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네로 황제
재위 : 서기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
<소년황제>
- 16세 10개월에 불과한 젊은 황제가 출현
- 네로의 시정 연설
(1)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
(2)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한다.
(3) 황제는 사법 집행에 관여하지 않는다.
(4) 도부스(사저)와 레스 푸믈리카(관저)를 분리한다.
- 세네카, [관용에 대하여](de Clementia) 출판.
<강국 파르티아>
- 서기 54년 파르티아 군이 아르메니아 영토에 침입.
이제 갓 즉위한 젊은 황제가 단호히 대응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볼로가세스의 동생 티리다테스를 왕위에 앉히다.
- 세네카의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대응은 티베리우스 못지않게 신속했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하기로 결정.
<코르불로 기용>
- 코르불로를 가파도키아와 갈라티아속주의 총독으로 부임.
시리아 속주 총독 콰드라투스에게 2개 군단을 받아 서쪽에서 공경을 하여 남쪽에서 공격하는 콰드라투스와 공조하기로 함.
콰드라투스가 코르불로에게 보낸 2개 군단은 그대로는 도저히 전쟁터로 데려갈 수 없는 상태.
- 네로와 세네카는 다른 문제로 머리가 복잡, 동방 군단의 지휘권 조정을 못함.
<어머니에 대한 반항>
- 아그리피나가 황태후가 되자 더욱 방자해짐.
공식석상에서는 항상 네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원로우너 회의도 의사당이 아니라 황궁에서 열게 하였다.
아들과 자기가 마주 보고 있는 구도의 그림을 화폐 도안으로 채택.
- 네로, 어머니 아그리피나에게 반항하기 시작하다.
네로는 아크테라는 노예 여자에게 홀딱 반하여 아그리피나의 반대에 부딪힘.
어머니 측근인 팔라스를 해임하여 아그리피나의 분노를 삼.
-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황제로 옹립할 것을 두려워하여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살해.
- 아그리피나의 반격.
(1) 자금 확보
(2) 자기 고향인 쾰른(자기 이름이 붙은 도시)를 근거로 게르마니아 군단병들을 포섭.
(3) 네로의 부인있던 옥타비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임.
- 네로는 황태후의 신변 경호를 맡고 있는 병사들을 철수시킴. 그리고 황궁에서 내보냄.
<치세의 시작>
- 해방노예가 잘못을 저지르면 원래의 노예 신분으로 돌려 보내자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됨.
수도 경찰청장이 노예에게 피살됨...400명이나 되는 노예를 모두 사형에 처함.
- 서기 57년 네로가 55년에 아어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됨.
- 서기 58년 네로는 원로원이 준 "종신 집정관"의 지위를 거절했다.
이때부터 네로는 이제까지의 원로원 편향 정치에서 명백한 황제 정치로 옮아가게 됨.
<경제정책>
- 국고 일원화: 원로원 속주세(에라리움)와 황제 속주세(피스쿠스)를 합하여 국고를 일원화 함.
평화가 유지되자 황제 속주세는 늘어나고 원로원 속주세가 부족하게 됨.
- 간접세 폐지
네로가 간접세를 완전 폐지할 것을 제안했지만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치자 밀에 대해서만 관세를 폐지하는 타협안을 내 놓음.
<아르메니아 전선>
- 서기 57년 겨울, 코르불로는 소아시아 동쪽 끝의 신악지대에서 군단에 대한 맹 훈련을 실시하다.
- 서기 58년 5월 코르볼로가 행동을 개시, 아르메니아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가다.
볼로가세스는 파르티아 왕의 첩이 아들이고 둘째 티리다테스는 정 부인의 아들임. 동생이 첩의 아들인 형에게 왕위를 순순히 양보하자 동생을 위하는 마음에 아르메니아의 왕위를 주려고 함.
- 코르불로가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로마에 승인을 요청하라고 파르티아측에 제안을 했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함.
<수도 공략>
- 로머군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에 무혈 입성하고 파르티아 세력을 몰아내다.
- 59년 봄 로마군은 아르탁사타에 불을 지르고 아르메니아 제2의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에도 입성.
- 네로, 로마에 자란 왕자 중 티그라네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다.
<어머니 살해>
- 네로가 이혼녀 포파이아 사비나를 사랑하게 됨.
- 재혼 예정이던 오토를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보내 버림.
- 포파이아와 결혼을 하려고 옥타비아와 이혼을 하려 하다 아그리피나의 반대에 부딪힘.
- 네로는 아그리피나를 살해 하기로 결심.
서기 59년 3월 21일 아니케토스에게 선박 침몰 사건으로 위장을 해 아그리피나를 죽이려고 했으나 아그리피나가 수영을 잘 해 살아 나왔다. 그러자 네로는 아니케토스에게 아그리피나를 직젖 살헤토록 지시를 함.
- 이후로 네로는 망령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함.
<"로마 몰림픽">
-네로는 그리스문화를 도입하여 로마에 뿌리를 내리게 해 로마를 문화 국가로 변모시키려 함.
- 서기 60년 5년마다 열리는 "네로 제전"이 처음으로 거행되어 성황리에 끝남.
<브리타니아 문제>
- 브리타니아인이 로마에 반대하여 총궐기하다.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7만명을 참살하다.
-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수에토니우스가 앵글시 원정에서 돌아옴.
1만 병력을 이끌고 브리타니아인과 회전을 벌여 승리함.
- 네로는 수에토니우스 총독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페트로니우스를 신임 총독으로 보냄.
-이후로 무려 400년 동안 브리티시인이 로마에 본격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 - 파르티아 문제>
- 서기 61년 아르메니아 문제가 재발
시리아 속주 총독인 코르불로가 아르메니아 전선만 담당하는 사령관을 파견 요청함.
네로는 페투스를 사령관으로 임영함.
-서기 62년 페투스가 아르메니아 전선에 부임하여 3개 군단을 이끌게 됨.
코르불로 역시 3개 군단을 이끌고 시리아 속주 총독의 임무에 전념함.
<세네카 퇴장>
- 서기 62년 근위대장 부루스가 사망함.
- 세네카가 은퇴하다.
- 네로는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
옥타비아를 유배형에 처한 뒤 살해 함.
<로마군의 투항>
- 서기 62년 파르티아군에 포위된 페투스는 항복하고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로마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을 수락.
-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가 코르불로에게 사절을 보냄.
유프라테스 강 동쪽 연안에 코르불로가 지은 요새를 철거하고 다리를 파괴할 것을 요구.
코르불로는 교환 조건으로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이 완전 철수할 것을 요구 수락을 받아냄.
- 서기 63년 로마에 파견된 파르티아 왕의 특사가 네로에게 파르티아 왕의 친서를 전달하다.
로마측은 강화를 거부하고, 전쟁에 대비하여 코르불로에게 최고지휘권을 주다.
<그동안 로마에서는>
- 서기 63년 이탈리아 남부의 폼페이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 네로가 마르스 광장에 짓고 있던 "채육관"이 벼락을 맞고 불타다.
- 네로가 아버지가 되었으나 아기가 3개월도 되기전에 사망.
-포파이아의 사치벽을 이용 유대인들이 포파이아를 자기들의 보호자로 만듬.
- 허위 양자결연 방지 법 통과
- 총독에 대한 속주민의 감사 결의 폐지법.
<외교전>
- 서기 63년 코르불로가 5만 병력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돌아가 파르티아측의 성채를 차례로 공략.
- 파르티아측은 강화를 요구했고, 코르불로의 회답에 따라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기로 동의.
-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은 휴전을 하겠다는 뜻을 로마측에 전달.
- 코르불로와 파르티아 왕제인 티리다테스가 직접만나 회담.
-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갈 것을 승낙.
<문제 해결>
-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도 로마 황제 내로도 지정 사실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 서기 64년 티리다테스 로마로 떠나다.
- 1년 남짓 걸려 나폴리에 도착 네로의 영접을 받으며 로마로 옴.
- 포로 로마노에서 대관식을 갖고 네로에게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음.
그 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반세기 동안 평화가 계속 됨.
- 티리다테스는 다시 긴 육로 여해을 거쳐 아르메니아에 도착.
- 동방 로마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코르불로는 다시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돌아감.
<가수 데뷔>
- 서기 64년 네로, 나폴리의 야외 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하다.
<로마의 대 화재>
서기 64년 7월 18일 밤, 대경기장 관람석 밑에 있는 가게에서 난 불이 번져 아흐레 동안 로마의 대부분을 태우는 대 화재가 됨.
<재건>
- 네로는 화재 진압, 이재민 구제, 화재 후의 재건대책을 진두지휘함.
- 네로, 화재 후의 재건과 도심 개조를 위한 재원 확보를 겸하여 87년 만에 화폐개혁을 실시하다.
<도무스 아우레아>
- 네로,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를 착공하다.
- 네로,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로 시민들의 반감을 사다.
그리스의 "아르카디아"를 로마 도심에 재현코자 함.
팔라티노 언덕 밑에서 "도무스 트란시터리아"가 시작된다. 구조는 기둥이 늘어서 있는 주랑 형태이고 한복판에는 높이가 40미터니 되는 네로의 황금상이 있다. 그곳을 지나 오파우스 언덕까지 가는 길의 오른쪽은 인공 호수로 변모, 오피우스 언덕에 서 있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의 본관 전면이 이 인공호수를 향해 열려 있다. 본관 뒤 에스퀼리노 언덕 전체는 동물을 놓아 기르는 자연 고원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기독교의 박해>
- 네로, 방화죄 및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 등으로 기독교도를 체포하여 처형하다.
- 그래도 "네로가 방화를 사주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래하는 황제>
- 서기 85년 봄에 열린 제2회 "5년제"(네로 제전)에 네로가 가수로 출전하여 열창하다.
<피소 음모>
- 서기 85년말에 20~30명이 가담하여 네로 암살을 획책한 "피소 음모"가 발각 되었다.
가담자 중 한 사람의 노예가 눈치를 채고 네로에게 일러 바침.
피소와 라테나누스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한 사람만 빼 놓고 모두 자살하거나 처형되고, 가담자로 의심 받은 세네카도 자살함.
- 네로의 아내 포파이아가 사망함.
<청년 장교들>
- 서기 86년 베네베토의 음모가 발각됨.
코르불로의 사위인 비니키아누스를 지도자로 하는 청년 장교들이 네로를 죽이고 코르불로를 제위에 앉히려고 함
- 청년 장교들은 모두 처형됨.
<그리스 여행>
- 네로, 가수로서의 기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그리스 여행을 떠남.
-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네로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전권을 주어 사태에 대처하게 함.
- 그리스 전역을 "자유도시"로 선언
종전엔 아테네와 스파르차만 해당되었슴.
내정의 자치를 인정 받고 속주세를 면제 받음
네로가 죽자 원래대로 돌아감.
<사령관들의 죽음>
서기 67년 네로가 코르불로와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그리스로 불러 자살을 명령.
메네벤토의 음모에 대한 책임 추궁.
<개선식>
서기 68년 1월 네로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
<우국(憂國)>
갈리아의 리옹 속주 총독 빈덱스가 10만명을 이끌고 반로마 봉기를 일으켰지만 루푸스가 이끄는 고지 게르마니아 굳단에 진압되었다. 빈덱스는 자살함.
<궐기>
- 서기 68년 4월 2일 빈덱스에게 궐기를 요청받은 에스파냐 속주 총독 갈바가 반네로 선언을 함.
- 에스파냐의 다른 속주 총독인 오토(루시타니아 속주)와 카이키나(베티카 속주)도 갈바를 지지.
- 원로원은 에스파냐에서 궐기한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
- 로마 시민들이 "식량"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을 계기로 네로에 반대하여 궐기.
<국가의 적>
-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다.
- 근위대는 갈바를 황제로 추대함.
- 서기 68년 6월 9일 네로가 로마 교외의 은신처에서 자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