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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강. 믿음으로 보는 세계 (창 13:5-18)
창 13:5-18=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계획을 하시고 언약하셨던 모든 내용들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시는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노릇하게 했다가 어린양의 피로서 건져내어지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하늘에 장자들의 총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장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면,
참 하나님의 장자인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낳아주는 방식으로 만들어 집니다.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피와 물을 쏟고 낳듯이 예수님도 물과 피를 쏟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낳으셨습니다.
이게 모두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죄 아래 있던 자들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반드시 죄 아래 던져 졌다가 되찾는 과정이 있습니다.
되찾는 과정 속에 반드시 그 아들의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잃은 양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되찾아진 사람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고 또한 그 은혜로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그저 받아먹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주신 것에 대해 받아 내십니다.
‘내가 그 구원 줬잖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땅에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창세전에 언약 하실 때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면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도리어 버림을 당합니다.
하늘에 사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삶은 버려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아셔야 합니다.
흔히들 예수 믿고 복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복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복에 땅에 것이 아니라 하늘에 것입니다.
영생의 속한 것들입니다.
이걸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말로 돈 많이 가지면 뭣합니까?
쉼이 없는데,,
그 속에 평안이 없는데,,
사람이 행복한 것은 마음이 편할 때입니다.
마음은 땅에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늘에 것으로만 채워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 하늘에 것으로 채움을 입은 성도들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가두어져 있었어도 그들이 마음속에는 하늘에 평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사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당연히 땅에서는 뽑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화분 분갈이 하듯이 하나님이 땅에서 하늘로 분갈이 하십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하늘 백성으로 건짐 받았기 때문에 땅에서는 버림받는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의 백성이 하늘로 건짐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에게 하늘의 가치가 주어졌습니다.
그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에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은 세상 것을 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땅을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로 땅을 차지하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모든 기득권을 양보해버립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른이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하고 조카는 나쁜 땅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롯은 염치없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가집니다.
롯이 차지한 땅이 본문에서 뭐라 그럽니까?
이것이 시사 하는 바가 엄청 큽니다.
10절을 보세요.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의 눈에는 소돔 고모라가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여호와의 동산이 지금 식으로 하면 애굽 땅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인간들 눈에는 애굽의 땅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인간들에게 행복을 주는 땅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런 땅을 원합니다.
우리는 롯처럼 이러한 땅을 원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팔아먹은 짓을 한 것과 지금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땅을 양보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애굽에 내려가서는 자기 하나 살자고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 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애굽에서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하려면 좋은 땅을 누가 차지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차지하겠지요.
자기가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전혀 예상 밖의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설교 시작에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목적은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라고 했습니다.
참 장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을 봅시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을 하셨으면 합니다.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언제 아셨다고 합니까?
창세전이지요.
창세전이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따라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를 만든 목적이 있는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만들었다면 그 아들의 형상을 만들어 주는 분은 누구일까요?
아들이지요.
진짜 아들을 통해서 양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표정이신데…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아들의 형상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요?
그 아들이지요.
제가 이것을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여섯 째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나기 전에 짐승을 먼저 만듭니다.
짐승을 만든 다음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아들이 나와야 짐승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 소 이런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것들을 안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 구원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구원 이야기를 창조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짐승이라고 해요.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전부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을 일컬어 땅을 보고 사는 자라고 해요.
반대로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는 자라는 뜻이에요.
우린 모두가 예수 믿기 전에는 땅만 보고 살던 짐승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통해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짐승 밥통에 나셨지요.
이건 자기 백성들이 지금 땅 강아지처럼 땅만 바라보고 짐승처럼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 밥이 되어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에요.
그러니 짐승이 참 사람인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된 자들을 양자라고 해요.
이걸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벌리시는 일인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하게 하셨어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만들지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하지요.
이걸 언제 하는가요?
모든 피조물을 다 만드신 후에 하시지요.
이걸 종말이라고 합니다.
여섯째 날이 종말을 상징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종말이 되었어요.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곧 창조의 여섯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여섯째 날이에요.
이제 곧 일곱째날이 와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일곱째 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요.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예수님을 보내서 짐승인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을 줘서 예수로 만드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표된 모습으로 짐승 구유에 밥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는 거에요.
야! 이 짐승들아!
날 먹고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아먹은 짐승들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승이었는데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된 거에요.
이해되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잇감으로 오셔서 우리는 그 예수 속에 하나님의 영생이 든 것을 보고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아신 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어서 그런 것들을 알아보도록 조치를 해 놓으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 믿음을 주었어요.
그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보아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걸 쉬운 말로 예수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지요.
누구든지 날 먹으면 영생 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미친놈이라고 수군거리면서 떠나가지요.
근데 제자들은 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라고 하잖아요.
떠나가는 자는 누구이고,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요?
떠나는 자는 녹명되지 않은 자들이고, 따르는 자들은 녹명 된 자들이에요.
예수가 생명의 떡이에요.
예수를 먹으면 영생해요.
이건 신자들은 안다니까요?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시대 로마에서는 이 말을 오해해서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다 라고도 했습니다.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후대에서는 성찬식으로 나타납니다.
성찬식은 하나의 퍼포먼스일 뿐이고 실제 성찬은 지금 현재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진짜 성찬은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데 그 형상이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겠지요.
구원을 받기 전에는 말이에요.
그 아들에 형상과 반대의 모습이 곧 짐승의 모습인 것입니다.
짐승은 작 몸뚱이를 위해서 살아요.
짐승은 자기 육신의 욕구를 위해서는 남에 것을 빼앗으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짐승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십계명을 통해서 죄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뭔가요?
하나님 섬기지 않고, 이웃을 헤치는 것이지요.
죄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이웃을 헤치게 만든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죄를 빼버리면 십계명의 모습은 정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겠지요.
구원 받으면 이렇게 되어요.
이러한 성향이 나타나게 되어요.
십계명 자체가 우리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실존을 나타내는 거잖아요.
우리의 실존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거기서 죄를 빼버리면 우리의 모습은 십계명이 말하는 것과 정 반대의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십계명이 뭡니까?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두는 것은 죄가 하는 겁니다.
거기서 죄를 빼 버리면 하나님만 섬기게 되겠지요.
반대로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가 도덕질 하게 하고,
죄가 간음하게 하고,
죄가 거짓 증거하게 하고,
죄가 살인하게 하지요?
거기서 죄를 빼면 그런 짓을 안 하는 인간이 되겠지요?
그런 인간이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런 인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면 그 십계명에 반하는 지향성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좀 놓치지 마세요.
이 부분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지향성이라는 것을 꼭 행위로 접근을 합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지요.
예수 안에서 의인일 것 같으면 의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지향성이 있겠지요?
어떤 가치가 있겠지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은 십계명에 반하는 가치관으로 나타나겠지요.
그런 모습들이 신자들 속에서는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 안 짓는 쪽으로 말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는 성향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에요.
이것을 또 죄 안 짓는다로 오해하진 마세요.
우리가 죄 안 지으면 천사가 되는 거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 만드시려는 게 아닙니다.
이 몸뚱이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짓거리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짐승이 할 짓이지요.
이 짐승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만듭니까?
애굽의 바로 왕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와 동행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시청각 교재로 바로가 투입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바로라는 사람은 이 세상의 최고 권세자 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가 바로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 앞에서 자기가 살고자 자기 아내를 파는 짓도 서슴없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바로를 혼내는 것입니다.
바로가 하나님 앞에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때까지는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가 바로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바로를 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배웁니다.
내 생사여탈권은 바로가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있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배워온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찾아오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에요.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다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일평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아브라함을 하나님과 부대끼는 구조 속에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일평생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요.
많이 아는 자는 많이 맡기고 살고, 적게 아는 자는 적게 맡기고 살아요.
성경은 문자일 뿐입니다.
이 속에서는 아무리 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자 속에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자꾸만 시험 당하는 구조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딪히는 일들을 자꾸 경험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게 죽을 맛이에요.
고난이에요.
좋은 신앙은 자꾸 부딪혀야 합니다.
부딪치는 것만큼 알게 되어 있어요.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어요.
이걸 사귐이라고 해요.
사귐은 많이 부대끼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일 년 사귄 사람하고, 십 년 사귄 사람하고, 이십 년 사귄 사람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당연히 다르겠지요.
사귄 것만큼 알잖아요.
만약의 경우에 제가 설교를 하면서 때로는 어떤 행위 차원에서 언급한다고 해도 저와 오래 함께 하신 집사님들은 제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행위로만 듣고 오해를 해요.
왜요?
그만큼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한테 물으세요.
괜히 혼자 생각해서 자기들 생각을 가진 동무들끼리 모여 전혀 다른 그림을 만들지 말고,
그러면 본인들만 손해를 봐요.
궁금한 것 있으면 물으세요!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진의를 알려 드릴테니까요.
전 여러분들에게 행위를 가르칠 생각 없습니다.
그런 것을 왜 가르칩니까?
그게 가르쳐서 되는 일입니까?
인간은 누가 가르쳐서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제가 가르쳐서 여러분들이 뭔가를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종입니다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 속에 법이 작동하기 때문에 목사가 시키니까 하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이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안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시키나 안시키나 해요.
물론 철든 아들에 한해서입니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에서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렇게 주지요?
주인이 종의 역량에 맡게 각 각 주었어요
받은 것만큼 하면 되어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부담을 가지지 마세요.
각각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한 살 짜리는 한 살짜리 일을 시키고, 열 살 짜리는 열 살짜리 시키고, 스무 살 짜리는 스무 살 짜리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두 달란트 줬으면 두 달란트 하면 되고, 다섯 달란트 줬으면 다섯 달란트 하면 됩니다.
주인이 봐서 맡겨주는 것입니다.
그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달란트를 줘놓고 주인이 떠나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어 봐야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 놈이 주인이 있든 없든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지,
아니면 평상시 주인 눈치만 살피는 놈이지 알게 되어요.
눈치 보는 자들은 막상 주인이 눈 앞에 안 보이면 주인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농땡이를 치는 것입니다.
이 놈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그는 종이기 때문에 주인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하는 것을 ‘행위’라고 합니다.
시켜서 하는 일은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있든 없든 하지요.
그것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들은 주인과의 관계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주인이 있든 없든 의식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충성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이 같아요.
믿음을 받은 자들은 항상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속에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없으니까 놀자 하고 땅에 묻어 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가르쳐서 될 것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성령 주셔서 다 되게 만들면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이건 가르쳐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본질적으로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런 죄인을 죽이고 살려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린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이 혼자 하셨어요.
그리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와서 우리를 간섭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을 하시면 간섭당한 사람들 속에서는 아브라함처럼 뭔가 가치관이 달라지는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에요.
아브라함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달라졌나요?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해서 롯에게 양보한 것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얘굽에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 동안 희미하게 알던 하나님을 실제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간섭을 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어요.
아브라함과 동행하는 하나님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관대함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좋은 장소나 환경에 가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어떤 환경이 있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롯에게 좋은 땅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좋은 땅과 나쁜 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좋은 땅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나쁜 땅입니다.
롯은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땅을 감지하고 보았기 때문에 물 많으면 농사 잘되겠구나! 생각하고 좋은 땅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게 애굽 땅 찾는 것입니다.
신명기 11장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가 들어가서 살 곳은 애굽과 다르다고 합니다.
애굽은 항상 물이 비축되어 있어서 네가 파종하고 네 맘대로 살 수 있는 곳이지만,
가나안은 산악지대라 비가 내리면 땅이 흡수해서 다 흘러내려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짓는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씨를 뿌리고 나면 하나님이 비 내려 주시겠지 하고 믿음으로 사는 땅이라고 합니다.
애굽은 믿음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가나안은 믿음 없으면 못 사는 땅이에요.
롯은 지금 믿음 없이도 살 수 있는 땅을 택하였어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는 땅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택하고 롯은 애굽 땅 같은 곳을 택했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땅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자기 기준에서 좋은 환경 나쁜 환경으로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봤을 때는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시는 겁니다.
보이는 가치로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가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은 가치는 뭡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안목으로 봤을 때 좋고 나쁘고는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좋은 분이니까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되지만 하나님 밖으로 떠났을 때는 전부 아닌 것이 됩니다.
인간들 보기엔 좋은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고난당하고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가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게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워가고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많은 부대낌이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도 오래 사귄 친구와 사회에서 자기 유익에 따라서 사귀는 친구는 다릅니다.
오래 사귄 친구는 모든 얘기를 할 수 있고 서로 속속들이 알 수 있지만 자기 유익에 따라 사귄 친구들은 다 서로를 감추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필요한 패만 내어놓습니다.
진짜 진솔한 교제는 그런 오랜 친구와 나누어요.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비유를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이제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한다 하지요?
거기서 말하는 친구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구라 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이제 하늘의 비밀을 말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로 초대를 받은 자들은 그 때 부터는 예수와 같은 사고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밀을 알려줬다면 그 때부터 이 친구는 비밀을 맡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밀을 맡은 자는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 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친구가 된 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사람을 이 땅에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선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여기에 초대를 받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간섭해서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가치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습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누구인가요?
아브라함 후손들이지요.
그럼 그들 속에 아브라함 신앙이 담겨져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보니 아브라함 신앙이 없었어요.
전부 롯처럼 있어요.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하나님이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이 우리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했어요.
인간적 사고로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지배를 당하니까 나쁜 환경이고,
지배하는 로마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을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만약에 유대인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이 로마를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어 줬다고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이 로마를 지배하는 것과 로마가 유대인을 지배한 것과 뭐가 다릅니까?
하나님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든 힘에 법칙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나라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하는 나라에요.
힘에 법칙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으로 세우지는 나라에요.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로 사는 나라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까 우리는 남을 지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이 죄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요구를 안 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걸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어요
너희들은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살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야 할 곳은 저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땅의 분깃을 요만큼도 안 주고 가신 것입니다.
너희 분깃은 여기 없고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렇게 다뤄 가십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을 때문에 조카 롯에게 양보하는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대인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입니다.
물 많은 소돔 고모라가 좋은 땅이 아니라는 걸 안 것입니다.
애굽에서 봤잖아요.
아무리 좋은 애굽에 내려가도 거기서 하나님이 바로를 작살내니까 바로가 깨어지더라는 것을 알았단 말이지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땅이 좋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 곳이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롯은 육의 가치로 땅을 봤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땅을 본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봤을 때 물이 넉넉한 소돔 땅은 에덴동산 같은 땅이라도 결국 거기는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거하는 이 가나안이 박토 같은 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거하면 여기가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좋은 땅을 택한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좋은 땅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좋은 땅이에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켜 봅시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세상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부러운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거지요.
물론 우리가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영악하게 살지만 원칙적으로 보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쉬지도 않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금 야금 우리들을 간섭해서 결국엔 그 자리에 세우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안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한 번 뒤를 돌아보세요.
우리들의 십 년 전에 모습과 지금 모습을 한 번 보세요.
달라져 있지요.
제가 지난 번에 미국 가서 첫 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게 꼭 뒷북을 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나고 나면 이게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이렇게 지나고 나서 감사가 나오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앞 북 좀 치게 해주세요, 미리 좀 알려주세요! 했었습니다.
이제는 그게 감히 보입니다.
아주 조금 보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간섭을 해 오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송강호가 파도를 보면서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옆에서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남의 관상은 보면서 자신의 것은 보지 못했냐고요.
자기는 파도만 봤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파도는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파도를 일으키는 것이 있겠지요?
그게 바람이에요.
송강호가 ‘관상’에서 말하는 애기는 그 당시 대세는 수양대군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것으로 가고 있는데 그의 눈에는 김종서만 살려서 역적 되지 않게 하는 것만 보인 것입니다.
대세를 놓치고 사건만 붙드니까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뤄가는데 창세전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 가세요.
흘러가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가는게 있어요.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다루어 가세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간섭해 오셨구나 하고 뒤돌아보면 그림이 있다니까요.
그러면 이게 또 오겠구나 하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 땐 뒷북치는 것이 아니라 앞 북을 치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올 것이 왔네요.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고 사셨잖아요.
그래서 항상 때를 보시면서 자기가 가야 할 때인지 아직은 가면 안 되는 때인지를 알고 사시잖아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그렇게 간섭하고 사시는 겁니다.
신자는 이것을 압니다.
신앙이 좋은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꾸 사건과 사건으로 부대끼면서 하나님이 나를 다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고아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버려둔 것이 아니구나…
비록 내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곧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졌을 때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비록 내 뜻대로 인생이 안 살아져도 좌절하지 않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올라 와서 조카 롯에게 그 기름진 땅을 내어줄 때는 그만큼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해 아는 폭이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머문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 받는 자리는 결국 하나님의 언약 안이지 세상의 기름진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부대낌을 통해서 이 세상은 허구라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진짜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이 있구나,
성령이 알게 해 주세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주면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 하지요?
늙은이에게 꿈이 뭐겠습니까?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다 적다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늙었다는 것은 지혜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많은 부대낌이 있는 자면 비록 젊은 나이라도 지혜자라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늙은이의 교훈을 멸시치 말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한테 교훈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많은 경험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사람한데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간섭해 가시는지 알기 때문에 그들의 조언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보세요.
롯은 믿음이 없으니까 자기 눈에 물이 많아서 보기 좋은 소알 땅을 에덴동산 같고 애굽 같은 땅이라고 하면서 차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갔잖아요.
그런데 그 소돔과 고모라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어떻게 됩니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유황불 떨어지는 곳이란 말입니다.
멸망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롯은 지금 그걸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지금 겉으로 봤을 때는 물 댄 동산 같은데 조금만 지나면 그 곳이 불벼락이 덜어지는 곳인 줄은 모르고 잇는 것입니다.
그 불벼락이 떨어지는 곳에서 나중에 건져질 때 누구를 통해서 건져집니까?
전쟁 통에 포로로 잡혔을 때 아브라함이 구해주잖아요.
물론 나중에 도시가 멸망할 때는 천사들이 가서 끄집어냅니다만.
결국 성경은 롯을 통해서 인간들이 보기에 좋았던 땅이 결국엔 강도가 우글거리는 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좋은 곳은 전부 죽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항상 죽이는 것은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달콤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신자는 그런 것들이 죄인 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더 윤리적이고 더 나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 하나, 그들이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이 세상 부귀영화가 마치 에덴 동산 같고 애굽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우리 눈에는 장차 망할 것으로 허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없던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아브람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서 결국에는 아들 이삭까지 바치게 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럼 물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정도의 실력이 아브라함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간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지금 우리 식으로 이야기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그 자리까지 가게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거기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는 그 과정이 우리에겐 아픔이지요.
이건 내가 도망간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하고 롯은 지금 현재 두 백성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떡을 좇아가고 하나는 약속을 쫓아간 사람입니다.
떡을 좇아간 사람은 결국 망합니다.
약속을 쫓아간 자만이 하나님께서 건져내시더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롯은 우리 옛사람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옛사람은 롯과 같이 끊임없이 보이는 좋은 환경을 쫓아가잖아요.
그렇게 눈에 좋은 환경을 쫓아가는데 결국에 그것은 좋은 환경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롯이 당하는 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해 봅시다.
우리는 눈만 뜨면 돈 달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저희 큰 딸이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을 꿨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또를 사서 그것도 성경책에 꼽아 놨다는 겁니다.
됐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제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겠지요. ㅎㅎ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거 사서 그냥 일주일동안 행복해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그래요.
제가 우리 딸의 전화를 받고 당첨되기를 바랬을까요?
안되기를 바랬을까요?
목사님은 그래도 믿음이 있으니 안 되기를 바랬을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저도 솔직히 로또 많이 사봤다니까요!
좋은 꿈이라는 꿈은 다 꿔봤습니다.
대통령 꿈도 꿔보고 똥통에 빠지는 꿈도 꿔보고 불나는 꿈도 꿔봤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꿈이란 꿈은 다 꿔봤습니다.
그 때마다 로또를 샀지만 안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꿈에 죽은 조상이 나오고 하면 길몽이다 해서 사겠지요.
저는 다 해봤어요.
심지어 꿈에 예수님도 만나봤다니까요.
그러면 이거 사야겠구나 싶죠.
이게 인간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로또를 맞았다면 그 때부터 내 주변엔 강도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돈을 가졌다면 그 때부터 내 주변엔 사돈의 팔촌의 한 번도 보지 못한 강도들이 와서 돈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롯이 결국 그 지경을 당하는 겁니다.
돈 있는 곳에 가니까 돈을 탐하는 강도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같 은 자기 백성들에겐 좋은 땅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이걸 철저하게 지금 시청각 교재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처럼 구약의 사람들이 이미 겪어 본 것을 우린 후대에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도 롯을 쫓아갑니다.
롯이 간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쫓아 가 보세요.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제가 굳이 답을 드리지 않아도요.
그래서 제가 성경을 상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면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복의 길인지 아닌 길인지 성경 속에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펴면 사도 요한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결국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강도를 불러들일 뿐입니다.
내가 가지면 가질수록 강도는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 몰래 로또를 샀는데 거액이 당첨이 됐습니다.
그러면 이 때부터는 긴장과 갈등이 생깁니다.
들킬까 말까 걱정이 됩니다.
옆에 있는 아내도 도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우린 다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를 소유하면 같이 사는 배우자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런 허상들을 깨는 식으로 일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세상 가치를 버리고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간섭이 여기서 멈추면 안 되고 나중엔 내 목숨까지 알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지경까지 가게 하십니다.
이게 아들의 형상이라니까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닮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원치 않아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육신의 소욕들을 자꾸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잖아요.
내가 자진해서 못 박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면 결국 화근만 불러들이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시고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서 미리 교훈을 받게 만드시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의 가는 길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나를 간섭해 오고 계시구나!
비록 내가 이 땅에서 버림받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성경을 보니 복이더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잘된 사람이 누가 있냐 말이지요.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성경을 보면 전혀 어렵지가 않습니다.
해답이 다 나와 있어요.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해답이 안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가고 있어요.
내 뜻대로 안 되더라도 하나님이 간섭해서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시고 그 속에서 감사하시면서 사세요.
마음을 내가 비운다기 보다 이런 게 있습니다.
내가 비운 것 같은데 내가 비운 게 아니고 주님께서 비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안다니까요!
이 걸 알아야 하는데…
내가 누구를 사랑한 것 같지만 그러나 지나고 보면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로 사랑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니까요.
우리는 뭔가 어떤 일을 행하고 나면 그것이 우리의 열심으로 한 것 같지요?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나면 그건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그 열심을 도출해 낸 것이구나를 알게 되어요.
그렇게 깨달아 졌을 때 뒷북이라도 쳐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러잖아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떄 죽도록 충성하고 봉사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율법 아래 있을 때 복 받기 위해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러한 모습으로라도 말씀대로 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더라니까요.
제가 과거엔 율법 아래에서 정말 열심이 특심했었습니다.
거의 날마다 교회에서 잤습니다.
교회에 미쳐서 그렇게 살았다니까요.
그 당시엔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율법이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열심이나 노력으로 뭐를 얻어 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열심을 냈든 은혜 아래에서 열심을 냈든 그 열심의 근원지는 하나님의 은혜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깨달아 지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에게 극단적으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은혜, 은혜 하면서 게으름을 합리하 화지 말고 차라리 율법주의자가 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율법주의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은혜 아래 있으면 율법도 귀한 것이란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고 보면 과거에 율법 아래에서 했던 것조차도 감사가 되는 거에요.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어요.
우린 모두 과거에 법 아래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범 아래에서 시작을 해서 은혜 아래로 와보니까 이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는 것이 과거의 율법이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은혜에 있으면 과거의 율법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겨집니다.
형식과 내용은 둘 다 버리면 안 됩니다.
그릇과 내용은 함께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복음 알면 율법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율법을 완성 하셨지요.
율법 아래에서 행하던 것이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것이 법으로 작동한 것이 맞아요.
그러나 은혜 아래 들어와 보니까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은혜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열심으로 한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더란 말입니다.
너무 요원한 말입니까?
제발 그런 것들을 분별을 좀 하세요!
지금 이만큼 살아진 내 인생이 있으면 과거에 지나 온 인생도 다 고마운 인생 아닙니까?
그런 과정이 있어서 내가 지금 여기 있구나 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내가 만약 실패를 한 것이면 과거의 모든 것이 실패한 인생이 되겠지요.
그러나 내가 지금 성공을 했다면 과거도 모두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니까 귀한 것이 되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입지전적인 인물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이 성공한 지금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엄마 뱃 속의 태몽부터 이야기를 하지요.
어려서부터의 알들을 다 얘기하잖아요.
성공을 하니까 과거가 다 귀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럼 우린 이미 성공된 자들입니다.
성공된 사람들의 뒤를 돌아보세요.
지나온 아픈 세월들이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성공된 자리에 서 보니까 지난 아픈 세월들도 다 좋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폭이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법이다 아니다 따지지 말고 심지어 법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귀를 뚫은 종처럼 자유를 주어도 그 자유를 주인을 위하여 종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억지로 하였지만 은혜 아래서는 감사함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분명히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법으로 여기는 사람에겐 법이고 은혜로 여기는 사람에겐 은혜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였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이름 내기 위하여 하였으면 법이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였으면 은혜입니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사고가 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법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다 법으로 보이고
은혜의 사고로 보면 다 은혜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의 비유를 알잖아요.
사울의 눈의 비늘이 떨어지기 전엔 전부 율법적 사고를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는 이분법적 사고로만 접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의 비늘이 떨어지고 은혜라는 것을 받고 보니까 모든 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중에 그러잖아요.
“나의 나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율법 아래에서 포행자 노릇하고 악행 한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결국 나를 은혜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 그런 과정이 필요했구나.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더 은혜의 도구로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금 구약에선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선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를 팔아먹은 것조차도,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것조차도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도구로 아내가 희생당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아가는 삶이 자기가 노력해서 자기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해서 사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감히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 할께!
어차피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곳이 약속의 땅이고,
그곳이 기름진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롯은 그걸 모르지요.
롯도 나중에 아브라함과 같이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 팔아먹고 하면서 비싼 수업료 내서 하나님을 알아 왔듯이 롯도 소돔 땅에 가서 거기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다가 전쟁의 포로로 잡혀가고 나중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 되찾아 오는 일들을 당하지요.
롯이 소돔 땅에서 당했던 그 일들이나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겪은 일들이나 똑같은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지금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도 똑같이 그런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이건 극단적인 얘기지만 잘 들으세요.
때로는 여러분이 예수를 저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저주하라는 것은 내가 예수를 저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란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난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아 난 예수님을 사랑할거야 라고 하지만 맘은 원이로되 그게 안 된다니까요.
하나님은 내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고,
내가 예수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라는 실존을 고발시키는 사건을 전개를 시킨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내 안에 있던 것들이 토설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구나…
이런 것이 깨달아 졌을 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군요..
하나님은 그것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좋은 땅 내어줬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대단하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 은혜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애기해 주는 것입니다.
봐라! 울산 목양교회 성도들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뤄가는지 봐라.
아브라함이 지금 현재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
그게 너희의 모습이니라.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세요.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보세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 선이 29절에 나타납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잘나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듯이 지금 우리도 비록 꼬라지는 이래도 그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나중에 저만치 가 보면 내 맘 속에 없던 긍휼이나 이런 마음들이 솟아난다니까요.
그럴 때 그 마음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단히 날 간섭하셔서 나온 것이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우린 그만큼 비싼 수업료 내고 배우는 겁니다.
그렇게 증거 될 때 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 하나 듣고 싶어 하십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그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이 나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대신해서 빌립보 교회에 나의 자랑거리요 기쁨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보고도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아 내가 훗날에 너희들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거리가 되어다오!
그러면 예수님의 자랑거리요 기쁨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부던히 우리를 간섭하고 계셔서 그 자리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디에?
아들의 형상의 그 자리까지.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 바칠 때가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버지 앞에 바치면서,
아버지 내가 이 놈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자랑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거리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께서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비록 내 형편이 요 모양 요 꼴이어도 낙망하지 마시고 그냥 있는 그대로 감사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믿고 사세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부디 그 믿음 가지고 한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