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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 오강남 지음 / 현암사 펴냄 / 256쪽 / 1만 5000원 |
Ⅰ.
최근 기독교 입문서로 활용할 수 있는 쉽고 알찬 책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다. 기독교 교양 독자층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 반갑고, 이를 통해 왜곡된 기독교(개독교)에 대한 이해를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지난 12월 소개한 마커스 J. 보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가 신약 성서학자의 시각에서 힘을 잃어버린 기독교 언어의 의미를 탐색하여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시도였다면 지난 달 소개한 손석춘의 <10대와 통하는 기독교>는 언론학자의 시각에서 기독교에 대한 우리 시대의 혐오감과 편견을 넘어 인문 사회적 교양을 갖춘 다음 세대 기독교인의 출현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입문서로 활용될 만한 책이었다.
Ⅱ.
이번에 읽은 책은 국내외에 잘 알려진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현암사, 2013)이다. 보그와 손석춘의 그리스도교 입문서와 비교하여 이 책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기독교를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데 있다. 기독교가 이웃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바탕으로 열린 대화를 통해 배타성을 극복한 '심층 종교'로 심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종교에 관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개신교(인)의 배타적 신념과 공격적 선교 활동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철지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없는 '담론적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근대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Max Müller)의 말을 인용하여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9쪽)"고 말한다. 종교 간 평화와 협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교를 더 잘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이웃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이해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웃 종교와의 비교의 맥락에서 기독교를 소개하고 있는 본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하거나 깊이 천착할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7쪽)
사실, 종교 간 이해와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저자의 주장은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식적 주장에 '담론적 현재성'이 부여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순전히 한국 기독교의 특수성, 특히 이웃 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왜곡된 이해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의 영향 아래 성장해 온 한국 개신교의 배타성과 식민성이라는 현실이 여전히 그 문제의식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에 있어서 이웃 종교와의 대화의 문제는 단순히 다양성을 확대하는 차원의 논의에 머물지 않고, 배타적 확신의 폭력성을 극복한 다음 세대의 기독교(인)의 출현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는 주제라 할 수 있다.
Ⅲ.
기독교의 배타적 확신이 불러일으킨 폭력의 여러 사례 가운데, 종교 간 대화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를 감리교회가 출교시킨 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10월에 열린 감리교 특별총회에서는 변, 홍 교수의 신학을 각각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으로 명명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의 입장은 감리교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이와 같은 신학을 주장하여 교회 확장 사업에 장애물이 되는 이에 대하여 의법 조치 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두 교수는 1992년 10월 감리교 총회에서 출교가 최종적으로 선언되었고, 목사직 면직과 더불어 교수직을 박탈당하였다.
'교회 확장 사업에 장애물이 되는 이'. 이것이 다종교 사회에서 이웃 종교에 대한 관용과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할 것을 일찍이 역설한 故 변선환 교수와 다양성의 수용을 주제로 한 '포스트모던 신학'을 한국에 가장 앞서 소개한 홍정수 교수에 대한 교권의 마녀사냥의 주된 이유였다. 중세 시대에나 일어날 법한 신학자에 대한 교권의 억압이 20세기 말 근대화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양식 있는 이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 일은 기독교의 배타성 극복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결정적으로 제한하는 '트라우마'가 되었고, 국내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철저한 자기 검열의 계기를 마련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1년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큰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저자의 성공은 1992년 이후 본격화된 교권의 권위주의와 신학자들의 자기 검열 체계 작동에 의해 침체된 기독교의 배타성 극복 논의를 '교회 밖에서' 재활성화 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교)신학의 심화된 학문적 주제여야 할 '종교 간 대화'는 교회 성장이 하향세로 접어든 90년대에 이르러 위기감에 편승한 미국발 교회성장학과 유사 경영학의 광풍에 떠밀려 신학계의 주변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사이 기독교의 배타성 극복에 관한 논의는 신학의 영역을 떠나 종교학의 주제로, 그리고 인문 사회학 전반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종교 간 대화에 관한 비교종교학적 연구와 종교사회학적 연구에 비해 심도 깊은 '신학적' 논의가 드물게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이것은 소위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기독교(인)의 오해를 고착화시키고 나아가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의 기독교인 대부분에게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익숙한 비유는 "산은 하나인데 오르는 길은 서로 다르다"거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식의 실재 중심적 다원주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러한 실재 중심적 다원주의의 입장을 전제로 '깨달음'을 중심으로 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주로 존 힉John Hick과 초기의 폴 니터Paul F. Knitter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실재(신) 중심적 다원주의의 견해는 1992년 종교재판 당시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이해를 대변하는 '현재적' 담론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모든 현재적 담론들이 그럴 수밖에 없듯이) '낡은' 담론이다.
왜냐하면 "산이 하나고, 달을 봐야 하고…' 따위의 비유는 모든 다름을 포괄하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재'를 전제하고 있는데, 오늘날 신학에 관한 근본적인 도전은 바로 형이상학적 실재성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관점의 도전에 있기 때문이다. 실재(신) 중심적 다원주의의 견해는 이 형이상학의 종말이라는 현대 철학과 신학의 주제에 적절히 응답하지 않은 채 여전히 형이상학적 신관을 전제로 논의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낡은' 관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탈식민적 관점에서의 비판도 가능하다. 실재 중심적 다원주의는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역사적' 시각에서 각각의 종교를 객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종교의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토대를 고려하지 않은 식민 제국주의적 이상의 종교적 내면화라는 관점에서 이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서양의 근대 종교학의 틀로 모든 이웃 종교의 다름을 포괄하려는 종교적 제국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는 비판이 이 관점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적인 시각, 젠더 연구의 시각, 심지어 민중신학적 시각에서도 이를 비판하는 풍성한 논의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1992년을 끝으로, 이러한 모든 비판적 신학의 논의가 거의 중단된 채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실재 중심적 다원주의라는 낡은 견해와 동일시하여 타자화시키는 악마화demonization의 외길을 걸어왔다는 데 있다. 단언컨대,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20세기에 이르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타 종교'를 본격적으로 대면하기 시작한 서구 기독교가 자신의 식민제국주의적 배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비롯된 유행 담론이었다. 그것은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를 경험할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근대 유럽의 세계관(기독교의 주체성)을 전제로 해서는 그 토대를 뒤흔드는 '급진적'인 신학 운동과 관련이 있겠지만, 이를 당연시하지 않는 비서구 세계에서는 오히려 '탈식민적 신학'의 실천과 더욱 깊은 관련을 맺는 주제였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소위 '종교다원주의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신학적 관심과 지향은 '탈식민적 아시아 신학'이라는 장소적 신학의 형성에 있었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논의는 '종교다원주의'라는 하나의 낱말이 지닌 범주화의 폭력성과 더불어 철저히 외면당하고 말았다.
Ⅳ.
더욱 안타까운 점은 기독교 내부에 꽤 두터운 교양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성적 복음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이웃 종교의 소위 '구원'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 대한 타자화에 있어서는 근본주의적 입장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학적 노선과 사회적 행동의 폭에서 근본주의자들과 분명히 대별되는 지점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노골적으로 악마화하는 대신 '점잖게 동정하는 방식'으로 이를 외면하면서 신학적 사유의 발전과 심화를 저해하는 타자화에 일조해 왔다. 예컨대 오늘날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규정하는 이들 가운데는 복음주의적 정체성이 제공하는 '안전한' 신학적 보호막 안에 머물며 부패한 교회 현상과 투쟁하거나 현대성의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대화를 시도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전략적 선택으로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고 동무적 연대가 요청되는 일임에 분명하다. 나는 이를 비난할 마음이 없고, 더욱이 그들의 정체성에 흠집을 낼 뜻도 없다.
그러나 이들 지성적이고 실천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에 선 이들 조차도 이웃 종교와의 대화에 있어서만큼은 '배타적(점잖은)' 확신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복음주의적(복음적이 아니라!)' 확신은 한국에서 정죄당한 종교다원주의적 신학이 제기한 이웃 종교의 타자성을 주체로 한 신학의 자기중심성 해체나 탈식민적 전환을 위한 시도에 이르지 못한 채 신학을 여전히 '유용성'과 '실용성'의 측면에서의 '운동'의 차원에 머물도록 한다는 점에 있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상을 비판하지만 비판의 토대가 되는 신학적 근거는 여전히 그 현상을 출현시킨 (본질주의적인) 신학적 논의에 기대고 있다는 역설은 '복음주의자'의 딜레마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신학 그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치명적 균열의 지점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부정과 맞물리는 '절대성에 대한 (느슨한) 확신'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긍정하며 사는 동시대 교양인으로서의 기독교인들의 삶의 결정적인 균열인 동시에 예외 조항으로 남아 있다. 이 점에서 신학이 여전히 확실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그것은 신학적 사유의 불가능성을 확증할 뿐 일상의 '장소성'을 획득한 살아 있는 말(을 통한 사유)의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확신에 근거한 신학적 언설은 '하나마나 한 말', 혹은 '해야 돼서 하는 말'의 지위를 벗어버리지 못한 채 신앙인의 삶의 주위를 표류하는 겉도는 말(독백)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양성의 외부에 예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신학(의 말)은 이미 죽은 담론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그 죽은 말이 담지하는 신의 죽음을 '확증'하는 무신학의 선언 외에 다름 아니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Ⅴ.
이런 주제들은 사실 입문서를 대상으로 하는 서평에서 다룰 만한 주제들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 저자의 상식에 가까운 주장에 여전히 담론적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이것을 담론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는 기독교의 배타적 현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는 나는 이 책이 오강남 교수의 '마지막'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것은 평생을 비교종교학자로서 종교의 배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온 한 원로 종교학자의 삶에 대한 경의의 표현임과 동시에 확실성과 배타성을 넘어선 다음 세대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진심이 발로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제는 이웃 종교에 대한 열린 이해와 수용이 개신교 신앙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한다. 1992년에 기독교는 두 진보적 신학자를 정죄함으로 이미 그 시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에까지 미뤄 왔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이 교회 확장 사업에 장애물이 된다"는 제왕적 교권주의자들의 판단은 이미 틀렸다. 이제 그 '아들' 세대로 세습되어 해외 박사 학위와 스마트 미디어로 무장한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한국의 '포스트모던' 상황을 종교 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교회 성장의 적극적인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한 세대의 출현이야말로 '교회 확장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한계를 극복한 효자임에 분명하다. 대형 교회의 성장주의 신학이 포스트모던 신학의 급진성을 시장주의적으로 전유하면서 '성장주의를 비판하며 성장을 추구하는' 여유를 부리고 있는 동안 신학자와 신학생들은 시장의 지배에 투항하는 급진성의 퇴보를 거듭해 왔다.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논의는 바로 그 투항의 핵심에 놓인 주제였다. 이전 세대의 투항을 비난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앞선 투쟁을 존중하는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의 실패와 좌절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늦었지만, 이 책을 통해 중단된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교회 안팎에서 심화되는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연세대 대학원 박사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