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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극소설-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5>
연극소설 '궁리' 연재를 끝내며
국제신문 2012-09-11
'궁리'는 서울 중심의 제도권 사회에 저항하는 지역 변방의 민중성을 바탕으로
쓰여지고 연출된 창작극이다.
이 작품은 지역문화와 지역 콘텐츠를 보는 눈을 틔워주고,
지역 스토리텔링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사진=국립극단 제공(촬영 심철민)
- "부산 문화, 자폐적 벽 허물고 개방된 국제성으로 나아가야 "
- 장영실이 이룬 엄청난 과학적 업적에도 역사 속에서 실종될 수 밖에 없었던 건
변방 부산의 민중이었기에 차별 받은 것
- 한양 중심의 사고와 지방에 대한 홀대
- 이런 역사적 문제는 현재까지도 잔존 '부산사람 장영실'이야기 쓰게 된 계기
- 문화예술에 행정구획 논리 적용 안될 말
- 지역성에 바탕 둔 정체성을 기반으로 열린 지방자치시대 문화 만들어가야
지난해 부산시립박물관 특별 기획 전시 '궁리-장영실과 과학의 나라'를 보러 갔다가
장영실이 부산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서 필자가 '새삼스럽게'란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가 있다.
장영실이 동래 관노 출신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영실이 조선 초기 동래 관노라는 것과
21세기 지금 부산 사람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영실의 생애를 더듬어 가면서 점점 장영실은 분명한 부산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류처럼 내 의식 속에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장영실이 부산 사람인 이유는 너무도 명백했다.
장영실은 서울 출신도 아니고, 양반으로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는 부산이란 변방의 노비 출신이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실종된 것이다.
나의 이 추론적 결론은 곧바로 동시대와 연결되었고,
지금 이곳의 현실을 되비추는 거울로 작용한 것이다.
■역사는 지금 이곳을 되비추는 거울이다
왜 동시대 독자나 관객들이 역사소설을 읽고 역사극을 관람하는가?
지난 역사를 들추면서 통속적인 궁중비화나
전혀 현실성이 없는 허구적 스토리를 꾸미는 역사물은
시간 때우기 식의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는다.
양맹준 부산시립박물관장은 말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동시대의 연속이며 미래로 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점에서 장영실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장영실은 사라졌지만,
제2, 제3의 장영실은 계속 태어나면서 시대의 희생자로 사라져 가고 있다.
내가 '궁리'를 작품으로 구상한 동기도 바로 지금 이곳에도
무수한 장영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동시대적 동기는 국립극단 공연을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
자아에 대한 주체성을 갖추지 못한 채,
대중사회 거대조직 속에서 하수인처럼 이용되고 버려지는 도시인의 자화상으로
장영실의 존재가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취업을 앞둔 젊은 대학생들은
장영실의 처지를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냉정한 현실로 해석해 내고 있었다.
자아의 주체성 없이 위만 보고 권력과 조직에 의존해서 살면
장영실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이야기성에 그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은 동시대와 만나고 지금 이곳 삶의 문제로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 '
궁리'를 쓴 작가의 관점이었고,
동시대의 젊은 관객은 이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역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는가
동시대의 무수한 장영실을 위하여 '궁리'가 쓰여졌다면,
특히 지역에 살고 있는 동시대인에게는 더욱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다가온다.
조선시대 이후 지금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서울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잠시 동안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았던 6·25 전란 중에
부산의 문화는 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당대의 시인 화가 공연예술가들이 부산의 카페와 주점에서 피워올렸던
전후 부산예술은 가히 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전란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면서
그 찬란했던 예술적 향취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당대 전위적 흐름과 유행을 선도했던 항구도시 부산이 전란이 끝나면서
졸지에 '문화의 불모지'란 불명예스런 딱지를 붙이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임시 수도 부산에 몰려온 서울 문화가
한동안의 문화적 정취를 풍기고는 서울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고,
이때부터 너도 나도 서울로 가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부산의 문화를 황폐하게 만든 셈이다.
서울로 떠나간 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부산에 남은 자들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자폐적인 지역주의의 벽을 쌓아 올렸다.
서울로 지칭되는 중앙문화와 지역문화의 소통 부재는 이렇게 시작된 셈이다.
이게 어디 문화예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무자비한 서울 집중 현상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반에 걸쳐
사회의 구조적 불균형과 불평등의 모순을 낳고 있다.
근래 어느 신문 지상에는
'수도권의 모든 대학은 부산대학 보다 못하지 않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1970년대 전반에는 국립 부산대학교가 연세, 고려 양대 사학과 어깨를 겨루는 명문대학교였다.
그렇다면, 지나친 수도권 집중현상은 1970년대 보다
지금 21세기 전반에 더욱 심화되었다는 말인가?
소위 일컫는 지역자치주의 시대에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현상인가?
그 점에서 '궁리'는 동시대성과 함께 강력한 지역성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장영실이 그 엄청난 과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변방의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같은 직급의 대호군 벼슬인 조순생이 세종의 수레를 제작하는 선공감 책임자였고,
장영실은 고정 직책도 없이 선공감에 소속된 관리였다.
그러나 세종이 타고 가던 수레가 부서졌을 때, 조순생은 처벌받지 않았고
장영실만 태형 팔십대를 맞고 삭탈관직 되었다.
아무리 조순생이 개국공신의 자손이고 당대 정치적 배경을 지닌 인물이라 하더라도
장영실은 당시 중국을 놀라게 한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였다.
그 이해하지 못할 판결을 세종이 내렸는지 영의정 황희가 주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영실은 당시 정치 사회적 출신과 신분 때문에 차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당한 역사적 판결이었는가?
되묻는 형식으로 '궁리'는 쓰여졌다.
그리고 '내 주군은 저기에 있소'라 말하며 손가락으로 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소설과 극은 결말지어졌다.
이제 우리는 자기가 몸 담고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며,
별로 지칭되는 진리와 본질의 세계가
내가 믿고 따라야 할 주군이다는 인식에 당도한 것이다.
■당신 어디 사람이오?
'궁리'를 쓰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데 장영실을 다루고 있는가?"란 질문이었고,
그 질문을 던진 쪽은 인동 장씨 종친회,
그리고 서울에 존재하는 장영실 기념사업회였다.
그 질문 속에는 왜 우리 집안 사람 이야기를
당신이 사전 허락도 없이 함부로 다루는가란 의미가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답변은 단순 소박했다.
"장영실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한 부산 사람입니다.
장영실이 궁내 기술자로 추천받아 서울로 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
바로 부산 동래 지역입니다.
그래서 부산에는 장영실 과학고등학교가 존재했고,
지난해에는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장영실 특별 기획 전시까지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일생을 마친 분이고,
저 또한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한 부산 사람입니다.
한 동안 공부하거나 연극 활동을 하기 위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와 해외에 까지 떠돌아다니지만, 제가 어디 사람이겠습니까?
환갑에 이르기까지 부산 사투리를 쓰면서
부산을 소재로 글을 쓰고 연극을 하는 부산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산 사람 이윤택이 부산 사람 장영실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답변을 다행스럽게
인동 장씨 종친회나 장영실 기념사업회에서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몰랐는가? 뒤늦은 한탄을 하는 게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기막힌 소통 부재의 현실을 확인한다.
■소외되어 온 지역문화
그런 식으로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지역문화는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앞으로 장영실과 관련된 문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자는 제안을
장영실 기념사업회에서 먼저 해 주시고 연극까지 보러 오셨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론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존재하고 있었다.
장영실을 천민으로 다룬 부분이 그분들을 마음 아프게 했음이 틀림없다.
장영실은 사실 천민 출신이 아니라는 것,
원래 중국의 과학자 집안으로 지체 높은 신분 이라는 것 등이 그분들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분들의 뜻을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일 장영실이 개국 공신의 양반 출신이었다면
매를 맞지도 궁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작품으로 다룰 때 마다 발생하는 걸림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난 역사는 대를 이어가는 가문의 명예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
역사를 다루는 작가의 엄격함일 수밖에 없다.
장영실 스토리 텔링을 인동 장씨 종친회나 장영실 기념사업회가 아닌,
부산 문화 콘텐츠를 위한 스토리텔링으로 개발하는 당위성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판단과 재창조는 엄격한 객관성을 지닌 관점에 의해 준비되어야 한다
.
그러나 장영실이 과연 부산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도 나타났다.
장영실의 최후가 대구 경북 지역 일원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가족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제기되면서
그쪽 지역 사람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도 드러났다.
선공감에서 같이 일했던 임효돈이 사실 장영실의 장인이라는 것,
그래서 장영실은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20대 이후 60대까지 살았던 곳이 서울지역이므로 결국 서울 사람이라는 설이다.
아니면 임효돈의 고향이 있는 충청도 지역일 수도 있다는 설이다.
나는 이러한 설왕설래를 일축하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영실은 당시 어느 지역 언어로 말을 했을까요?"
태어나서 이십대 초반까지 부산 동래 지역에 살았다면
어김없이 부산 사투리를 구사했을 것이고,
그 고향 사투리는 웬만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태어나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부산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촌놈이
서울 가서 연극배우가 되고자 했을 때, 부산 사투리는 결정적인 장해요인이었다.
부산 출신 연극배우 추송웅 씨는 그래서 아예 부산 사투리식의 연극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내가 명색 연극연출가인데 환갑을 맞이한 지금까지
거칠고 억센 부산 사투리를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 장영실은 죽을 때까지 그 지독한 부산 사투리를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궁리' 영화화에 대한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장영실 역을 맡을 배우를 미리 추천할 수 있었다.
김윤석, 송강호, 오달수 누구라도 좋습니다….
■다시 봐야 할 지역문화 콘텐츠
사실 '당신 어디 사람이오?'란 질문과
'지금 어디 사시오?'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엄연하게 다르다.
'어디 사람이오?'란 의미는 어디서 왔소? 어디 출신이오? 라는 의미로,
영어로 'come from-'의 전치사가 붙는 성격이다.
한국문학사의 획을 그은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거정'을 보면,
지역성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배돌석이는 김해 사람으로 돌팔매질의 명수였다…" 식으로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김해에서 왼갖 싸움질과 난봉질을 일삼다가 고향에 살지 못하고
임거정의 수하로 들어온 도둑이 배돌석이다.
그는 일정한 주거도 없이 작업할 대상을 찾아 돌아다니는 입장인데,
이런 인생을 어디 사람이라 불러야 하나? 당연히 김해 사람인 것이다.
지금 김해 지역에는 배돌석의 돌팔매질을 텍스트로 한 지역 민속놀이를 시행하고 있고,
배돌석 스토리텔링을 야외 마당극으로 꾸며 보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이것이 지역 문화 콘텐츠인 것이다.
작가 홍명희의 '배돌석은 김해 사람으로-' 이 한 마디가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부활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부산에 주민등록을 얹고, 부산에 살고 있는 시민들도
출신 지역성에 대한 정체성을 별도로 지니고 살았다.
부산 국제시장 상권은 함경도 피난민들의 강인한 생활력이 창조한 경제적 성역이었다
. 내가 살던 연산동 1공구 집단 이주민촌에도
억센 함경도 말을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았고,
그들 스스로 평생 함경도 사람임을 자부심으로 삼고 살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변화 또한 드러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사람이지만, 그 아들 딸들은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부산 사람이란 인식을 갖추어 나갔다.
단적으로 말해서, 부산에는 함경도 사람,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이
다 이주해 와 살았고, 자연스럽게 그 후손들은 부산 사람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열린 지역자치 시대를 꿈꾸며
부산은 근본적으로 토지를 기본으로 성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동래 기장 지역과 다대포 구포 지역을 제외한 부산의 중심지는 바다였거나
조선의 공도정책에 의해 거주민이 살지 않고 버려진 해안가였다.
엄청난 영선산 착평공사로 바다가 매워졌고,
전국 팔도 뿐 아니라 백러시아 미국 일본 청국 영국 사람들이
백년 전부터 들어와 살던 국제적 근대도시가 부산이다.
그래서 부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지역적 배타성이 덜한 곳이다.
근래 부산의 폐쇄적 지역성이 언급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정치행태적 모순의 결과물이다
. 주민등록을 통한 행정구획 구분과
선거구 표밭을 중심으로 내건 슬로건이 '우리가 남이가!'란 자폐적 선동 구호이다.
주민등록번호와 주거지번을 중심으로 주민을 통제하려던 제도는
이미 조선시대의 오가작통법에서 드러나듯이 주민 통제의 호적법에 다름 아니다.
문화예술을 이런 식의 행정 구획 논리로 가두려는 것은
자기 폐쇄적이고 기득권적 사고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의 폐쇄적 기득권 논리로 부산 문화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고 가두면서
'문화의 불모지'를 자초하지 않았는가.
이제 부산 문화는 스스로 자폐적인 벽을 허물고 개방된 국제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산문화는 부산 사람이건 함경도 사람이건 전라도 사람이건 일본인이건 베트남인이건
부산을 상상력의 텃밭으로 삼아 부산에서 창조해 내는 부산의 문화 콘텐츠를
문화적 기반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열린 지역 자치시대의 문화 아니겠는가.
그동안 지면을 내준 국제신문사,
그리고 공연 자료를 제공해 준 국립극단 측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연재를 끝맺는다.
'궁리' 연재는 끝나지만,
이 연재물이 부산의 문화 콘텐츠로 다양하게 적용되는 텍스트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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