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記)
(1) 증실기(1)
病焉而醫者情也醫之而痊者理也旣病而不治治之而不勤者以父母之遺體棄之道路者乎治之雖勤而反添違者其又不幸乎誰當其責今余是已余自桑弧之初志於四方年未一紀從兄而北學於長安結友二三子讀書于學宮而文房瀟灑書齋凜洌罅風隙冷浸入肌骨旣及長也讀聖賢之書解諸子百家之傳知古人志大量遠雖拳土塊石無不欲觀以畜其有慨然欲效之癸卯而月出甲辰而湧巖乙巳而漢都之三角白嶽松都之天磨聖居丙午而瑞石丁未而頭流尋師從友負笈橫行旅況殊惡山氣高爽觸霧犯風而寒濕積聚戊申春又在方丈晩聞金先生大猷丁憂義當匍匐忙劇之至未遑取馬徒步往哭於嶺南歸來足已繭而氣已憊矣其年亦復鶯月而完山季夏而玉川孟秋而雪山強從諸生隨行逐隊仲秋而昌平監試菊秋而金堤文場自春曁秋橫行東西占席驢背卜鼎道傍暫無休暇氣因困乏形容枯槁顏色黎黑不知自止休養氣息反以井蛙之見妄意蟾宮之桂與友生金子虛兪翼之鍊業于月出山精廬愼富仁李可售成放翁自光山繼至姪子義叔携李伯元自鳳城最後而至諸友咸集志穿鐵硯然猶未警司馬之枕或不免孫康之睡余以爲於涼處處之志氣爽塏則心自惺惺而可以避睡鄕也常自占冷座而蚤暮起居呼風逼寒氣又不調素積之風忽爾乘隙始焉咳嗽中焉喘急反覆相因終焉中風四肢不仁五關閉塞魄遁神返與人世不相關幾五六日幸賴吾兄奔救之力而得蘇復見天地日月則如萬物旣冬而復春兩曜旣晦而復明矣烏飛兔走奄至于春語漸期期視漸䀮䀮步雖萍梗而倚杖則可行不啻涸鱗得西江之決而圉圉焉洋洋焉悠然而逝吾兄又以爲荒村獨廬醫疏藥乏治療無計請軍于路官擔轎載疾得與兄弟敍盡心懷則恍若出自覆盆之下而覩靑天白日之光矣涉遠歷險身尙康勝亦足爲喜而所可恨者如飛鳥折右翼矣千方萬藥靡有餘力人言汗蒸則可以立效余以爲信然於是構蒸室二間一爲休憩之所而一爲燠室厚塗四壁俾無容錐之隙壘石作突而以沙石塡罅可容坐三四人矣燃薪許多令極熱而塞竈口俾不泄氣積菖蒲蒼耳桔梗生艾于突上而傾注盆水乃裎身入處其中則氣蒸於上如煙如霧凝結爲露兼之以汗流如漿如雨而注於頤下如卒然暴雨而傾屋霤之水矣焰氣外熾而呼吸喘息尙不能自擅必須以帨巾掩口而後可以通吾氣也與余共耐其苦者數人而強者了一飯之頃弱者行百步之間甚者雖須臾之刻尙不能堪忍也余以爲忍苦無據則尤難以心念原道一篇爲期將庶幾畢念也心熱腸爛卽促念了則出用以鹽湯浴洗而重綿挾纊漱口歠粥良久休歇而又還入焉如是者日四五度矣連九日困於炎蒸之中自茲以來日益沈痼氣日益失和將以愈疾而適以資夫疾之尤甚眞所謂非徒無益而又害之者也余嘗觀醫書吐汗下三法所以該盡天下治病之源也夫蒸所以汗者也汗而可療者卒然傷風寒冷客於皮膚之間而未之深入者非若吾病之謂也嗚呼醫不三世不服其藥康子饋藥孔子不敢嘗古人之所以謹疾者如是而今我始旣不能戒愼而馴致此疾傍有伯兄款曲而手救之遠有仲兄慇懃而命藥之諸父諸兄莫不賜念而今又輕信樵童野夫之言自招其舊疾之復焉非徒見責於吾兄抑亦前修之一罪人也噬臍莫及書以爲記聊以爲後人如我者之戒云
병이 들었으면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요, 치료를 하면 나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병이 들었는데도 치료하지 아니하고, 치료는 하지만 열심히 하지 아니하는 것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을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치료를 열심히 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잘못하여 도리어 덧나게 된다면 그것 또한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할 것인가?
지금 내가 바로 좋은 사례이다.
나는 사내로 태어나서 세상에 뜻을 품어 나이가 채 열두 살이 안 되었을 무렵에 형님을 따라 서울로 공부를 하러 갔었다.
두세 명의 벗과 사귐을 맺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책을 읽었는데, 문방구는 깔끔하였지만 서재가 너무 추워서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차가운 기운이 살갗을 뚫고 들어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성현들의 책을 읽고 제자백가의 글을 이해하여 옛사람의 원대한 뜻과 큰 도량을 알게 되었다.
비록 한 줌의 흙이나 한 덩이 돌처럼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지식을 쌓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발분하여 옛 사람을 본받고자 하였다.
1483년(성종 14) 월출산으로, 1484년에는 용암산으로, 1485년에는 서울의 삼각산과 백악산으로, 개성의 천마산과 성거산으로, 1486년에는 무등산으로, 1487년에는 지리산으로, 스승을 찾고 벗들을 좇아서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마구 돌아다녔다.
여행할 때 상황은 더욱 열악하였고, 산에서 느끼는 기운은 상쾌하였지만 안개를 쐬고 바람을 맞아 한기와 습기가 거듭 몸에 쌓였다.
1488년(성종 19) 봄에는 또 지리산에 있었는데 뒤늦게 김대유(2)선생이 부모님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리로 보아 서둘러 허겁지겁 달려가야 마땅하겠지만 갑작스럽게 말을 구할 겨를이 없었기에 걸어서 영남으로 달려가 곡을 올렸다.
돌아올 때는 발이 부르트고 기운은 이미 소진되고 말았다.
그 해에 또다시 꾀꼬리 울어 봄이 깊어가자 전주로 갔다.
6월에는 옥천, 7월에는 설악산으로, 힘겨운 것을 무릅쓰고 억지로 여러 유생들을 따라서 무리를 지어서 갔다.
8월에는 창평(담양)에서 열리는 진사시에 나아갔고, 9월에는 김제에서 열리는 문과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봄부터 가을까지 동쪽과 서쪽으로 마구 돌아다니느라 나귀 등에 자리를 깔고 지냈고 길가에다 밥 지을 솥을 걸었다.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기에 이 때문에 기운이 빠지고 몸이 바짝 말랐으며 얼굴빛은 새카맣게 되었으나 스스로 머물러 쉬면서 몸을 조절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도리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식견으로, 달나라에 있는 계수나무를 꺾어 보겠다는 허황된 뜻(3)을 품고, 친구 유생 김자허,유익지와 더불어 월출산에 있는 정사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이때 신부인,이가수,성방옹 등이 광주에서부터 연이어 내려왔다.
조카 의숙(4)이 이백원을 데리고 구례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였다.
여러 벗들이 다 모이자 그 기세가 쇠로 만든 벼루도 구멍을 낼 것처럼 왕성하였다.
그렇지만 사마광의 둥근 베개(5)가 주는 경각심은 가지지 못하였으며, 어쩌다 손강의 졸음(6)을 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추운 곳에서 거처하면 마음이 상쾌해질 것이요, 그렇게 되면 정신이 저절로 또렷해져서 졸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방에서 가장 차가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렇게 지내다보니 바람을 맞고 한기를 쐬어 기운이 다시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평소 쌓인 풍기가 갑자기 몸이 약해진 틈을 타고 드러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침을 하다가 중간에는 천식이 급해져 거듭 계속되더니, 결국은 중풍을 맞게 되었다.
사지가 뻣뻣해지고 이목구비가 꽉 막혔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나 자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거의 대엿새가 되어 다행히 우리 형님께서 동분서주하시면서 구완하신 데에 힘입어 겨우 소생하여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마치 만물이 겨울을 만났다가 다시 봄을 맞고 해와 달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밝아진 듯하였다.
해에 사는 까마귀가 날고 달에 사는 토끼가 달려(7) 어느 듯 봄이 되었다.
말은 점점 어눌해지고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지팡이를 짚으면 그나마 다닐만하게 되니 마치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서 파닥거리던 붕어가 통쾌하게 흐르는 서강의 강물을 만난 듯이 처음엔 빌빌거리다가 차츰 활발해져서 유유히 헤엄쳐 가는 것 같았다.
우리 형이 또 궁벽한 시골의 외로운 오두막에서 머물면 의사의 재주가 서툴고 약이 부족하여 치료할 길이 없다고 여겨서 역원에 있는 군사들에게 부탁하여 병든 나를 가마에 태워서 데리고 갔다.
형제가 회포를 풀 수 있게 되었으니 황홀하기가 마치 엎어놓은 동이 아래에 갇혀 있다가 빠져 나와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보는 것과 같았다.
멀고 험한 곳을 다 거쳤는데도 몸은 오히려 건강하였으니 이 또한 매우 기쁜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반신불수가 되어 나는 새의 오른쪽 날개를 부러뜨린 것과 같다는 점이었다.
천 가지 처방과 만 가지 약을 동원하여 온 힘을 쏟았다.
사람들은 한증막을 지어서 땀을 흘리면 곧바로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하므로 나도 그렇게 믿었다.
이에 두 칸의 한증막을 지어 하나는 휴식하는 공간으로 삼고 하나는 욱실로 만들고는 네 벽을 두껍게 발라 송곳 끝도 들어갈 틈이 없게 단단히 하였다.
바닥은 돌을 쌓아 온돌을 만들고 모래와 자갈로 틈을 메워 서너 명 정도가 앉을 수 있게 하였다.
많은 나무를 태워 매우 뜨겁게 하고는 아궁이를 막아 따뜻한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창포, 도꼬마리, 질경이, 생 쑥 등을 아궁이 위에 쌓아놓고 동이에 물을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발가벗은 채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증기와 연기가 안개처럼 위로 피어올랐다가 엉겨서 이슬이 되었다.
땀까지 빗물처럼 턱 아래로 타고 흘러내리니 마치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져 처마에서 낙숫물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불기운이 주변으로 치성하게 번져서 숨쉬기와 기침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수건으로 입을 감싸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나와 그 고통을 함께 참아낸 이가 몇 사람 되었는데 오래 견디는 사람은 겨우 밥 한 끼 먹을 정도 만에 나갔고 약한 사람은 백 걸음 걸을 정도에서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심한 사람은 잠시 잠깐도 참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고통을 참을 때 의지하는 바가 없으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한유가 지은〈원도〉한 편을 다 외울 때까지 한증막 안에 있기로 정하였다.
다 외워가다가 심장이 뜨겁고 창자가 탈 정도가 되면 바로 외우는 것을 서둘러 끝낸 다음 밖으로 나왔다.
소금물로 몸을 씻고 두꺼운 면에 솜을 넣은 옷을 입고서 입을 헹구고 죽을 마셨다.
한참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다시 땀을 내었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하루에 너덧 차례씩 하였다.
연이어 아흐레 동안 뜨거운 한증막 속에서 고생하였다.
이로부터 날로 병은 더욱 심해지고 기운이 점점 조화를 잃게 되어 병을 치료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병이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가 될 판이었다.
실로 무익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오히려 해치기까지 한다는 말 그대로였다.
내가 예전에 의학서적을 읽어보니 토하고, 땀을 내고, 설사를 하는 세 종류의 방법은 천하에서 근원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모든 방법인데 저 한증막은 땀을 내기 위한 것이다.
땀을 내어 치료하는 것은 갑작스럽게 찬바람이나 찬 기운으로 피부가 손상된 정도로 그다지 깊게 병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나처럼 이미 병이 깊어진 사람을 두고 이른 것은 아니었다.
아! 의사는 3대를 계속해 온 집이 아니면 그 약을 먹지 않는 법이라고 하면서 계강자가 약을 보내 왔을 때 공자께서 맛도 보지 않으셨으니(8) 옛사람들은 이처럼 질병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처음부터 경계하고 조심하지 못하여 결국은 병이 이와 같이 되도록 만들고 말았다.
곁에 큰형(최대성)이 있어서 정성껏 몸소 구완을 하셨고 먼 곳에 둘째형(최지성)이 있어서 은근히 약을 쓰도록 도와주셨는데 여러 부친과 형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제 땔나무꾼 아이나 무식한 시골 사내들이 근거 없이 하는 말을 가벼이 믿고서 예전의 병이 덧나도록 자초하고 말았으니, 비단 우리 형님들에게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현에게도 한갓 죄인이 되고 말았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에 글을 써서 기록하여 뒤에 오는 사람 중에는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경계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 각주 ----------------------------
(1) 蒸室記. 한증막 이야기.
(2) 김굉필(金宏弼)의 자(字). 남효온(南孝溫)은 저서『사우명행록』에서 산당공을 김굉필의 제자라고 했고, 현재까지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산당공은 이 글에서 김굉필의 자를 불러 김 선생 대유(金先生大猷)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만약 산당공이 김굉필을 스승으로 대우하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당공은 1491년에 돌아가셨으므로 이 때는 돌아가시기 3년 전의 일이고, 이 때까지 산당공은 김굉필을 사형(師兄) 정도로 존칭했을 뿐 스승으로 대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계수나무를 꺾는다는 것은 문과 급제를 말하는 것이다.
(4) 둘째 형 최지성(崔智成)의 장남 최호문(崔浩文)의 자(字) 당시 아버지가 구례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므로 구례에서 살았다. 정여창(鄭汝昌)의 딸과 혼인하였다.
(5) 사마광은 잠을 너무 많이 자서『자치통감』편찬이 늦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그란 나무로 공처럼 베개를 만들었다. 베개를 베고 잠을 자면, 몸을 한번 뒤척이기만 하여도 베개에서 머리가 굴러 떨어져 바로 잠을 깰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베개를 ‘경침(잠을 경계하는 베개)’라고 불렸다.
(6) 상투를 끈으로 묶어 들보에 매어 두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잠을 쫓으며 공부를 했다는 고사.
(7) 해에는 금 까마귀(金烏)가 있고, 달에는 옥토끼(玉兔)가 있다는 전설에서, 까마귀가 날고 토끼가 달린다는 말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
(8) 『논어』<향당>의 “계강자가 약을 나누어 주니 절하고 받으면서 말씀하기기를 ‘내 이 약이 병이 낫는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감히 맛보지 못한다.’고 하셨다.(康子饋藥拜而受之曰丘未達不敢嘗)”를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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