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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 하나님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가? (욥 1:1-2:10)
설교본문낭독: 욥기 1:1-2:10
설교: 내가 믿는 것, 하나님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가?
서론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접하기까지의 그 계기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갖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교회를 찾았다가 갖기도 합니다. 예컨대, 심각한 질병에 걸렸는데, 교회 다니면 낫는다는 말에 교회를 다녔는데 실제로 나은 것이죠. 그러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실패했는데, 교회 다니면 일이 잘된다는 말에 교회를 다녔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다가 결국 기독교 신앙을 갖기도 합니다.
이렇게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하기까지의 계기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 접어든 계기는 조금은 의아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고,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용서함을 받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만이 영원한 천국을 약속 받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하고, 지속해야 합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질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을 가졌는데, 질병이 악화될 수도 있고, 신앙을 가졌는데, 사업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 질병이 나았지만, 그 이후에 다시 질병이 걸려서 낫지 않아도, 신앙을 지속해야할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계속해서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비록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기독교야말로 참된 진리이기에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한두 가지 일에 일희일비하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믿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입니까? 나의 사사로운 욕심과 욕망을 충족해 주는 종교라서 기독교 신앙을 갖습니까? 아니면,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참된 진리요, 기독교 신앙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종교라서 기독교 신앙을 갖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이 신앙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기도 하고, 고난당하기도 하며, 까닭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고 해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질문하도록 만듭니다.
본론
I. 본문 해석
1. 욥의 첫 번째 고통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욥기 1:6을 보시면,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와 사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 말을 들은 사탄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욥기 1:9-10
(9)...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이 대화를 각색하면 이렇습니다. “사탄아~ 내 종 욥을 봤지? 욥이 그렇게 온전하고 정직하며, 나를 경외한다. 그 정도로 악에서 떠난 사람은 없다” “에이 하나님~ 욥이 왜 그럴 것 같습니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렇게 육체적인 복을 많이 주셨는데, 그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재산도 많고, 집안도 좋고,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데,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죠. 근데 하나님~! 그건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가진 것들은 다 없애보세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동방에서 가장 큰 욥
언뜻 보면 사탄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욥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3절에 보면 양이 7,000마리 낙타가 3,000마리, 소가 500겨리, 암나귀가 500마리,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개역개정) 이전 번역 개역한글은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실 개역개정은 좀 어색합니다. 욥의 재산을 줄 열거한 뒤에 “가장 훌륭한 자라”라고 하니까 말이죠. 쉬운성경은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천주교 성경은 “그 사람은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1]
욥은 가장 부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기 1:2에 보면 10명의 자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에 다산(多産)은 부를 상징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사탄의 말이 일리 있어 보입니다. 욥에게 이런 재산이 없었다면, 이런 부유함이 없었다면 그가 어떠했을지 한 번 의심해 볼 만합니다.
사탄의 질문요지
더 중요한 건, 만약 사탄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욥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욥이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행복한 가정, 거대한 부, 큰 명예를 주셨고, 그가 호강하고 있으니, 그야 당연히 하나님을 믿고 붙들고 사는 것일 뿐 그것이 사라지면, 결국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11절에서 말합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에게 가해진 어려움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장난을 허용하십니다. 사탄이 일하게 하십니다. 단 조건을 두십니다.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하기 시작합니다. 스바 사람들이 칼로 종들을 죽입니다(15).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양과 종들이 불살라졌습니다(16). 갈대아 사람이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입니다(17). 욥의 큰아들 집에 모인 모든 자녀들이 죽었습니다(19).
그냥 죽 읽어보면 그냥 단순한 어려움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 수많은 경우의 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15절은 약탈과 강도입니다. 16절은 벼락이라는 자연재해입니다. 19절은 태풍이라는 자연재해입니다. 또한 집이 무너진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벼락 맞을 확률’이라고 하듯이, 사람이 살면서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다 경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욥은 이 모든 일을 불과 몇 분 동안 한꺼번에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욥은 빈손이 되었습니다.
고난 뒤, 욥의 반응
자 이제 이쯤 되면, 욥은 11절에서 사탄이 말한 대로 해야 합니다. 9절에서 사탄이 말한 논리대로라면 그래야 맞습니다. 사탄이 보기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이유들이 사라졌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욥이 어떻게 합니까? 20절을 보시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습니다. 머리털을 밉니다. 땅에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21절에서 욥은 찬송을 부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사탄의 예언대로라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욥은 저주는커녕 찬송을 부릅니다. 저주와 찬송은 극과 극이죠. 야고보서 3:8-10에서는 찬송과 저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저주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과 원망 정도는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찬송을 부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패배했습니다. 사탄이 틀렸음이 입증되었습니다.
2. 욥의 두 번째 고통
사탄의 재도전
이쯤 했으면, 사탄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2] 2장에서 또 다른 대화가 이어집니다.
1장 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들(천사)과 사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욥 2:1).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이 말을 들은 사탄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욥기 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한 것은 피상적인 조치일 뿐입니다. 제가 한 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그의 생명, 그의 살과 뼈, 그의 가죽에 직접 손을 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번에는 분명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3]
사탄의 두 번째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어떻게 보면 일리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 한 번 어려움을 당하면, 그때는 하나님을 붙들 수 있지만, 점점 더 고통이 심각해 지면, 하나님께 간구해도 들어주지 않으시면, 그때는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4]
하나님은 사탄의 두 번째 도전을 받아들이십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2:6) 이제 욥은 더 호된 시험을 받습니다.
욥의 고통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종기가 납니다. 욥은 너무 가려워서 질그릇으로 온몸을 긁습니다.
욥의 반응
이쯤 되면 욥은 사탄의 예상대로 해야 합니다. 그의 살을 쳤으니 틀림없이 주를 향해 욕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래서 사탄의 내기가 성공하면, 욥의 신앙이 가짜였다는 것이 판명날 것입니다. 욥이 그동안 하나님을 경외했던 건, 그에게 주어진 수많은 복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는 아내를 향하여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패배했습니다. 사탄이 틀렸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더이상 사탄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물론 욥기의 이야기는 그 뒤에 계속 이어집니다만, 욥기 끝까지를 봐도 사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이 가르쳐 주는 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오늘 본문은 욥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믿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가?”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 그것은 그 믿음이 당신에게 가져다 줄 유익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5]
하나님은 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나의 신앙이 혹시나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주셔서 믿는 신앙은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6]
실제로, 욥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번영신학을 강력하게 정죄하며 거짓되고 탐욕스런 종교심에 철퇴를 내립니다.[7]
II. 적용
기복신앙의 한계
오늘날의 설교자들 가운데 사탄이 질문한 논리를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기복신앙의 논리는 사탄의 그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논리대로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해서, 믿게 되어 버리면, 복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동기를 보상 심리에 가두면, 사단이 문제를 제기한 논리에 빠지는 것입니다.[8]
이러한 기복신앙은 조금만 지나면 금방 한계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생깁니까? 우리가 살다보면 얼마나 많은 상실을 경험합니까? 그렇기에 기복신앙은 예수 믿고 나서 며칠만 지나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사형통(萬事亨通)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전도서 3:1-8을 봅시다.
(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이라면, 여기에서 말하는 복이 단순히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랑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재물, 명예,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
하지만 여러분~!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이죠. 하나님 그분이 곧 우리의 복입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그 본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분이 허락하시는 물질적 복이 아닙니다.[9] 하나님 그분이 곧 우리의 믿음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창세 전부터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창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오른쪽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내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날마다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단지 그분께로부터 주어지는 육체적 복들 때문이라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한낱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종교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여호와가 아니라 맘몬(Mammon)이라는 우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탄이 제기한 논리에 빠지는 예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탄의 논리에 빠집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어. 봐봐, 사업도 잘 되고, 아이들도 명문대학교에 갔잖아.” 이런 말을 통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결국 하나님을 그런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저 사람 봐, 저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저것 밖에 못 받았잖아?” 타인을 향한 이런 태도는 곧 내가 믿는 위대한 기독교를 저급한 종교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수많은 분복들 가운데 하나님이 내게 세상적 복을 주셨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보상(報償)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하나 주시면, 나도 하나님께 하나 드릴게요” 혹시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이런 저급한 종교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신앙이 교회 생활을 포함한다고 볼 때, 이렇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정할 때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려하기보다는 좋은 시설, 넓은 주차장, 아이들을 키우기 쉬운 환경을 먼저 염두에 둡니다. 교회에서 제공되는 여러 가지 종교적 서비스들을 따져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교회로부터 제공받는 편안함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오는 이유가 교회행사와 활동이 즐거워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찬양팀을 서면서 멋지게 노래부르고 사람의 이목을 받는게 즐거워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오는 이유가 사람 만나는 게 좋아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한 봉사활동을 통한 보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 흠모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아직 회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그분이 곧 목적이 됩니다.[10]
만약 욥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뒤에 하나님을 버렸다면, 사탄의 말대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고작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유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는 고백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성경에 보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박국 3:17-18을 봅시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처음에는 ‘인과응보론’의 관점에서 신앙을 접근했습니다(1:4, 13). 하지만,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의 놀라움을. 그리고는 찬송합니다. 18절을 보면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라고 말합니다. 그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화과나무의 무성함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의 번성함이 아닙니다. 밭의 풍년이 아닙니다. 양과 소의 풍성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 자체입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뿐입니다. 하박국에게 있어서 믿음의 이유와 조건과 대상은 오직 하나님 그분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그 유명한 믿음장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구약 성도들의 믿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과연 그들의 부와 명예, 가진 것으로 인해 믿었던 이들이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의 삶이 안락했으며, 평안했습니까? 아닙니다. 심지어 35절 이하를 보십시오. “(35)...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교회 역사 속 믿음의 사람들
우리는 성경에서만 아니라 교회 역사에서도 이런 삶을 살았던 이들을 봅니다. 여러 인물이 있겠지만, 국내의 인물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청소년들은 혹시 손양원 목사님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청년들은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짧은 역사 가운데 아주 훌륭한 신앙인으로 모두에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여수경찰서에 투옥되어 만 5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두 아들(동인, 동신)이 공산당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이라는 사람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아들로 삼은 것이죠. 그리고 당신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체포되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삶 가운데 상당 기간을 목회하셨던 애양원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은 나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기념관에 가면 손양원 목사님의 10가지 감사기도 제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할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 차남을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제명에 죽는 것)하는 것은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을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번째,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립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지금까지도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더 고귀하게 여겼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나 비록 받은 것 없으나,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 비록 얻은 것 없으나, 하나님이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다스리시기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 비록 내 소유는 물론 생명까지 잃는다해도,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분만이 창조자요 구원자이심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된 것이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으로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그 자체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때로 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때로 거두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어느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번창하는 가운데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갑자기 우리의 삶을 뿌리채 흔들어 놓으신다면, 그때도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아버지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11]
슬픔 중에 기뻐할 수 있는 믿음, 고통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신앙,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신앙.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체가 곧 복입니다.
고난당할 때, 우리의 믿음
옛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고통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더욱 빛난다.”
고통당할 때, 사탄이 우리를 지켜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고통을 감수하며, 그 고통을 이겨내는지. 고통 가운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참된 믿음으로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사탄의 입을 무력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니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했겠느냐?”라는 사탄의 의심을 우리의 믿음으로 반박해 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무엇을 믿느냐? 너의 믿음은 무엇이냐? 슬픔과 환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인가?[12] 큰 재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성실하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13]”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확신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은 “그렇다”라고 답하시는 것으로 그만두셨어도 됩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11)라고 사탄이 말했을 때, “그러지 마라. 그렇게 안해도 된다. 그의 믿음이 맞다”라고 하셨어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기를 걸어오는 사탄에게 베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사탄이 욥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주권자의 허용으로 인해 욥은 사탄의 시험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허용은, 어쩌면 하나님께 더 어려운 내기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더욱 도박 같은 일일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욥이 사탄의 말대로 해 버리면 어떡합니까?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그 말이 공수표가 되어 버리면 어떡합니까?
뿐만 아니라 만약 욥이 넘어간다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해버리면, 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제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욥처럼 경건한 사람마저 사탄의 시험이 넘어간다면, 사탄은 욥 이후에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런 식으로 시험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탄에게 허용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욥을 믿으셨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욥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욥을 당신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욥의 경건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14] 그를 거듭나게 하신 당신의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자기 자신의 사역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탄은 욥의 믿음만 시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시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이 결코 수포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욥을 통해 온 세상에 드러내기 원하셨습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말씀이 진리임을 드러내기 원하셨습니다.
욥기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의 견인을 믿고 확신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질문 앞에 늘 서 있습니다. 욥기는 참된 경건이란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역설합니다.[15]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어려움이 닥치면 어려움이 닥치는 대로 날마다 흔들리는 갈대 같은 신앙입니까? 아니면,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뿌리내린 튼튼한 집과 같은 신앙입니까?
가짜 믿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어떤 고난과 환란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중 어떤 믿음을 소유하셨습니까?
[1] ‘큰 자’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룻기 2:1에 보아스에게 사용됩니다.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C. Bijl, Zo Rijk Als Job (Kampen: Van den Berg, 1987), 신득일 역, 『욥기 강해』(부산: 고신대학교 출판부, 1995, 19962), 38.
[3] David Atkinson, The Message of Job: Suffering and Grace, BST (Leicester: IVP, 1991), 김진우 옮김, 『욥기 강해: 고난과 은혜』(서울: IVP, 1999), 28.
[4] Bijl, 『욥기 강해』, 39.
[5] Atkinson, 『욥기 강해』, 23.
[6] Atkinson, 『욥기 강해』, 23-24.
[7] 권지성, 『특강 욥기』(서울: IVP, 2019), 9.
[8] 김정우, 『김정우의 구약통전(하)』(서울: 이레서원, 2002), 403.
[9] 권지성, 『특강 욥기』, 50.
[10] Atkinson, 『욥기 강해』, 23.
[11] Bijl, 『욥기 강해』, 16.
[12] Bijl, 『욥기 강해』, 22.
[13] Bijl, 『욥기 강해』, 21.
[14] Bijl, 『욥기 강해』, 20.
[15] 권지성, 『특강 욥기』,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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