모 군대로 수행하기에는 비효율적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소규모의 군사 행동인 라이젠(reysen)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주변 정세가 복잡한 노브고로드나 프스코프 같은 경우에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군사작전이 이루어졌고, 폴란드 왕국과 같이 통합이 잘 된 나라에 대해서는 보다 큰 규모의 군대를 내보냈습니다. 기사단령이 대규모의 적들에 의해 침공을 받을 경우에는 자유도시들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으므로 상당히 많은 수의 군대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 기사단의 원정 (reysa)
봄과 가을은 악명 높은 진흙수렁으로 제대로 된 군사작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사단의 군사활동은 여름철과 겨울철에 집중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름철에도 이따금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강과 개울을 범람시키고 길을 망가뜨렸으며, 겨울철에도 폭설이 내려 길이 끊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무겁게 무장하고 군사물자를 잔뜩 짊어진 기사단 군대는 진흙과 눈의 바다 속에 갇혀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었고, 보다 가볍게 무장한 이교도들의 급습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장 식량이 떨어져서 굶어 죽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기사단의 전략은 대체로 짧고 강력한 공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한번의 작전 기간은 길지 않았고 소규모의 분견대가 원주민 길잡이를 앞세워 기동성 있게 이동하였습니다. 이러한 군사활동을 위해 치밀한 정찰과 정밀한 작전계획 수립이 요구되었습니다. 매년 기사단 수뇌부는 원주민 정찰대의 보고를 받아 작전지역을 파악하고 이교도들의 취약한 부분을 분석하여 공격목표를 결정했습니다.
일단 작전이 시작되면 최대한 신속하고 빠르게 할당된 공격 목표를 무력화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중간중간에 보급 창고를 만들고 보급품을 보관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적진 깊숙이 침투하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일정량의 보급품은 말에 싣고 직접 운반하였습니다.
지형이 험난했기 때문에 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마차(wagon)는 거의 사용할 수 없었고 발트 산(産)의 작은 말(슈베이크 Sweik)에 물자를 실었습니다. (기사들의 전투용 말(데스트리에르 Destrier)에는 당연히 짐을 싣지 않았고, 더군다나 전투를 할 때 말고는 아예 올라타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좋은 말로는 ‘현지조달’,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교도에 대한 약탈행위는 성전의 이념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필수적이었습니다.
고된 행군을 마치고 목표에 도달하면, 군사거점과 주변의 촌락들을 급습하여 불태우고 물자는 약탈했으며 주민들은 보이는 데로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일단 해당 지역이 제압되면 기사단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목재와 진흙을 사용하여 그 지역에 항구적인 군사거점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간단히 그 지역을 신속하게 벗어나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해당 지역을 확보하고 앞으로의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를 설치하는 것이며, 후자는 적의 국력을 깎아 먹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의 대규모 군사활동은 거의 여름철에 벌어졌습니다. 비록 변덕스러운 날씨로 군대의 행군에 지장을 받고 물러지는 땅 때문에 기사들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벌어졌지만 여름철은 비교적 날이 따뜻했고 말을 먹일 목초를 넉넉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내륙 수로를 이용하여 선박으로 많은 수의 병력과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겨울철 역시 중요한 계절이었습니다. 전투원과 말들이 혹한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군대의 주력인 기사를 활용하기에는 상당히 좋은 여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추위로 인한 군마손실 비율이 높았고 말먹이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단점으로 인해 겨울철의 캠패인은 여름철보다 작은 규모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여름이건 겨울이건, 또는 기사단이건 이교도 군대건 간에, 이 지역의 캠패인에서는 험난한 지형과 악천우 때문에 적들과 싸우기에 앞서 먼저 자연과 싸워야 했습니다. 한 번의 캠패인에서 물자를 실어 나르는 짐 말들의 손실 비율은 상당했습니다. 전투원들 역시 행여나 길을 잘못 들어서거나 길이 유실될 경우, 보급품이 떨어져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끝없는 전쟁으로 14세기에 들어와 기독교 영토와 이교도 영토 사이에 광활한 황무지가 놓이게 된 이후부터는 약탈조차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기사단에게 주어진 전장 여건을 고려한다면 라이젠은 효율적인 전술이었습니다. 비록 해당 전투원들의 고생은 막심했지만, 한 번의 캠패인에 나서는 병력 규모는 대체로 약 200명에서 많으면 2000명선이었고 할당된 군사목표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손실된 인력과 물자는 곧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기사단의 군사활동이 라이젠으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사단의 적에 따라 그에 맞춰 대응하는 전략도 달랐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
첫댓글 역시 튜튼 기사단이야...튜튼 기사단의 진군을 직접 보고 싶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