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일기 28 – “나는 시골에 산다”
지난 1년 나의 생활은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를 들여다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인>은 찬넬을 돌리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그런 프로가 있는 줄조차 몰랐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마침내 나의 귀촌 단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자연인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뒤흔들어 놓은 것일까?
<자연인>을 보기 시작하자마자 ‘저들은 결국 낙오자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석에서 아니라고 고쳐 생각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란 어차피 경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경쟁'이란 투쟁의 부드러운 이름일 뿐이다. 그렇게 볼 경우 <자연인>은 사회의 낙오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자연인>은 오히려 승자들이 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누가 그 대답을 자연과 유리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자연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철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류 역사는 점점 자연과 유리된 삶 쪽으로 발전하여왔다. 오늘날 대도시 모습은 그 극단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처럼 100년 앞을 내다본 청사진 한 장 없이 광화문 일대에 사람이 넘쳐서 청계천으로 밀려나고, 청계천도 차고 넘쳐서 한강 이남으로까지 팽창한 도시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몇 바퀴 돌아도 잡풀이 자라고 있는 흙 한 줌도 볼 수 없다. 문학적 표현이 아닌 사실 그대로 ‘빌딩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이다.
이렇게 볼 때 승자는 누구인가? 세멘트에 깔린 채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그 감옥을 탈출하여 자연으로 돌아간 <자연인>들인가? 현대인은 웬만한 용기와 결단력이 없으면 자연 회귀는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이 시대의 승자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처럼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자연인>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연과 유리된 현대인의 모습이지 TV 화면에 비친 자연인 그들 자체가 아니었던 것인다.
나는 오히려 TV 속의 자연인은 부정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진정한 자연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연인은 인간은 어디를 가든 인간(人間)답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한문 문자 그대로 人間은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TV 속에 나오는 <자연인>들은 하나 같이 도시 세멘트 감옥만 벗어난 게 아니라 이웃들로부터도 떠난 사람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자연 회귀는 절반의 성취에 그치고 있었다.
내가 귀촌한 곳은 김제시 외곽 작은 시골 동네다. 김제는 지방 도시지만 TV 일기예보에조차 잘 안 나오는 작은 도시다. 이웃 익산이나 전주하고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김제평야를 안고 있지만 현대와 같은 상공업 시대에는 농산물의 힘으로는 어깨를 겨를 수 없는가 보다.
그런 작은 지방 도시에서도 내가 귀촌한 곳은 시내에서 택시로 10여분쯤 더 들어가야 되는, 택시 기사들조차 낯설어하는 작은 마을이다. 주변에는 작은 산도 있고, 농번기에는 강물처럼 흐르는 농수로도 있지만 산에는 등산객이 없고, 농수로에는 물고기 한 마리 놀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고는 끝 없는 논밭 평야뿐이다.
그렇다면 귀촌한 의미가 어디 있는가,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살 이유가 무엇인가? 웬만한 산이라도 올려다보고, 흐르는 개울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이 천지인데 왜 하필 허허벌판 인가?
그러나 나의 대답은 딱 하나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나는 시골에 산다.”는 것이다.
“나는 시골에 산다.”는 이 한 마디 뒤에는 전국 대도시 인구 몇천만이 줄 서 있다. 저 어마어마한 대도시 몇천만 인구 중 한 사람도 “나는 시골에 산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나는 시골에 산다.”는 말을 큰소리 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시골에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웬만한 도시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소신과 결단력의 바다가 놓여 있다.
요즘에는 다행히 귀촌,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아직은 김제시만한 지방소도시 인구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나는 시골에 산다.”는 말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것을 무엇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시골에 산다'는 말은 세 가지가 하나가 된 말이다. '나'라는 존재와 '시골'이라는 자연 환경, 그리고 '산다'는 말이 의미하는 '이웃', 즉 '나는 시골에 산다'는 '人間' 본연의 모습을 말해준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 무엇을 쫓으며 살 것인가? 진즉에 '나는 시골에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한참 땀 흘리며 텃밭을 가꾸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동네 사람들 가을 추수가 다 끝나 있었다.
우리집 텃밭의 배추가 금년 마지막 농사인 것 같다.
열 두어 포기 중 일부러 벌레 많이 먹은 배추를 사진 찍었다.
농약을 쳐야 한다는 데 <자연인>들 한테 '벌레도 먹고 나도 먹고'를 배운 바 있어서
막걸리만 몇 번 뿌려 주었다.
가만히 보니 배추 자라는 속도만큼 벌레들이 다 먹지 못하는 것 같다.
하늘은 참 공평하시다.
'벌레도 먹고 사람도 먹고'
배추 농사가 끝나면 텃밭은 겨울 잠에 들 것이다.
그렇다고 꿈마저 잠이 드느냐?
아니다.
나는 내년 봄 '우리집 개나리 울타리'를 그리며 개나리 모종 50여 구루를 사다 심었다.
10월 한 달 열심히 물을 주었더니 개나리 가지에 새 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내년 봄 '우리집 개나리 울타리' 사진 기대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