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서울매일선교신문>, 2017년 3월 13일 월요일, 9면
에르푸르트 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탐방
고재백 박사
서양사학자, <기독인문학연구원> 대표
국민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강사
종교적 중세도시 에르푸르트 탐방
루터 도시 에르푸르트 탐방의 기억을 되새기니 가슴이 뭉글하다. 오래 전 봄날, 유학 중이던 제자를 노구를 이끌고 방문하신 스승을 모시고 종교개혁지 탐방 길에 올랐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이 함께 했다. 며칠 동안 혼자 운전하며 다니던 여행의 고생과 초행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노스승과의 마지막 긴 여행에 보람도 컸다. 그 후 한참 만인 몇 년 전 여름, 중학생 아들과 긴 여행을 감행했다. 금방 사라질 청소년 시절 부자간 둘만의 여행이 아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겠다 싶어 여러 부담을 떨치고 결정했다. 에르푸르트 구도심지 곳곳을 걸어 중세 역사를 탐방했다. 늦은 밤까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대화하는 거리는 활기찼고,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흥겨웠다. 대학생 루터도 500여 년 전 이 밤공기를 마시며 청춘의 낭만을 즐겼을 것이다. 이국땅 늦은 저녁 시간, 낯설음과 두려움 탓이었을까? 한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작은 손아귀에서 힘이 느껴졌다. 아들은 자신의 최대 관심사인 각국 축구 리그에 대해 쉼 없이 설명했다.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다. 아들이 그토록 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들려준 것은 지금껏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의 아들과 그 때의 행복감이 무척 그립다.
개혁운동 당시 에르푸르트는 매우 종교적인 도시였고, 더욱이 루터와 개혁운동에 얽힌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루터가 대학에 입학하던 1501년에 2만 5천여 명의 시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독일 제국 내 여섯 번째로 큰 도시였다. 이 도시에 36 곳의 수도원과 90여 곳 이상의 교회가 있었고, 8백여 명의 성직자들이 활동했다. 해마다 다양한 종교행렬이 펼쳐졌으며, 유명한 성물이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니 당시에 “튀링겐 지방의 로마”라 불릴 만했다. 루터는 이곳 대학교와 수도원에서 10 여 년을 지냈다. 청년기와 수도사 시절을 거치며 그의 정신이 영글었고, 삶의 방향도 전환되었다. 루터가 다니던 대학 건물은 세월의 힘을 못 이기고 사라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대학교 문(Collegium maius)만이 옛 명성을 대변한다. 수도원은 수도사 루터의 삶에 대해, 그리고 개혁운동의 배태 과정을 들려준다. 1521년 4월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심문을 받기 위해 가는 도중에 이 도시를 들렸다.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무관심의 냉대를 받았고, 뉘른베르크에서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낙담한 그는 이 도시에서 대대적인 환대를 받았고, 많은 이들의 격려와 응원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루터 당시 에르푸르트 대학교 건물의 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탐방
에르푸르트의 구도심지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원은 수도사 루터의 고뇌와 치열한 수도사적 삶이 담긴 곳이다. 번잡한 대도시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요한 수도원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연상시킨다. 그동안 긴 역사의 질곡 속에서 옛 모습은 많이 변했고, 특히 1945년 전쟁 시기 폭격으로 많은 부분 파괴되었다. 그동안 새롭게 단장되고 개축되는 과정에서 일부 유적이 복원되어 역사 탐방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수도원 내부를 돌아보면 인상적인 곳들이 많다. 예전에는 몇 곳이 관람자에게 통제되었고, 일부는 유리벽을 통해 멀리서 관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들리는 소식에 요즈음 수도원이 대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다고 하니 누구나 역사를 몸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았고 첫 미사를 집전했던 성당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념하는 채색유리창으로 유명하다. 루터가 미사를 집전하던 제단과 찬송을 부르던 성가대석 등이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청년 수도사 루터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거닐었을 정원과 이를 둘러싼 긴 회랑, 회랑 중간에 독특한 구조와 치장을 갖춘 회의장, 청년이 누구보다 학구열을 불태웠을 도서관, 그의 개인적인 애환이 배어있을 작은 ‘루터 독방’,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 아름다운 방문자 숙소 르네상스호프, 1945년 2월 폭격의 파괴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현대식 건물 ‘화해의 집’ ···

<루터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수도사의 복장>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루터 독방>
특별히 ‘루터 독방’은 작고 볼품없지만, 루터의 애환이 담겨있으리라 생각하니 남다른 것이다. 수도사 루터가 사용했을 4개 정도의 방 중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한 평 독방보다 조금 더 작은 방은 말끔하게 채색이 되어 있고, 방 안에 작은 책상이 덩그러니 서있다. 그 아래에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다. 이 방 앞에 잠깐 머물며 탐방자가 루터의 체취와 고뇌를 온전히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저 역사적 지식을 활용하여 상상해볼 뿐이다. 특별히 루터의 고뇌, 죽음을 각오한 고행과 수련을 떠올리면 무언가 모를 아픔이 밀려온다. 나의 청년시절 그와 같은 속박과 억눌림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 곳에서 루터는 새로운 신앙과 삶의 길을 깨우치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수도사 루터의 수도원 생활
1505년 7월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도 같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큰 전환점이요, 결과적으로는 개혁운동의 씨가 뿌려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법학도가 세속의 모든 성공과 욕망을 버린 삶을 택했다. 수도사로서 그는 성직자 세계의 내밀한 것들을 경험했고, 끝내는 교회 개혁과 수도원의 해체를 주장하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결정적 계기는 그가 경험한 여러 타인들의 죽음, 그리고 이에 따른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의 공포와 강박 관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시절 학업보다는 죽음, 죄책감, 하나님, 심판 같은 것에 집착했고, 이것에 대한 두려움에 억눌려 있었다. 1505년에 무서운 죽음의 병인 페스트로 두 동생 하인츠와 바이트를 잃었다. 또한 당시 에르푸르트를 휩쓸고 지나간 전염병으로 대학에서 세 명의 교수들이 갑자기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 때 두 교수가 임종 순간에 했다는 말은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아, 내가 수도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말은 수도사가 되는 것을 천국행 지름길로 간주했던 당대의 인식을 대변하는 것인데, 루터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이런 일련의 경험이 스토테른하임의 서원을 가능하게 했고, 결국 그를 수도원으로 이끌었다.
중세 수도원의 일과는 엄격한 규칙에 따랐는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엄격한 고행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루 일과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수도사들은 저녁 8시에 취침하여 새벽 2시에 기상했다.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일정은 3시간 단위로 6개 구간으로 나누어지고, 각 일정은 공동 기도로 시작했다. 이 기도 시간을 잊거나 충분히 채우지 못하는 것은 죄로 간주되었기에 수도사들은 일과의 규칙을 지키는 데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금요일마다 공동으로 성경을 낭독한 이후 수도사들은 공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가벼운 죄에 대한 벌로 시편 한 편이나 그 이상을 읽어야 했고, 무거운 죄에 대해서는 3일 금식이 명해졌다. 성경낭독에 늦거나, 웃거나, 다른 사람을 웃기거나, 빈약하게 찬송하거나 잘못된 장소에 책을 꽂아 놓는 일은 가벼운 죄에 해당한다. 거짓말 하는 것,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 금식을 어기는 것 등은 무거운 죄에 해당한다. 금식에 대한 규정들 역시 엄격해서, 매주 금요일과 전례적 축제의 날에는 어김없이 금식을 했다.
루터의 수도원 생활은 그의 철저한 규범적 생활과 헌신적 고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후에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수도사로 지냈다. 그동안 기도와 금식과 철야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나 자신을 고문했다. 추위는 나를 거의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다. 그것은 내가 또 다시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수행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주중에 기도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그는 주말에 기도시간을 보충했다. 어떤 때는 “5일 밤 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거의 미치는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자주 사흘간의 완전 금식을 실행했고, 축제 절기보다는 금식 절기를 즐겼으며, 철야 고행과 기도에 전념했고, 허용된 담요도 물리치며 얼어 죽을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오랜 후에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최고의 수도사 생활을 했다고 자부했다. 이런 엄격한 고행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육체적 질병을 안고 살아야 했다. 개혁운동이 시작된 지 몇 년 후에야 그는 이런 기도생활이 율법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무관하다고 고백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옛 도서관 내부>
수도원 영성에 주목하기
수도원을 탐방하면서 야누스의 두 얼굴을 연상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억압과 속박의 상징이고, 또 달리 보면 깊은 영성이 내면에서 시냇물처럼 흐르는 곳이 아닐까? 오늘날 한국 교회에 수도원적 규범과 속박이 신앙의 이름으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반면에 수도원적 영성에 대한 동경이 꿈틀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도원과 수도사 제도에 대해 개혁운동 지도자 루터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 시대의 배경과 자신의 경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루터의 입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사고할 필요가 있겠다. 번잡한 현대문명, 점점 더 요란해지는 예배와 신앙생활 속에서 수도원의 깊은 영성, 종교적 체험과 자기 성찰을 위한 시간이 무엇보다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