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딴 짓>의 줄거리:
딴짓 때문입니다. 주님이 물으십니다. 당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면서도 왜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느냐고. 정말 왜 그럴까요? 우리 자신도 궁금합니다. 여기서 행함의 유무만을 따지면 문제의 핵심을 놓칩니다. 행함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행함 즉 딴짓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딴짓의 이유를 발혀야 행함으로의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딴 짓
(눅6:46-49)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딴 짓>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딴 짓이 뭡니까?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켜서 딴 짓이라고 말합니다.
‘짓’이라는 말은 사람의 행동과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좀 낮게 잡아서 하는 말 아닙니까?
‘나쁜 짓’ ‘어리석은 짓’ ‘미친 짓’ ‘망할 짓’ 이럴 때 쓰는 말이죠.
오늘 주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산상설교 때 마태복음에서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평지설교라고 이름을 붙여서 말하고 있는 6장의 말씀 끝에 질문을 하십니다.
‘참 이상하다, 너희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지키지 않느냐?’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참, 그게 우리도 이상해요, 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에게서 주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고 있을까요?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라, 꾸고자 하는 자에게 주고,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원수를 사랑하고, 모두 주라’
왜 이런 말씀들이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요?
또, 어느 것은 지켜지는 것처럼 보여도, 지키려고 해서 지키는 게 아니라 뭘 안 하고 있다 보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인데, 지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근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않고 또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살지도 않습니다.
어렸을 때, 제 기억으로는 한 끼도 식모누나가 어머니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자, 그러면 행함이 없는 것일까요?
행함이 있다 없다, 이런 상투적으로 신앙의 맥락에서 하고 있는 틀에 박힌 글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합니다.
행함이 있다 없다, 이런 식으로 신앙의 항목으로 제목을 정해서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행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행함이 있지요.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지요.
행함이 없는 게 아니라 지금 딴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행함이라는 것 자체가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렇게 말해 놓고 나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다가 아니라 왜 딴 짓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자는 거예요.
주님은 ‘왜 내 말대로 행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딴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딴 짓을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딴 짓이란 오늘 본문에서 보면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하면, 주님의 말씀이 아닌 행동을 하는 것이 딴 짓이고, 이것이 바로 주초를 흙 위에 세워서 결국은 망할 짓이라는 겁니다.
딴 짓은 망할 짓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다 딴 짓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곳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의견이 있으시고 당신의 생각을 갖고 계신 분께서 나를 보고 계시는 한, 그분의 의견대로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은 딴 짓이고 결국 그 딴 짓이 망할 짓이다 이겁니다.
하여간 주님의 생각대로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딴 짓을 하는 것이고 망할 짓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우리는 딴 짓을 하는 걸까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 들어요, 다 들어요, 주일마다 수요일마다 듣고 또 ‘오늘의 번제’에 참여하는 분들은 아침마다 듣고 새벽기도 때마다 듣고, 또 나 혼자 성경을 읽는 것도 결국 듣는 거예요.
말씀을 듣습니다, 계속 듣는데 행동은 안 나타나요.
이상하지요? 행동은 딴 짓이 나타나요.
왜 그럴까요?
귀로는 듣지만 마음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마음에 감동이 없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좋아하는데 사랑의 고백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죽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온 몸에 진동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고막을 울리기 때문에.
이런 감동이 있어야, 마음에 들려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귀로 백날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해도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는 이유는 마음에 공부하라는 소리가 진동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마음의 고막에 진동이 울려야지 행동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 말이 마음에 들리지 않을까요?
참 신기하지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리지를 않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고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안 하고 다들 딴 짓을 하는 거예요.
딴 짓을 하는 이유는 딴 것을 마음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딴 것을 마음이 보고 있기 때문에 딴 짓을 하게 되는데, 딴 것을 보고 있을 때는 아무리 주님이 말씀하셔도 주님의 말씀이 마음의 고막에 울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내 마음이 지금 돈을 보고 있습니다.
‘돈 벌어야지’, ‘사업을 잘해야지!’ 사업을 보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주님의 말씀이 안 들립니다, 마음의 고막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을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이런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립니다.
이런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다가 ‘기도하고 구하면 받은 줄로 믿으라’ 이런 말이 들리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돈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내게 돈이 하는 말입니다.
돈이 하는 말이 되는 거예요.
건강을 보고 있을 때 그 말씀이 들리면, 건강이 내게 하는 말이 돼버립니다.
보고 있는 것에 한해서만 마음에 들립니다.
보고 있지 않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마음의 고막에 울리지를 않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딴 짓을 하게 됩니다.
딴 것을 마음이 보고 있기 때문에 딴 짓을 하는 거예요.
왜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게 됩니까?
내 마음이 주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지금 하나님 말고 딴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하는 말씀이 귀에는 들리지만 마음의 고막에 진동을 일으키지 못하므로 주님의 말씀이 내 몸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 예를 한번 들어봅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앞서서 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 앞에 서있는 다윗과 밧세바 앞에 있는 다윗을 한번 비교해봅니다.
골리앗 앞에 있는 다윗, 어땠습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사울왕이 그 골리앗을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때 소년 다윗이 돌팔매 도구와 돌멩이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가면서 한 말이 뭐였지요?
‘내가 오늘날 너를 목 베어 죽이고, 블레셋 온 군대로 하여금 이 들판에서 다 죽게 해서 그 시체가 짐승과 새의 밥이 되게 하리라, 그래서 온 천하에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떨치고 그분이 살아계심을 드러내리라!’ 하고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 사울 왕과 비교해볼 때,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골리앗을 보고 있습니다.
마음에 진동이 옵니다, ‘겁난다, 죽겠다, 무섭다’ 이렇게 마음으로 진동이 옵니다.
그러니까 꼼짝 못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지금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럴 때 다윗은 골리앗을 보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있는 골리앗과 블레셋 군인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전달해 주십니다.
우리는 다윗이 용기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고 있을 때, 보고 있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속에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는 다 죽어서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다윗이 하게 되고 그 말이 마음에 움직이면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자, 이제 밧세바 앞의 다윗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안 봅니다, 마음이 밧세바를 봅니다.
마음의 시선이 가 닿는 것에서부터 느낌을 받게 되고, 충동을 받게 되고, 판단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 사람이 움직이게 됩니다.
마음이 보는 것으로부터 판단과 생각이 주어지면서 행동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 내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밧세바를 봅니다, 심히 아름답다고 마음이 느끼게 됩니다.
그 느낌에서부터 생각이 납니다, 의지가 발동합니다, ‘저 여자를 내가 가져야 되겠다!’
그리고 행동합니다.
그 행동에 걸거친 우리야를 죽입니다.
그리고 완전범죄인 것처럼 끝내버립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라는 거예요.
말씀드렸듯이 밧세바 대신에 돈을 집어넣어도 되고 일류대학을 집어넣어도 되고, 건강 무병장수를 집어넣어도 됩니다, 권력을 집어넣어도 됩니다.
지금 박근혜 씨와 안철수 씨가 서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 난리인 것 같아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보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느낌이 옵니다.
‘아, 좋겠다! 대통령이 되면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야지, 나라를 잘 다스려야지!’
그렇게 느낌이 오고, 판단이 오고, 생각이 오면 그 생각대로 움직이면서 대통령이 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이게 다 딴 짓이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보고 있으니까.
다른 것을 보면서 하는 모든 딴 짓은 다 망할 짓이 됩니다.
주초를 흙 위에 두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가운데 당신의 생각을 전달해줄 때 마음이 울리고, 그 마음이 울릴 때 나타나는 행동으로 인생을 살지 않으면 다 딴 짓입니다.
딴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딴 짓으로 인생을 일관하게 될 때 그게 바로 망할 짓이라는 얘깁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 말고 딴 것을 볼까요?
딴 것을 보기 때문에 딴 짓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보면, 보고 있는 것으로부터 느낌이 오고, 충동이 오고, 판단이 오고, 생각이 오고, 그리고 행동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딴 것을 보지 말아야 되는데, 왜 딴 것을 볼까요?
딴 짓의 원인이 되는 딴 것을 보는 일을 어떻게 하면 중단할 수 있을까요?
결국 딴 것이라는 게,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보는 것들이에요.
직장에서 과장님을 보든지 사장님을 보든지, 또 내 과제, 업무를 보든지 돈을 보든지, 사업을 보든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이 삶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것을 봅니까?
왜 자식을 내 마음이 봅니까?
자식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사람을 봅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행동하고 관계 맺어야 되는 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사업을 봅니까?
이 사업을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지나? 하는 책임의식 때문에 봅니다.
다 내가 무언가 해야 된다고 믿으니까 보는 거예요.
보세요, 내가 벌써 주인이 되어 있잖아요?
내가 사업을 마음으로 보면서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내가 사업을 보고 있으면 내가 주인이 된 거예요, 이미.
그러므로 주님보고 주여 주여 하는 건 무색한 얘깁니다.
내가 사업을 보고 있으면서 느낌이 있고, 판단이 있고, 생각이 있은 뒤에 주님께 나와서 ‘도와주세요!’ 하는 것은 말만 존칭어를 쓰고 있는 것이지, 주님이 머슴이 된 것이고 주님이 종이 된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면 보지 마세요.
나는 주인의 얼굴만 보면 되고 주인의 입만 보면 돼요.
내 주변의 모든 삶은 내가 직접 볼 수 있게 놓여있는 게 아니라, 주인의 얼굴에 담겨져 있고 주인의 입에 담겨져 있습니다.
내 자식, 주인의 얼굴 속에 있고 주인의 입 속에 있습니다.
내 사업? 바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입 속에 있고 하나님의 얼굴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으면, 사업에 대해서 내가 사업을 보면서 하는 모든 행동은 딴 짓이 되어버리고 말고, 망할 짓이 돼버리고 맙니다.
내가 한 딴 짓 때문에 사업이 잘 됐습니까?
그래서 인생을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멸망하게 됩니다.
딴 짓으로 성공했다고 보는 것, 딴 짓으로 잘됐다고 보는 것, 이게 다 망할 징조고 하나님이 이미 버리셨기 때문이에요.
딴 짓 하면 안 되어야지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은 다 딴 짓이고, 딴 짓 했는데 세상의 기준으로 일이 잘됐다면 하나님이 지금 버리고 계신 중입니다.
좋아하지 마세요.
‘황후화’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 인상 깊은 영화에요.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권력의 최고 자리에 있는 집권자의 가정에서 탐욕과 인간의 끊을 수 없는 죄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러니까 억제기능이 마비된 상태에 중국의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니까 모든 가족이 다 어떠한 억제도 불필요한 상황이 됐습니다.
그럴 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원수가 되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원수가 되고, 의붓자식과 연인이 되고, 난리가 나는 겁니다.
갖고 싶은 걸 마음대로 다 가졌을 때 나타나는 일이 그런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자기 둘째 아들에게 경고성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이 어머니와 친한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모반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너에게 주지 않는 한 내 것 중에서 아무것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 주지 않는 한 가질 수 없다!’
이게 바로 신앙의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만을 봅니다.
하나님만을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다른 사람들은 왕권을 보면서 내가 가질 수 있을까 없을까, 아! 이렇게 하면 가질 수도 있겠네! 라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돈? 아,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면 돈 벌 수도 있겠네, 일류대학? 내가 어떻게 어떻게 키우면 자식이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겠네, 건강? 이렇게 관리하면 될 수도 있겠네!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봤을 때와 같이 행동을 합니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을 내가 가지려고 행동을 합니다.
이게 바로 딴 짓이고 망할 짓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갖는 것, 그러므로 딴 것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내게 주어질 것은 내 옆에 내가 보고 손을 뻗어야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아무리 내 앞에 갖다 놓아도 안 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사울이 동굴에 들어와서 다윗이 숨어있는 줄 모르고 일을 보고 있을 때, 신하들이 귓속말로 찔러 죽이라고 얘기합니다.
지금 바로 옆에 와있어요, 찌르기만 하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와있는 왕권을 자기가 쥐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한 거절합니다.
이게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도 밧세바를 보고 밧세바를 취하는 딴 짓, 망할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자,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시선이 고정시킬 수 있습니까?
십자가가 그래서 일어난 것이에요.
십자가를 보는 방법 아시지요?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시하고 이 세상을 주님 따라 떠나서 승천하신 곳까지 따라가서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는데, 이 하나님을 뵙는 일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해주신다는 얘깁니다.
육체의 5감관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성령께서 감각이 되어주셔서 하나님을 보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에 우리 인생의 목숨을 거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주님 십자가를 마음에서 놓지 않으면서 주님 따라 승천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자꾸 세상에서 딴 것을 보게 되고, 딴 짓을 하게 되고, 그리고 망할 짓을 인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세상의 딴 것을 보게 되요.
왜 행함이 없습니까?
왜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습니까?
딴 짓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딴 짓을 합니까?
하나님 말고, 주님 말고 딴 것을 마음이 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서 주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길을 따라 내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마음이 하늘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내 마음에 느끼고 보게 하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보면 나타나는 특징이 완벽한 위로, 완전한 기쁨, 완전한 만족입니다.
내 이 세상 형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때에 마음판이 움직이게 될 것이고, 그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행위, 행함이 될 것입니다.
딴 짓, 십자가에서 눈을 돌려 딴 것을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임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저 평생을 밧세바를 앞에 둔 다윗처럼 딴 짓만 하고 살았습니다.
어떡하면 주님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의 시선을 십자가에 묶으시고,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주님 따라 승천하게 하시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만을 보고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서 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귀한 하루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