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북정(南曺北鄭) |
영천에서 예부터 남조북정이란 말이 있다. 이는 영천의 남쪽지방에 사는 창녕조씨와 북쪽지방에 사는 영일정씨 양 문중이 지역에서 상당히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고 바꾸어 말하면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영천지역의 남과 북의 경계는 금호강을 중심으로 나누어 졌다고 본다.
먼저 남조(南曺)를 일컷는 창녕조씨는 고려말 문과에 급제한 조신충이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영천군 창수면(현 금호읍)으로 내려가 터 잡았고, 아들 상치가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는데 이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로 벼슬을 사양하고 지냈다고 하며, 이후에는 지산 조호익선생 등으로 이어지며,
북정(北鄭)을 대표하는 영일(오천 또는 연일)정씨도 고려말 국운을 업고 순절한 포은 정몽주선생 이후 처음에는 문중의 화를 우려해 영천 남쪽 전촌(도동)에 자리를 잡았고 조선이 평정을 되찾은 후 대전동으로 이거를 하였으나 이후 사화 등이 겹치면서 자양, 선원, 횡계 등지에서 선조의 유업을 이어 호수, 양수 등 많은 학자와 국난극복 위인을 배출한 문중이다.
남조북정의 대략적인 역사를 보면 1392년 조선의 개국과 그 맥을 같이하며 국가의 위기시에는 책을 덮고 나라를 찾고자 하는 일에도 양 문중이 솔선 나아가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고 현재 영천시의 지정문화재(아래 자료 참고) 또한 양 문중이 대부분을 소유(영일정씨 22, 창녕조씨 6건)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며 혼맥 또한 많이 교류를 하였음을 여러 자료에서 볼 수 있어 6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지역에서는 명성이 남아있는데 이 또한 양문중 뿐이 아닌 지역의 자랑이 아닐런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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