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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근현대의 음악
19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는 제국주의로부터 나치즘, 파시즘 및 독점 자본과 공산 정권의 수립 등 대격변을 겪게 되었다. 근현대에 접어들어 무너진 가치관 속에서 예술가들은 음악의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단원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세계의 음악의 흐름을 알아보고, 우리나라에 도입된 서양 음악의 발전사와 대중음악의 흐름, 그리고 서양 대중음악사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한다.
1 19세기 말~20세기의 음악
❶ 19세기 말부터 음악 창작 방향은 조성 체계가 무너졌어도 체계적인 음악 어법을 구사해 왔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❷ 근현대에 들어 다양하고 새로운 음악 실험들이 진행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1)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사회·문화적 배경
19세기 말은 그야말로 세기말적 징조들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강한 공업국이 되었고, 군사력을 키워 식민지 정책을 펼쳐나갔으며,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해 ‘독일 제국’ 칭호를 쓰는 한편, 영국과 프랑스도 대제국을 꿈꾸며 안팎으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를 견제하며 일으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공업국으로의 상호 경쟁은 노동자들의 소외를 낳아 노동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독점 자본들이 출현하면서 빈부 격차도 벌어지고, 각국의 사회 불안 요소는 점진적으로 쌓여 갔다. 문단과 화단에서는 이미 세기말의 현상을 사실주의,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음악에서도 빈(Wien) 내부의 갈등이 이미 노골화되어 있었다.
※ 19세기 말
1890년대 20대이던 레닌은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있었고, 역시 20대의 스탈린은 노동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상태이기도 했다.
(2) 19세기 말의 음악
1890년 이후 20여 년 동안 음악적 노력은 우선 낭만주의의 조성 체계를 무너뜨리면서도 어떻게 여전히 체계 있는 음악 어법을 구사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많은 음악 사조들이 각기 다른 기법, 특히 변화된 화성 체계를 구사하며 등장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폭넓게 일어났던 것은 강대국들에게 어려움을 겪었던 주변 국가들의 민족주의였다.
각국의 국민 음악은 결과적으로 자국의 음 체계를 음악에 도입함으로써 19세기 조성 체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유럽 각국에서도 인상주의, 표현주의, 원시주의, 신비주의, 미래주의등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게 된다.
※ 1893년에는 브루크너, 1897년에는 브람스가 사망하였고, 바그너는 1883년에 이미 사망하였다.
[1] 후기 낭만주의
독일 낭만주의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포함)에 빈에서 활동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에 의해 그 절정에 달했다. 작품과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화성과 구조는 보다 자유로워졌다.
리스트에 의해 확립된 교향시의 전통은 슈트라우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1896)’는 추상적인 내용을 교향시로 만든 것으로서,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초인(超人) 사상에 대한 시를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Salome, 1905)’와‘엘렉트라(Elektra, 1909)’에는 극적인 묘사를 위해 혁신적인 반음계와 불협화음이 사용되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보헤미아 지방 출신으로 빈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웠으며, 그의 아홉 개의 교향곡은 베토벤과 브람스의 전통적 교향곡의 맥을 잇고 있다.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1908~1909)’와 세 개의 오케스트라 연가곡도 리트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대지의 노래’는 1918년에 완성되었다. 테너와 알토가 교대로 부르는 6개의 독창곡, 곧 ‘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술의 노래’,‘ 가을에 외로운 자’,‘ 청춘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봄에 취한 자’,‘ 고별’등이 관현악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가사는 이태백(李太白)·맹호연(孟浩然)·왕유(王維) 등이 지은 시를 H. 베트게가 번역한 ‘중국의 피리’ 에 의한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 느낀 말러가 인생에 대한 한없는 애착을 중국의 시를 빌려 노래하고 있다.
말러는 민속적·세속적인 선율을 사용하고 이것을 변형·발전시키는 인용기법, 대위법적 짜임새, 지속음과 오스티나토를 통한 전통 화성으로부터의 탈피 등의 음악 어법을 사용하여 당대 예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전주곡
- 저 세상 사람에 대하여
- 한 동경에 대하여
-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 죽음의 노래
- 학문에 대하여
- 평온한 자
- 춤의 노래
- 몽유병자의 노래
※ 말러의 교향곡 8번은 기악과 성악의 규모가 거대하여 ‘천 명의 교향곡’으로도 불린다.
※대지의 노래
‘대지의 노래’는 중국 당시(唐詩)에 음악을 붙인 것으로, 작품의 부제는 ‘테너·알토·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이다.
[2] 민족주의 음악
음악에 있어서의 민족주의는 19세기 말에 유럽의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시작되어 20세기 내내 전 세계에 지속되어 온 가장 수명이 긴 음악사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제국주의(Imperialism)에 맞서 시작되었던 민족주의 음악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 아시아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민족주의 움직임이 도래하는데,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와 1980년대에 정치·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민족주의 음악이 나타나게 되었다. 1970~1980년대 아시아는 필리핀, 중국 등과 함께 음악 이념과 관련된 논의로 치열하였다.
1) 러시아
19세기 말 민족주의적 음악의 두드러진 영향력은 러시아가 발휘하고 있었다.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음악 어법으로 러시아적 줄거리를 갖는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러시아 민족주의를 이끈 또 다른 대표적 인물이었던 발라키레프(MiliAlekseyvich Balakirev; 1837~1910)는 보로딘(Aleksandr Porfiryevich Borodin; 1833~1887), 퀴(Ce´`sar Antonovitch Cui; 1835~1918),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ii; 1839~1881),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y Andreyevich Rimski-Korsakov; 1844~1908)와 함께 러시아 5인조를 구성하여 러시아 음악 양식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무소륵스키가 지은 대규모의 5막 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1872)’와 같은 경우 러시아 어와 음악이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어울릴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이 성장기에 유모로부터 들었던 민요곡들, 자장가, 그리고 러시아 정교의 합창이 들려 주는 화성, 언어로 인해 유발된 불규칙한 리듬 등을 반영하여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무소륵스키는 피아노 성격 소품도 작곡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1874)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건축이 민속적 재료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Victor Hartmann; 1834~1873)의 그림 전시회를 보고 작곡한 작품을 모아 놓은 것이다.
해군 장교 출신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모음곡인‘셰에라자드(Scheherazade; 1888)’에서 러시아와 동양의 풍부한 색채를 보여 주었다.
차이콥스키(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는 러시아 고전주의를 완성한 작곡가로서 민족주의 음악가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한때 러시아 5인조와 교류하던 시절의 초기 작품에서는 러시아 민요나 민속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1875년에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Rococo Theme; 1876)’, 고전 발레곡 ‘백조의 호수(Swan Lake; 1875~1876)’, 교향곡 4번, 교향곡 6번,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Evgeny onegin; 1877~1878)’, 오페라‘스페이드의 여왕(The Queen of Spades; 1890)’, 발레곡 ‘잠자는 숲 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 1888~1889)’,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
1891~1892)’등과 같은 주옥 같은 작품들은 차이콥스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 주었다.
Boris Fyodorovich Godunov, ▲ 러시아 황제 보리스 고두노프의 초상
고두노프는 황태자를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무소륵스키는 푸시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지었다.
※전람회의 그림
‘전람회의 그림’은 여러 작곡가에 의해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되었는데, 그중 라 벨 (Maurice Ravel,1875~1937)의 편곡 작품이 가장 널리 연주된다.
The Heroes' Gate at Kiev ▲ 하르트만이 설계한 키예프 시의 문
이 디자인은 무소륵스키가 ‘전람회의 그림’ 중의 ‘키예프의 대문’ 이라는 곡을 작곡할 때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2) 보헤미아
19세기의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독일어권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하에, 독일 문화에 대항하는 체코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와 드보르자크(Anton?n Dvorˇa´ k; 1841~1904)이다.
스메타나는 독일의 음악 교육을 받았으나, 체코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잘 조화시킨 작곡가이다. 체코 어 대본의 ‘팔려간 신부(Prodana´ neve´sta; 1866)’ 와 같은 민족주의적 오페라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교향시‘나의 조국(Ma´vlast; 1874~1881)’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 주었다.
드보르자크는 독일 음악 어법과 슬라브 춤과 노래의 특징을 잘 조화시켰다. 민속적 색채가 강한 초기 오케스트라 작품인 ‘슬라브 무곡집(Slavonic Dances; 1878)’외에도 9개의 교향곡과 많은 기악곡 및 성악곡을 작곡했다.
3년 동안 미국에 거주할 때 작곡한 ‘신세계 교향곡(From the New World; 1893)’은 소나타 형식의 1·4악장,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를 2·3악장으로 갖는 전통적인 4악장 구조로 작곡하였는데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Bedrich Smetana ▲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s The Bartered Bride. Bed?ich Smetana - Prodan? nev?sta The Bartered Bride, Act I, 1/3 ▲ 스메타나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의 한 장면
1866년에 초연된 이 작품은 체코의 민속 무곡을 재치 있게 살렸고 농민들의 꾸밈새 없는 흥겨움이 즐거운 작품이다.
▲ 드보르자크 Antonin Dvorak
드보르자크는 단조에서 이끎음을 반음 내려 선법화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핀란드는 1890년대가 되어서야 핀란드 어를 국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스칸디나비아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던 노르웨이에서는 민심의 동요와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민족주의의 작곡가로는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가 대표적이며, 핀란드의 작곡가로는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를 들 수 있다.
‘페르 귄트 모음곡(Peer Gynt Suite; 1876)’은 그리그의 대표작으로 헨릭 입센(Henrik John Ibsen; 1828~1906)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극음악이다.
그리그는 여기에서 서정적인 선율과 5음 음계, 장단조 혼용, 노르웨이 민요 특유의 선율과 화성을 통한 민족적 특성을 나타내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1868)은 아름다운 낭만주의적 성부 짜임새와 리듬 구조를 드러낸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자연을 제목으로 붙인‘핀란디아(Finlandia; 1899)’를 작곡하였다.
※ 핀란디아
핀란디아는 1899년에 핀란드 인들의 출판의 자유를 위한 정치 행사를 위해 위촉된 작품이다.
4) 에스파냐
에스파냐는 자국의 음악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폭넓은 합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와 알베니스(Issac Albe´niz)는 에스파냐의 열정이 담긴 선율과 무곡 리듬 등을 구사하면서 에스파냐 음악을 대변하게 되었다.
5) 영국
엘가(Sir Edward Elgar; 1857~1934)는‘위풍당당 행진곡(Pomps and Circumstances; 1901)’에서 위엄이 풍기 는 음악을 선보였으며,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는 민속적 자료를 바탕으로 16세기 영국의 다성 음악, 찬송가, 민요 등의 소재를 많이 사용하여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푸른 옷소매 환상곡(Fantasia on Greensleeves; 1934)’은 16세기 말 영국 민요 선율에 의한 것이다. 홀스트(Gustav Theodore Holst; 1874~1934)도 이 시기의 중요한 영국 작곡가이다.
6) 미국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였던 맥도웰(Edward Alexander MacDowell; 1860~1908)은 피아노 소품과 오케스트라 모음곡에서 재즈적인 화음과 미국민요, 그리고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선율 등을 음악적 재료로 사용하였다.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도 잘 알려진 이 시기의 미국 작곡가이다.
※ 맥도웰의 모음곡 2번은‘전설’, ‘연가’, ‘전쟁시’, ‘장송가’, ‘마을 축제’의 다섯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3] 인상주의
음악에 대한 개혁 운동을 바탕으로 1890년대에 프랑스의 젊은 작곡가들은 다른 나라와 뚜렷이 구별되는 프랑스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회화의 인상주의(Impressionism)에 이어 나타났기 때문에 이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한다. 인상주의 음악의 특징은 전통 화성에서 벗어나 장단조가 아닌 선법으로 구성된 선율을 사용하고, 반음계주의를 피했다.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는 화단의 인상주의와 문단의 상징주의, 그리고 새로운 세계 문화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반독일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빈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고자 했다. 그의 작풍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음악은 감각적인 호소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즉각적인 기쁨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제의 동기나 악구를 다양하게 반복시키거나 자유롭게 변형시켜서 자연스러운 형식을 만들어 냈는데, 이러한 기법은 독일 음악에서 두드러지는 동기의 발전 기법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드뷔시는 ‘야상곡(Nocturns; 1897~1899)’에서 약음기를 사용한 현 음향 및 유니즌 편성, 가사 없는 합창, 다양한 타악기 음향 구성 등의 참신한 오케스트라 기법을 선보였다. 그의 교향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Pr´elude` a l’apres midi d’un faune; 1894)’은 인상주의 음악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서 20세기의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 인상주의적 작풍이 두드러진 드뷔시의 주요 작품으로는‘현악 4중주; 1893’, 피아노를 위한 두 권의‘전주곡(Pre、ludes; 1910, 1912)’, 관현악곡‘바다(La Mer; 1903~1905)’, 오페라‘펠리아스와 멜리장드(Pelle、as et
Me、-lisande; 1893~1902)’가 있다.
드뷔시 외에 인상주의 작곡가로는 라벨(Joseph Maurice Ravel; 1875~1937)이 있다.
Stage design for Vaslav Nijinsky's L'Apr?s-midi d'un faune, designed
▲‘목신의 오후 전주곡’ 발레 공연을 위한 무대 디자인
말라르메의 시에 곡을 붙인 최초의 인상주의 작품이다.
L?on Samoilovitch Bakst's costume design for Vaslav Nijinsky in the Ballet Russes 1912 performance of "Afternoon of the Faun".
▲‘목신의 오후 전주곡’ 초연 프로그램 표지
1912년 디아길레프에 의해 발레로 초연되었다.
※ 인상주의
회화에서 시작된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작품의 제목인 ‘인상: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 1972)’에서 비롯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상을 분명하게 그려내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고 대상뿐만 아니라 배경과 순간적인 느낌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고자 하였다.
※ 드뷔시의 에세이들을 보면 진정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들이 있고,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인도네시아 음악이 화성법과 대위법을 몰라도 완벽하게 자연과 조화되는 음악이라고 적고 있다.
▲ 드뷔시
※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는 프랑스 신화와 전통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용면에서 독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비견할 만하다.
[4] 표현주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20세기 초 당시 현대인들의 긴장과 공포, 불안과 갈등 등 내면 세계를 표출하는 흐름이다. 이것은 표현주의 회화에서 유래하였으며, 음악에서의 표현주의는 일반적으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와 베르크(Alban Berg)의 초기 무조성 음악을 가리킨다.
쇤베르크는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에 작곡된 현악 6중주곡 ‘정화된 밤(Verkla¨ rte Nacht)’ 에서 후기 낭만주의 사조를 보여 주었으나, 이후 후기 낭만주의 음악 어법에 한계를 느끼고 점진적으로 무조성으로 향하였다. 최초의 무조성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쇤베르크의 작품으로는‘현악 4중주 제2번(Op. 10; 1908)’의 마지막 4악장과 연가곡‘공중 정원의 책(1909)’, 그리고 한 여인의 비틀어진 내면을 심리적으로 드러낸 ‘기대(Erwartung; 1909)’, ‘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 Op. 21)’등을 들 수 있다.
‘달에 홀린 피에로’는 전통적인 조성과 화성, 형식과 구성 등을 부정하고 자유로운 면에서 음악을 직관적으로 창작한 대담한 작품으로 모두 3부 21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자를 잃은 선율, 긴장되면서도 이상한 느낌을 주는 음향, 복잡한 구상과 야릇한 분위기 등은 모두가 그때까지 대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반주도 독특한 작은 실내악(室內樂)으로 편성되었다.
▲ 뭉크의‘절규’(1823)
※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밖으로 표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Arnold Schoenberg ▲ 쇤베르크
[5] 원시주의
원시주의(primitivism) 는 인위적인 법이나 이성적 정신 활동에 대립하는 정신이다. 음악에서는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유산을 바탕으로 그 연장 선상에서 스트라빈스키(Igor Fyodorovich Stravinsky; 1882~1971)가 음악
적 원시주의를 시도했다. 그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은 태양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태고의 의식을 니진스키가 안무한 무용 음악이다. 이 작품은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충동을 원시적 색채로 그려 냈다는 점에서 원시주의의 대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서로 다른 조의 화성을 수직적으로 겹쳐 놓은 방법으로 기존의 조성 체계를 와해시키고, 불규칙한 악센트의 강렬한 리듬을 사용한 이 곡이 파리에서 초연되었을 때 찬반 양측의 야유와 싸움으로 난장판이 되었다고 한다.
※ 스트라빈스키는, 1909년에 러시아 발레단을 이끌고 파리에서 큰 반향을 얻었던 디아길레프로부터 작품 위촉을 받고 ‘불새’ 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그 이래 러시아적 색채가 강한 무용 음악 ‘페트루슈카(1830)’를 작곡하였다. 이후 작품인 ‘봄의 제전’ 은 강렬한 리듬과 화음으로 원시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이 음악을 듣고 이후 4년간 유럽 전체를 휘몰아칠 전쟁을 예고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Le Sacre du printemps (1913). ▲‘봄의 제전’을 공연한 무용수들
1913년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공연 모습을 그렸다.
[6] 신비주의
신비주의(mysticism) 음악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스크랴빈(Aleksandr Nikolae-vich Skryabin)은 심령 과학과 니체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세상의 흐름에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술만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스크랴빈은 세상의 구원을 갈구하는 연주회를 인도의 어느 호숫가에서 흰옷을 입고 향을 피우면서 하기로 하였으나, 인도로 떠날 준비를 하는 와중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크랴빈의 혁신적 면모는 역시 화성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4도 화음을 기초로 하여 6음으로 구성된‘신비 화음(mystic chord)’을 사용했다. 이 화음들은 장·단조 체계의 연결을 희미하게 하고 음향적으로는 신비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또한 그는 7음으로 구성된 장·단조 음계 대신 8음 음계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음 자체보다 시(詩), 빛, 향기, 무용 등이 결합된 예술 형태에서 종교적인 무아(無我)의 경지를 느끼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러한 경향은‘피아노 소나타 5번(1907)’, ‘프로메테우스 교향곡(1909~1910)’에서 잘 나타난다.
※ 스크랴빈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일반인과 달리 음을 통해 색채와 냄
새를 맡을 정도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7] 미래주의
미래주의(futurism)는 전통을 부정하고 기계 문명이 가져온 도시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美)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세기말에 화가와 조각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파리와 독일에서 사회주의운동과 예술 작업을 했던 다다이즘과 일맥상통한다.
음악계에서는 루솔로(Russolo; 1885~1947)가 미래파 음악을 주도했는데, 그는 본래 미래파 화가였다. 그는 기계 도구 모음 악기라 할 수 있는 것을 제작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노동자 계급을 지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미래주의는 이 시기의 많은 사조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이었다. 선율·화성·형식 등 모든 것과 결별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을 이후에 나타난 ‘구체 음악(musique concrete)’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한다.
※ 미래주의의 음악은 기계적인 잡다한 소리로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위해 만든 음악이라고 들려주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서 이 음악은 외면을 당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이 음악을 미래주의라기보다 ‘소음주의’ 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3) 20세기 초의 음악(제1차 세계 대전 전후)
1890년대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아무도 누구를 비난할 수 없었던 과도기에 작곡가들은 예술에 대한 질문과 답을 스스로 해 나가면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피압박 민족들은 세계 곳곳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고,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 그리고 발칸 반도 등의 종속국들은 격렬한 저항을 하면서 갈등을 겪었다. 상대적으로 낭만적이었던 국민 음악이 이제는 민족 투쟁의 민족 음악으로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지배국에서 생산된 이 시대의 음악은 각 나라의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음악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유럽의 중심국에 속해 있는 작곡가들은 자국의 전통 음악 바탕 위에서 분열되어 가는 시대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을 키워 갔다.
※ 1914년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은 영국ㆍ프랑스ㆍ러시아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ㆍ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었고,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1] 신(新)음악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대 독일에서는 신음악(Neue Musik)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음악이란 19세기의 전통을 완전히 거부하고자하는 경향의 다양한 음악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였다.
[2] 다다이즘
기존의 유럽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1917년에 휠젠베크(Richard Hu¨`lsenbeck; 1892~1974)와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이 주창한 다다이즘(Dadaism)은, 통합적 매체 활동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사회
주의와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면서 파격적인 형식을 창출하였다.
이들의 독설적이고 충격적인 전시회와 행위 예술은 때로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외설적이기까지 했고, 혁명을 지지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작업은 서로 다른 장르와 재능들을 한 작품에 융합시켜 목적을 달성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런 작업들은 익명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풍자적 기법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의 특징이었다.
이들은 오직 지속적이고 순수한 정신을 계속적인 행동으로 이행할 것을 종용했다. 예를 들어 1921년에 공연된 님만(M. Niman)의 오페라 ‘다다(Dada)’는 독창적인 온갖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는데, 내용도 온통 선언문과 텍스트 낭독으로만 이루어졌고, 등장인물들은 각국의 수장 등 당대 유명 정치가들로 분장한 다다이스트들이었다.
역사 속에 자리한 인류 문화의 우상을 모두 타파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결국 20세기를 여는 아방가르드적 정신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20세기초만 해도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대중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차후 전개될 팝 아트의 길을 닦아 주는 역할을 했다.
※ 다다이즘
다다이스트들은 정신적 사회주의자들로서 정치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하면서도,예술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4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중에는 ‘독일은 멸망해야 한다(Deutschland muss untergehen)’라는 것도 있었다.
Bilan ?. SIC, Paris, 1919.
Raoul Hausmann Dada Siegt, 1920,
▲ 라울 하우스만의 책 “다다는 승리한다”(1920)
※ 초기에는 민족주의 음악을 작곡했고 이후 원시주의와 신고전주의를 열었던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음렬 기법을 수용하고 음렬 음악을 작곡한다.
[3]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는 전후 사회의 경제적 공황 상태에서 다시 이성의 시대를 갈구하는 방향을 택한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19세기와 과거 전통들을 반대하는 급진적 모더니즘(modernism) 대신 유럽의 옛 음악들의 특징을 오늘에 맞게 부활시키는 활동이 혼란한 시대에 다시 균형 있는 의식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스트라빈스키는 1919년에 디아길레프로부터 페르골레지(Giovanni B. Pergolesi; 1710~1736)의 음악을 발레용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이 무용 음악이‘풀치넬라(Pulcinella)’이다. 이 곡의 화성은 대체로 원본에 가깝지만, 스트라빈스키는 군데군데 불협화음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페르골레지의 작품을 통하여 18세기 전반의 작품 기법을 살펴보고 여러가지 기법의 유용성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후 온음계적 화성이 주를 이루는 18세기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특유의 음악 어법을 첨가한 오페라 ‘마브라(Mavra)’, ‘8중주(Octet)’,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 ‘시편 교향곡(Symphonie des Psaumes)’등 신고전주의 양식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벨라 버르토크(Bela Barto´`k; 1881~1945)는 민족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때의 헝가리 태생으로 20세기 초에 활동한 작곡가이다. 불규칙적이며 변화가 많은 민속춤과 언어의 리듬을 단계적 피아노 연습곡‘미크로코스모스
(Mikrokosmos)’에 적용하였으며, 많은 오케스트라 작품을 통해 초기 고전주의 시대의 형식과 악기 편성, 연주 기법 등을 20세기 음악으로 재현해 내었다.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에서 작곡가 및 이론가이자 교수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너무 난해하여 의사소통 기능을 상실한 당대의 무조성 음악을 거부하고, 고전주의적 기법과 형식으로 주제를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작곡하였다. 그는 바로크 시대에 널리 쓰였던 콘체르토 그로소, 토카타, 무곡 등을 부활시켰으며,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여 독주곡과 이중주곡들을 작곡했다.
‘화가 마티스(Mathis der Maler,1934)’는 신고전주의의 전형을 보여 준다.
라벨(Joseph Maurice Ravel; 1875~1937)은 드뷔시와 유사한 인상주의적 작법을 사용하여 인상주의 작곡가로도 불린다. 그는 음악 형식면에서는 고전주의의 형식을 존중한 신고전주의적 작법을 사용하였으나 선율과 화성은 선법과 온음 음계를 사용하여 신비로운 음색을 창출하였다. 라벨은 뛰어난 오케스트레이션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볼레로(Bole、ro; 1928)’와 무소륵스키의‘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편곡에 그 능력이 잘 발휘되어 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1899)’,‘ 물의 희롱(Jeux d’eau; 1901)’,‘ 소나티네’는 20세기 피아노 작품의 걸작으로 꼽힌다.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 1891~1953)는 러시아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로서‘고전 교향곡(Classical Symphony)’,‘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피터와 늑대(Peter and the wolf)’등
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 파리의 무용계와 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스트라빈스키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사회적 상황에 알맞은 소편성 무대 공연용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첫 작품이 ‘병사 이야기’ 였다.
Bela Bartok Hungarian composer during recording of folk songs in Darazs village in 1909
▲ 버르토크가 음악을 채록할 때 만난 헝가리 농민들의 모습
※ 버르토크는 음악학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헝가리와 그 주변 국가를 여행하면서 민요를 모아 민요에서 새로운 선율적·화성적 전개 방식을 찾았다. 버르토크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헝가리 민속 음악은 문명사회나 다른 민족들의 음악과는 달리 순수하고 자생적이었다.
※ 청중과의 교감을 중시하였던 힌데미트는 1920년대 후반부터 실용 음악을 주창하였다.
※ 라벨의‘볼레로’
라벨의‘볼레로’는 1928년 10월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오케스트레이션 기교가 최고도로 발휘된 걸작이다.
※ 피터와 늑대
‘피터와 늑대’는 1936년에 작곡되어 그해 5월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신고전주의적 경향의 작품으로, 피터·할아버지·사냥꾼·늑대·고양이·새·집오리와 같은 주인공들이 각각 특정 악기와 주제에 의하여 표현된다.
[4] 프랑스 6인조
프랑스 6인조(Les six)는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를 정신적인 아버지로 삼았고, 청중들이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명료하고 산뜻한 구조의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다. 여섯 명의 작곡가들은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95), 미요(Darius Mihaud; 1892~1974), 풀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 오릭(Georges Auric; 1899~1983), 뒤레(Louis Durey; 1888~1979), 그리고 유일한 여성 작곡가인 타유페르(Germaine Taileferre; 1892~1983)이다.
프랑스 6인조의 정신적인 아버지로서 짐노페디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사티의 특징은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에 있다. 생계를 위해 몽마르트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살았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바그너로 대변되는 후기 낭만주의의 쇠퇴에 대하여 역설적 순수함과 재치, 그리고 풍자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5] 12음 기법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 베베른과 베르크는 1910년대부터 오스트리아의 빈을 중심으로 무조성 음악 작곡가로 활동하였는데, 이 세 명을‘제2 빈악파(Second Viennese School)’라고 부르기도 한다.
20세기 음악에서 쇤베르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특이하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그다지 자주 연주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 자체가 사랑을 받는다기보다는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그것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 면에서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쇤베르크의 판단처럼 20세기 초엽의 음악 양식은 무조성을 향하고 있었고, 쇤베르크는 여기에 푯대를 든 선봉적 작곡가였던 것이다.
1910년대부터 꾸준히 연구와 작업을 해 오던 쇤베르크는 무조 음악(atonal music)을 거쳐 수년간의 번뇌와 침묵을 깨고 12음 기법(Serial Techniqe)을 창안하여 1920년대부터 다시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쇤베르크가 고안해 낸 음렬 기법의 취지는 완전한 무조성 음악을 성취하기 위하여 음렬을 만들어 12음을 모두 한 번씩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에 작곡한‘피아노 모음곡 Op.25’는 작품 전체를 하나의 완전한 음렬 음악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유태인 박해로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 쇤베르크는 미국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점차 큰 규모의 작품인 ‘바이올린 협주곡 Op. 36(1936)’과 ‘피아노 협주곡 Op. 42(1942)’등 대편성 작품들도 모두 음렬 기법을 사용하여 작곡하였다.
※ 제2 빈악파는 고전 시대의 빈 악파(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비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음렬과 변형의 예
㉠ 기본 음렬(original)
㉡ 뒤에서부터 거꾸로 출현시키는 역행 음렬
㉢ 전위하여 사용하는 전위 음렬
㉣ 역행 음렬을 전위하는 역행-전위 음렬
▲ 쇤베르크
※ 1904년 무명의 작곡가였던 쇤베르크가 작곡을 배울 학생을 찾는 광고를 냈다. 이 광고를 보고 찾아간 두 명
의 학생이 베르크와 베베른이었고, 이 3인은 향후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어 동지적 관계가 되었다.
▲ 알반 베르크의‘룰루’ ALBAN BERG Lulu
베르크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서 스승인 쇤베르크, 동문 베베른과 함께 무조 음악에서 12음 음악으로 나아갔는데, 낭만파적 성향이 가장 강하였다.
그의 작품은 긴장에 찬 극적 표현과 격렬한 감정의 표출에 뛰어났다. ‘현악 4중주 Op. 3(1909~1910)’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 세계를 드러냈으며 이후 베르크는 사회 고발적 내용의 오페라 ‘보체크(Wozzeck)’ 를 작곡하는데, 이것은 20세기 오페라의 주요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의 현악 4중주를 위한 ‘서정적 모음곡(Lyrische Suite; 1925~1926)’은 음렬을 사용한 작품으로서 베르크의 음악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베베른(Anton von Webern)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며 독자적인 작풍을 추구하여 무조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12음 기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적 의식은 스승 쇤베르크 및 동문 베르크보다 진보적이었고, 본질만을 말하려는 정밀한 기법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베베른의 작품은 매우 짧고 밀도가 있으며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관현악을 위한 파사칼리아(Passacaglia)를 작곡함으로써 그만의 작품 색을 갖게 되었고, 초기 작품 이후에 음렬 기법을 사용하여 ‘현악 3중주곡 Op.20(1927)’을 작곡하였다.
그의 ‘칸타타’ 2번은 베베른의 원숙기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힌다. 베베른은 나치의 핍박 속에서 칩거하면서도 칸타타,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 30(1940)’등의 역작을 작곡하였다.
※ 보체크
이 오페라는 주인공인 보체크와 같이 가난하고 약한자들이 겪고 있는 비참함, 좌절감에 대해서 깊은 연민의 정을 담아 표현한 비극작품이다. 귀에 거슬리는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듯한 악절과 잔혹할 정도의 불협화음, 스타카토의 사용 등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
베베른의 짧고 밀도 있는 작품은 낭만파 음악 시대의 대형화 추세와 완전히 단절을 의미하는 듯하다. 나치는 베베른의 작품 연주를 금지하고 그의 글들도 불살라 버렸다.
[6]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예술
그런가 하면 제1차 세계 대전과 더불어 국내의 혁명을 완성한 러시아는 문화 및 예술에 있어서도 실험주의를 숙청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1917년 혁명 후 1920년 소련의 작곡가들은 서방 세계로 망명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법을 규약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1930년대 스탈린 집권 이후 러시아에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예술관이 확고히 자리를 잡게된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이 완성을 보인 시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시킨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만큼이나 상반되는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프로코피예프는 20대였고, 쇼스타코비치는 10대였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아예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이미 온갖 장르에 매혹되어 있었고, 전위 음악인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때였다.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이 발표한 교향곡 6번이 공산당 중앙 집권 위원회와 소련 작곡가 동맹으로부터 규탄을 받았으나 그 어떤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창조적 욕구에 부응하는 작품을 조용히 썼다.
쇼스타코비치(Dmitrii Di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도 초기에는 현대 음악 그룹에 있었지만, 15곡의 장대한 교향곡을 체제 순응적 태도로 작곡하며 소련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교향곡의 시대는 사라졌다고 외쳤던 서방 세계와는 달리, 러시아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혁명적 음악의 요구에 의해 20세기에도 교향곡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 간 나라가 되었다.
※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레닌의 정책에 따라, 소련작곡가 동맹 규약에는‘모두의 행복을 위하는 탁월하고 영웅적인 소련 인민 정신의 아름다운 특성, 또한 미와 생을 긍정하는 박력넘치는 음악을 구현해야 한다’는 규약이 명시되어 있었다.
Dmitri Shostakovich ▲ 쇼스타코비치
※ 이 시기에 무소륵스키의 음악들이 다시 교향적 음향으로 편곡이 많이 된 것도 이러한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회적 배경 때문이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음악
제1차 세계 대전 후 극도로 상황이 악화된 독일 사회는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면서 극우적 사고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한편으로는 나치즘이 대두되었다.
전쟁을 비롯한 정치적 상황으로 쇤베르크를 비롯한 버르토크(Barto′k), 힌데미트(Hindemith) 등 20세기의 중요한 작곡가들은 미국 망명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음악의 또 다른 발원지가 미국이 된 데에는 이들의 공헌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한 쇤베르크는 1951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음렬 작법의 음악들을 지속적으로 썼다. 그는 미국의 밀튼 배빗 같은 작곡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 총렬 음악
총렬 음악이란 음높이가 순서대로 나오게 하는 음렬 음악에서 더 나아가 음악의 모든 요소, 즉 각 음의 세기, 다이내믹과 리듬에까지 열(列)의 개념을 적용하는 음악을 말한다.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은 총렬 음악의 기반을 닦은 작곡가인데, 그의 다양한 리듬과 새로운 음색에 대한 추구는‘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Quatuor pour la fin du temps)’,‘ 투랑갈릴라 교향곡(Turangalila
Symphonie)’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4개의 리듬 연습(Quatre etudes de Rythme)’가운데 네 번째 곡‘음가와 강세를 위한 모드(Mode de valeurs et d’intensites)’에서 리듬을 세분하고 열의 법칙을 적용한 방법은 총렬주
의 기법의 토대가 되었다.
메시앙의 제자였던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1925~ )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구조 I, II(Structures pour deuz pianos, premier livre,1952)’에서 총렬주의의 전형을 보여 주었으며,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은‘대위점들(Kontra-Punkte; 1952~1953)’, ‘시간의 속도(Zeitmasse; 1956)’, 세 개의 관현악단을 위한 ‘그룹들(Gruppen; 1955~1957)’에서 총렬 음악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 1930년대에는 ‘젊은 프랑스(메시앙, 졸리베, 다니엘,보들리에)’가 결성되었고, 그중에서도 메시앙은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 수단을 추구하며 프랑스 작곡계의 제1인자 위치를 지켰다.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는 나치 수용소에서 작곡된 것으로, 인도의 리듬 원리를 14세기 동형 리듬과 접목시킨 것이다.
[2] 실용 음악 (Gebrauchsmusik)
청중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신고전주의적 작품을 작곡하던 힌데미트(Paul Hindemith)는 자신의 음악적 사고를 더욱 명료하게 정리하게 되었다. 힌데미트는 알기 쉬운 음악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대를 적극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채롭게 실천하였다. 그는 이러한 음악을‘실용 음악’이라 불렀고, 어린이 음악·라디오 음악·애호가를 위한 음악·가정 음악·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 등을 만들어 작곡가와 청중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참여하여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힌데미트는 아마추어와 학생들을 위해 소나타·실내악곡·마드리갈·모테트 등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저서“작곡 기법”에서는 조성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12음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그중 한 음을 중심음으로 하여 조성적 중심을 두도록 하였다.
※ 가난한 노동 계급의 도장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실리적이고 자립적인 성격을 지녔던 힌데미트는,악상을 정연하게 제시하는데 더 재능을 보이며 신고전주의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고 나아가 실용 음악을 주창했다. 그는 저서에서 “작곡을 위한 작곡은 자신에게서 영원히 사라졌다.” 라고 선언하고 작곡가는 고립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이므로 음악을 도구로 자신의 기능을 이용해 벗들과 교류하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의무라고 밝혔다.
[3] 전위 음악
전위 음악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음악이라고도 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아방가르드 정신은 음조직을 논리적으로 조직하는 유럽의 음렬 음악과 상반된 성격의 음악으로 나타났다.
전통적 미학에 대해 도전한 화가 뒤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모든 소리는 음악이다”라는 소신으로, 소음으로 분류되던 일상의 소리를 다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의 고서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변화와 우연에 관심을 갖고 작품의 선택과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우연’ 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피아노 현에 고무·나사·종이 등을 삽입하여 일상의 소리를 연주하는‘프리페어드(미리 조작된) 피아노를 위한 작품’과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서 침묵하는‘4분 33초’,“ 주역”에서 나온 도표와 동전 세 개를 던져서 음높이·지속 시간·음색 등을 결정하는 ‘변화의 음악(Music of Change)’ 으로 구체화되었다.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케이지의 미학과 가까운 팝 아트(pop art)는 1950년대 초 영국에서 그 전조를 보였으나,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팝 아트는 추상 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매스 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 문화를 예술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 구조를 불식시키고, 산업 사회의 현실을 예술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운동이다.
행위를 가장 중요한 예술로 여기는 해프닝과 플럭서스(fluxus)도 존 케이지의 영향에 의한 것이며,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이 1960년대를 전후하여 발표한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위한 에튀드(Etude for Pianoforte 1960)’에서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케이지의 와이셔츠를 찢고 넥타이를 잘랐다. 그는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듯이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는 ‘길에 끌리는 바이올린(1961)’ 과 같은 행위 예술로부터 ‘음악 전람회-전자 텔레비전(Exhibition for Music: Electronic Television; 1963)’ 으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선보였다.
유럽에서는 불레즈나 슈톡하우젠과 같은 총렬주의 작곡가들은 우연성을 작곡에 도입하게 되었다. 불레즈는 완전히 의지를 벗어난 우연성이 아닌‘변형 가능한 형식’으로서의‘알레아 음악’을 구상하였는데‘피아노 소품 XI’에
서 19개의 단편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채 기보되어 있는 한 장짜리 악보로, 연주자가 임의로 단편을 선택하여 형식을 확정하게 하도록 하였다.
미니멀 음악(Minimal Music)은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니멀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는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 )와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 )를 꼽을 수 있다. 필립 글래스는 70년대 이후 미니멀 음악의 대표자였으며,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작곡가로도 활동하여 큰성공을 거두었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서투른 피아니스트 (백남준, 1986)
※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본부대가 나가기 전에 길을 터 주는 역할을 하는 전위 부대를 지칭하는 군대 용어이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 저항, 그리고 변혁보다는 회피를 선호하는 히피들의 문화를 만들었다.
John Cage ▲ 존 케이지
John Cage, Fontana Mix
▲ 존 케이지의 Fontana Mix 악보
▲ 백남준
※ 백남준
백남준 작품은 미술과 음악에서 동시에 다루어지는데, 그의 작품은 예술의 장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 미니멀 아트는 장식적인 내용이 배제된 단순성, 즉 대상의 본질만을 남긴 최소 단위를 보여 주는 것이다.
※ 필립 글래스는 영화‘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와 ‘디 아워스(The Hours, 2002)’의 음악 작곡가이기도 하다.
[4] 구체 음악
전자 음악의 효시는 구체 음악(music concrete)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 음악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피에르 셰퍼(Pierre Schaeffer; 1910~1984)는 소음, 악기 소리, 새소리 같은 구체적인 음향을 녹음한 후 변형 가공하여 스피커를 통해 재생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 구체 음악
존 케이지(John Cage)는 심지어 “트럭 소리, 빗 소리를 사로잡아 조종하고 싶다. 음향으로서가 아니라 악기로서 말이다.”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이는 후에 테이프 녹음기의 발명과 함께 현실화되는데, 이것이 피에르 셰퍼가 이끌었던 1948년경 프랑스의 구체음악 작업이다.
[5] 전자 음악
전자적으로 생성된 소리에 의한 전자 음악(electronic music)은 1951년 독일 쾰른 방송국에 설립된 전자 음악 스튜디오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음원을 발생하는 새로운 악기라고 할 수 있는 발진기(oscillator)의 발명으로 가능해졌다.
기존의 소리에 대한 변형과 가공이 아니라‘전자음’이라는 인공적 소리로 작곡한 최초의 작곡가는 슈톡하우젠(Karl heinz Stockhausen; 1928~2007)이다. 그는 총렬 음악 작곡가이자 이론가였는데, 쾰른의 서부 독일 방
송국에서 최초의 전자 음악‘습작 I(Studie I, 1953)’ 제작에 성공하였다.
슈톡하우젠은 ‘젊은이의 노래(Gesang der Ju¨ n–glinge, 1955~1956)’에서 전자 음악과 구체 음악의 합성된 소리를 5개의 스피커로 연주하는 공간감을 실험하였으며, 전자 음향과 피아노, 타악기를 융합한 작품(Kontakte)도 작곡하였다.
슈톡하우젠 이후에 전자음만으로 작곡한 주요 작곡가는 헝거리 태생으로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리게티(Gyo¨ rgy Ligeti; 1923~2006)가 있다. 그는 순수한 전자 음악인‘분절법(Artikulation; 1958)’을 작곡하였다.
※ 습작과 분절법과 같은 전자음악에는 다음과 같이 감상자들에게 음향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청취용 악보’가 제공되기도 한다.
▲ 리게티의‘분절법’청취용 악보
[6] 음색 작곡
1960년대 이후의 음색 작곡(Klangkomposition)은 리게티와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 )로 대표된다. 1961년 발표된 리게티의 관현악곡 ‘아트모스페레(Atmospha¨ re, 1961)’에서 리게티는 음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다루었다. 전체적으로는 선적 선율이 없이 생성하고 사라지는 듯한 연속적인 흐름으로 들리게 되는데, 리게티는 2도 음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음정과 화성을 제거하고 관습적인 리듬 구성을 배제하였다.
※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 펜데레츠키의 음색 작곡을 대표하는 작품은‘아나클라시스(Anaklasis, 1959~1960)’와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Threnody to the Victims of Hiroshima, 1960)’가 있다.
(5) 20세기 말의 음악
[1]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다원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는 움직임,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비판,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정신에서 연장된 모든 움직임을 포용한다. 페미니즘과 음악, 크로스오버 음악(crossover music), 세계 음악(world music) 등에 대한 관심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1970년 이후 음악계의 움직임이다.
여성 작곡가들의 활약: 20세기에는 여성 작곡가들의 활동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1947~ ), 소피야 아스가토브나 구바이둘리나(Sofija Asgatovna Gubajdulina; 1931~ ), 박영
희(1945~ )를 포함한 비유럽 계통 여성 작곡가들의 활동은 20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진은숙(1961~ )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극단의 장르를 하나로 묶어 내는 기교를 지닌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 2007년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된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현대 오페라와 뮤지컬의 중간 영역에 해당되는 작품인데, 원작 내면에 있는 심리적 간극을 파악하고,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매혹적인 소리로 표현했다.
[2] 컴퓨터 음악
1946년에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발명된 후 반도체의 등장에 이어 1971년에는 디지털 신시사이저의 출현으로 전자 음악은 급속한 발전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컴퓨터 음악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음을 합성하고 음색을 결정하는 많은 부분이 신시사이저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컴퓨터 음악은 독립된 하나의 음악 장르로서뿐만 아니라 실험적 음악극,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사운드 아트, 영화 음악, 설치 예술 등과 같이 모든 예술의 영역과 결합되어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컴퓨터 음악은 새로운 음향을 합성하고, 작곡 시스템을 확대하며, 전자적 악기의 개발과 그 연구 성과를 창조적 예술품 생산으로 연결해 나가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컴퓨터는 디지털 데이터를 이용하여 작업하기 때문에 ‘디지털 음악’ 이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Kurzweil PC361 Keyboard Synthesizer ▲ 키보드형 신시사이저
※ 1982년에 등장한 미디(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는 신시사이저를 포함해 모든 전자악기의 음색 변화와 합성을 위한 디지털 신호 처리를 해 주거나 악기끼리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규격을 말한다.
[3] 신낭만주의
신낭만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화 가운데 한 경향이다. 이것은 무조성의 모더니즘에 반대하며 청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현대 음악으로 다가갔다.
음색 작곡가로서 1960년대 아방가르드 대열에 섰던 펜데레츠키는 1970년 중반 이후부터 전통적 음악 장르인‘협주곡’을 수용하고, 감각적이며 반음계에 의한 슬픈 분위기의 신낭만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윤이상(1917~1995)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음악가로 한창 활동 당시에는 세계 5대 음악가로 꼽혔으며, 120여 곡의 현대 음악을 남겼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썼으며, 서양 현대 음악 기법을 통해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 오페라‘심청’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통해 세계 작곡계에 큰 명성을 떨쳤고, 우리나라의 남북 화합을 위한 1990년 남북 통일 음악제를 주관하였다.
[4] 앞으로의 전망
21세기의 사회는 풍요한 물질 문명, 크고 작은 전쟁 후유증,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 대중 매체의 과다 현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가치의 잣대가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다원성과 다양성을 띠고 있다.
시간적으로 21세기는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예술과 삶의 또 다른 융합 방식을 절실히 찾아 헤매고 있으며, 공간적으로 새로운 제3세계는 이에 가장 유리한 예술 발원지 내지는 문화 발원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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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nstruction of Vaslav Nijinsky's original Sacre du Printemps (1913) by Millicent Hodson and Kenneth Archer, 1987, for Joffrey Ballet.
Then The Curtain Opened: The Bracing Impact Of Stravinsky's '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