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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평택지역 화교와 중화요리의 산 역사 왕본동(남, 1933년생), 임장매 부부
2015.12.19.(1차), 2019.07.04.(2차), 2020.11.02.(3차)
화교 2세다. 부친은 평택 최초의 중화요리집 쌍흥관에서 일했고 두 번째 중화요리집 홍행원을 운영했다.
왕본동은 쌍흥관 사장 임일홍의 딸과 혼인하여 1960년 평택역 앞에 개회식당을 개업했고 1966년 경 통복시장 앞으로 이전했다.
1차 인터뷰(2015.12.19.)
연세는?
1933년생이예요.
언제 평택으로 오셨나요?
나는 1942년에 왔고(10살) 아버지는 1920년대 초에 왔어요.
아버님이 먼저 자리를 잡고 사장님은 나중에 오신 거네요. 부친께서는 어떤 일을 했어요?
처음부터 중화요리를 했죠. 원평동 철둑너머 농협 있죠, 그 옆에 군청과 경찰서가 있었는데 맞은편에 홍행원이라는 중화요리집을 운영했죠.
홍행원이 평택 최초의 중국집인가요?
최초는 아니예요. 홍행원은 평택리 100번지에 있었는데, 내가 중국에서 건너왔을 때(1942년)는 평택리(원평동)에 쌍흥관, 경흥관 같은 집들이 있었죠.
중화요리집은 전부 화교들이 운영했나요?
그럼요, 다 화교들이었죠. 당시에는 중화요리집이 여러 군데 있었죠. 그 때만 해도 원평동이 평택의 중심이었으니까. (중국)빵집도 있었고.
중국 빵집은 본정통 거리에 있지 않았어요?
홍행원 옆에도 한 집 있었고, 옛날 읍사무소 앞에 기름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 세 들어서도 한 집 있었어요.
지금 말하는 중국빵이라면 무엇을 말하죠?
공갈빵이라는 거 그거죠.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거.
일제강점기 중국화요리 메뉴는 뭐가 있었을까요. 한국인들은 뭘 좋아했죠?
중화요리 식당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 당시 많이 나갔던 음식은 우동, 짜장이었죠.
요리는 비싸서 일반인들이 먹기 힘들었을 텐데 주요 고객은 누구였어요?
청요리 먹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경찰서 고위간부나 군청 간부같은 사람들이 와서 주문했죠. 그 당시는 우동, 짜장도 먹기 힘든 시절이니까요.
일제 강점기 원평동에는 군청, 경찰서도 있고 세무서도 있고 큰길가에는 읍사무소도 있었잖아요. 기억나세요?
본정통은 기억나죠. 우체국 골목이었죠. 골목 입구에 우체국이 있었어요.
본정통에서는 중국인들이 장사하지 않았나요?
(원평동) 장터 안에는 대동병원이 있었고 그 옆에는 경흥관이 있었고. 이 사람들은 해방 전에 귀국했어요. 쌍흥관은 금융조합 앞에 마루보시창고에 있었죠.
사모님(임장매) 말씀은 부친이 운영한 쌍흥관이 평택 최초의 중화요리집이라는데요?
쌍흥관이 처음이예요. 장인어른이 처음 시작했고 1927년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서정리로 이사가서 쌍흥원을 열었어요. 지금 송탄 여성회관 건너편 골목으로 옮겼잖아요. 그 집이예요. 지금은 임연봉이라고 조카가 운영하죠.
장인어른 성함은 어떻게 되죠?
임씨요. 수레 임 자에 임일홍.
그럼 임일홍씨가 평택 최초의 중화요리집을 시작한 분이네요?
그렇죠. 화교 중에는 평택에 처음 들어왔으니까요.
사장님 고향은 어디세요?
산동이예요. 연태시 부산구라는 덴데...
한국에 오게 된 동기는?
그 때는 산동사람들 중에 한국으로 건너오는 바람이 불었어요. 많이들 왔죠.
옛날 군청 뒤에 생금원이라고 있었죠. 유니짜장 맛있었는데요?
생금원은 우리 작은집이예요. 무척 잘 됐는데 주인이 건물을 비워달라고 해서 그만두었죠.
그럼 평택의 중화요리집은 대부분 친척들인가요?
그 전에는 그런 셈이었죠. (임장매)생금원도 그 전에는 경기은행 앞에 있었죠. 해방 전에 들어왔고요. (왕본동)작은 아버지도 해방 전에 아버지와 같이 홍행원에서 일하다가 해방 후 통복동 대동연탄 자리 일본사람 백화점 있는 곳에서 생금원이라는 이름으로 중화요리집 시작했어요. 6.25 후에 경기은행 앞으로 왔다가 나중에 군청 뒤로 간 거죠.
사장님은 학교교육을 어디에서 받았어요?
우리 때는 학교를 서울로 다녔어요. 그 때는 화교학교가 서울 영등포에만 있었거든요. 평택화교학교는 1961년 9월 1일에 개교했고요.
화교학교는 누가 만들었어요?
6.25 바로 뒤에는 학교가 많지 않았고 가려면 가장 가까운 곳은 수원 밖에는 없었죠. 교통도 좋지 않을 때라 무척 고생했어요. 그래서 평택에도 학교를 만들자고 한 거죠.
누가 주도했어요?
평택화교협회가 앞장섰죠. 평택화교협회를 아버지가 이끌었거든요. 아버지하고 화교들이 주도했죠. 중화루, 신정관, 신신반점같은 식당들.
지금은 거의 폐교 수준이죠?
올해(2015) 봄까지는 학생을 뽑았는데 아이들도 없고 운영도 어렵고 해서.(2016년 폐교함)
홍행원이나 개화식당이 통복동과 평택동 일대에 식당을 연 것은 6.25전쟁 때 폭격맞아서 그렇잖아요.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세요?
해방되기 직전하고 되고 나서 쌍홍관하고 경흥관은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해방 되어서 생금원, 우승관, 경화원이 생기고. 경화원은 소락천 아버지가 운영했어요. 6.25 후에는 신신반점, 중화루가 생겼는데, 중화루는 명동골목 제일탕 앞에 있었고 신신반점은 이화예식장 옆에 있었어요.
6.25 후 우리나라가 살기 힘들 때 화교식당이 많이 생긴 이유는 뭘까요?
화교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였죠. 경화루하고 신흥관은 피난 온 사람들이 열었고, 우리은행 앞에 있었던 산해원, 철둑 너머 평화병원 옆에 안중옥도 그렇고. 중화요리집이 많아지고 화교 수가 증가하니까 화교학교를 만든 거죠. 피난민들 영향도 크죠.
화교협회에는 몇 분이나 소속됐어요?
소락천, 개화식당, 동해장... 동해장은 막내 동생이 하고, 양명산도 있고. 많지는 않아요.
양명산은 본래 평택천주교회 앞에 있던 거죠?
그렇죠. 양명산은 친척은 아니고 고향 사람들이죠. 양명산은 본래 송탄에 있다가 여기로 온 거예요.
6.25 때 유엔군 폭격으로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어요?
우리 가게가 경찰서 옆에 있었잖아요. 폭격 맞아 완전히 없어졌고 나머지 가게들도 형편없었었죠. 폭격 맞기 전에 동네 반장들이 돌아다니며 그래요. 오후 1시 반인가 3시 반인가 공습 연습이 있으니까 놀라지 말라. 그런데 갑자기 평택역에서 폭격 맞은 소리가 났어요. 우리는 놀라서 얼른 피난 나왔죠. 그런데 나중에 돌아오려니까 군인(국군)들이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어서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돌아와서 먹을 거라도 가져가려니까 군인들이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러다가 며칠 뒤 (시가지)집중 폭격이 있었던 거예요.
피난은 어디로 갔어요?
저기 높은들(고평)이라고.
그럼 바로 옆 동네로 피한 거네요?
그렇죠. 멀리 가지 않아서 다시 돌아온 건데 군인들이 못 들어오게 한 거죠. 먹을 것도 못 꺼내가게 하고.
폭격은 인민군들이 들어오고 나서 한 건가요?
들어오기 전이었죠.
인민군들이 들어왔을 때에는 피난을 떠나지 못했네요.
그렇죠. 피난도 못 갔고 집도 다 부서지고.
집이 부서진 뒤에는 어디서 기거했어요?
상황이 조금 안정되고 나서 본정통 아래에 상업조합 있죠. 상업조합 옆에 방 두 개 있는 집을 세 얻어서 식당하고 살림집을 만들었어요.
통복동 쪽으로 넘어오신 것은 언제였어요?
휴전되고 여기 사거리(시장로터리) 창성옥 자리를 사가지고 옮겼어요. 창석옥은 음식점이었는데 거기에서 다시 시작한 거죠. 홍행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장님도 같이 했던 거죠?
처음에는 같이 했죠. 그러다가 1960년쯤 평택동 역전에 등산복(노스페이스) 자리에 세를 얻어서 개화식당을 열었죠. 아버지는 계속 사거리에서 홍행원을 하셨고.
여기(통복시장)로는 언제 이전했어요?
28살 때요. 그 때가 1967년이예요.
음식장사 하기는 역 앞도 괜찮지 않았어요?
거기는 세(稅)를 살았으니까 옮긴 거죠. 여기는 시장도 있고 해서 여건이 좋았죠.
통복동으로 옮기면서 매출이 늘었나요?
비슷비슷해요. 특별히 늘지는 않았어요.
화교들은 결혼이나 학교를 어디로 가요?
결혼은 중매를 많이 하니까 화교끼리 많이 하지만 한국 사람들하고도 많이 해요.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터부시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것은 없는데 아무래도 반대도 하고 그러죠.
중국에서 신부를 구해오기도 하고 그랬나요?
그냥 한국에 있는 화교들끼리 많이 하죠. 중국에서 오면 (문화가)서로 달라서 잘 맞지도 않고.
사장님은 어떻게 결혼했어요?
나는 중매결혼했어요.
사모님은 평택의 대표적인 화교집안이었잖아요. 집안 끼리 서로 잘 알아서 결혼한 거네요. 몇 살에 했어요?
나는 21살에 했어요. 1953년인가 한참 어려울 때 했는데.
중국인들의 결혼 풍습은 어때요?
현대식으로 해요. 결혼식 날이면 신랑이 신부와 함께 예식장 가서 결혼식 하고 그래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그 전에는 구식이었죠. 중화민국이 들어와서는 옛날 풍습을 다 없앴죠.
사장님은 국적이 어떻게 돼요?
본래는 중화민국이었는데 한국이 분단되고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대만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죠. 6.25 후에는 중국으로는 갈 수도 없고 건너올 수도 없고 그랬죠. 1993년도 돼서야 중국에 갔어요. 편지도 안 되고 만날 수도 없고 그렇게 살았죠. 1993년도 들어가니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10살 때 나왔으니까.
사장님도 분단과 냉전체제의 아픔을 겪었네요?
지금이야 본토도 맘대로 가고 본토 사람들도 대만에 들어가고 그러는데 옛날에는 어림도 없었죠.
지금은 고향에 자주 가세요?
잘 안 가요. 가봤자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네요?
그렇죠. 여기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죠.
자녀는 어떻게 두셨어요?
2남 2녀예요.
자녀 교육은 어떻게 했어요?
초등학교는 평택에서 다니다가 중·고등학교는 서울로 가고, 대학교는 대만에서 나오고 그랬죠. 화교들이 거진 다 그래요.
대만 대학을 다니면 힘든 점이 없었나요?
대만에서는 성적이 조금 모자라도 받아주고 특혜도 줬죠.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녀들이 가업을 이었네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교들은 대학 나와도 한국에서 취직하기가 힘들었어요. 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를 받아줬나요. 해 먹을 게 없어요.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거죠.
그런데 왜 굳이 화교학교와 대만학교를 다니게 했어요?
기초 때문예요. 고등학교까지 중국학교 다니다가 한국 대학교에 들어가기 어렵잖아요. 지금은 달라요. 화교학교 다니다가 10년 전(2000년대 초)부터는 한국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죠.
자녀분들이 가업을 잇게 된 것도 취업이 힘들어서였네요. 사장님 입장에서 서운했겠어요?
그렇죠. 서운하죠.
손주들은 어떠세요?
우리 손주들은 모두 한국대학을 나왔어요. 지금 뮤지컬을 해요.
멋있게 사네요?
한국대학에 나와서도 요즘에는 취업이 쉽지 않아요.
거의 평생 한국에서 살았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올 때는 .. 그 때 고향에서는 잠깐 한국에 가서 1, 2년 있다가 상황이 안 좋으면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건데 ... 회한이 좀 있죠.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유랑민 같은 마음인 거죠?
그래요, 유랑민 같죠. 고향을 떠나면 안 되는 것도 많고 제약도 많고 그렇죠.
통복시장이 만들어지는 것도 보셨겠네요?
그럼요.
통복시장을 만들 때가 1956년도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전쟁 뒤에는 여기 안성 가는 길(국도 38호선) 좌우에서 노점을 했어요. 여기 뒷길은 시장가는 길 입구 그대로고. 옛날에는 시장이 잘 됐어요. 싸전도 크고 우시장도 있고. 우리 집 동쪽에 길이 지났고 그 쪽으로 앞문이었는데 길을 막는 바람에 시장 쪽으로 문이 났어요. 옆으로 지나는 길이 평택고등학교(현 평택기계공고) 가는 길이었죠.
그래서 여기에 가게를 얻었군요?
그렇죠. 옛날 우리 식당 앞에는 공제병원이 있었고, 옛날 앞문으로 나가면 평고 가는 길이 지났고 사람들 통행이 많았는데 길이 막혀 버리면서 타격이 컸죠. 여기 기업은행 건물이 지어지면서 길이 막혀버렸어요.
통복시장 자리는 본래 과수원이었다고 하던데요?
과수원? 난 못 봤는데.
옛날에는 손님이 많았어요?
장날에는 아주 많았죠. 옛날에는 시장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었죠. 손님들이 많았어요.
유니짜장에 고춧가루를 넣게 된 것은 한국사람 입맛에 맞춘 건가요?
그래요, 입맛에 맞춘 거지. 본래 중국식 유니짜장은 간짜장 식이예요. 짜장면도 중국에서 넘어올 때 간짜장으로 왔어요. 그것이 식성에 맞지 않으니까 지금처럼 만든 거지. 한국의 짜장면이 한국사람 입맛에 맞춘 거죠.
연세가 83세인데 지금도 요리하시나요?
그냥 도와주는 거죠. 거동할 수 있고 큰 병이 없으니까.
2차 인터뷰(2019.7.4.)
개화식당은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아버지 왕기무씨가 1922년에 한국으로 왔어요. 원평동 옛날 경찰서 옆(현 단위농협 자리, 평택리 100번지)에 홍행원이라는 중화요리집을 했죠. 장인어른(임일홍)은 1910년대에 입국해서 평택역전 마루보시 창고 있는데서 쌍흥관을 열었고요. 서정리 싸전거리 쌍흥원은 여기서 장사하다가 1927년에 만든 거예요.
한국전쟁 때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요?
6.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가게와 집이 완전히 부서졌어요. 피난 갔다 왔더니 없어졌더라고요. 피난 후에 원평동 상업조합 옆에서 남의 집 세를 얻어 다시 장사를 시작했죠. 1954년 통복시장을 만들 때 시장사거리(시장로터리)로 옮겨 3년을 장사했고, 군청하고 읍사무소가 평택동으로 옮겨가면서 홍행원은 1963년 경 옛날 읍사무소 건너편 신용금고자리로 옮겨 1970년대 아버지가 작고하실 때까지 운영했죠.
그것이 개화식당의 원조인가요?
개화식당은 1960년에 평택역 앞에서 내가 시작했어요. 1960년 9월 17일이죠. 평택역하고 구 터미널 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야호산장이라는 체육사가 있더라고요. 1967년에 통복시장 입구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죠. 당시에는 이곳에 상업은행만 있었어요. 경기은행, 기업은행, 조흥은행 같은 것은 없었고요.
중국집 요리도 많이 바뀌었죠?
왜정 때는 우동하고 짜장이 많이 팔렸죠. 짬봉(소마면)도 있었지만 잘 안 먹었어요. 옛날 짬봉은 맵지 않았어요.(나가사키 짬봉 스타일) 1960~70년대에 한국인들이 중국집을 많이 개업했어요. 그 때부터 자장면에 고춧가루를 넣기 시작했어요. 한국 사람들 입맛에 맞춘 거죠.
사장님은 언제 한국으로 오셨어요?
저는 1942년에 왔죠. 고향이 산동성 연태시인데 10살에 어머니하고 누이하고 만선기차 타고, 경의선 타고 왔어요. 아버지는 1922년에 한국에 먼저 왔어요. 그 당시 평택에는 장인어른이 쌍흥관을 운영했고 우리 아버지가 나중에 홍행원을 했었죠. 쌍흥관은 나중에(1927년) 양씨 형제에게 넘기고 장인어른은 서정리로 옮겨서 시장 앞 싸전거리에 쌍성원을 개업했어요. 양씨 형제는 본래 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입고 비단을 팔던 비단장수였는데 우리 장인어른(임일홍)과 같은 동네 사람이예요. 그래서 쌍흥원에서 먹고 자다가 비단장수 그만두고 쌍흥원에서 일을 배운 거죠. 형은 양콴시, 동생은 양논였어요. 나중에 양콴시는 쌍흥관을 계속 했고 동생은 독립해서 경영관을 차렸죠. 그러다가 1943년 중국으로 귀국했구요.
생금원은?
생금원은 작은아버지(왕기락)가 운영했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해방 후에 원평동 대동연탄 앞에 개업했어요. 시장사거리(로타리)에 있는 소락천 아버지는 경화원을 운영했어요. 주학문씨라고 해방 후 원평동 금융조합 건너편에 있었는데 나중에 아들이 소락천을 연 거죠. 진위정씨가 운영했던 구승관은 본래 쌍흥관 옆에서 중국 빵집을 했던 사람이 해방 후에 중화요리집을 열었죠. 통복동 땡땡거리(통복지하도) 입구에 있었던 영춘관도 해방 후에 개업했고, 우체국 옆의 양명산은 나중에 들어왔어요. 양명산은 둘째 동생의 생질네 집이었죠. 명동골목 제일탕 앞에는 신성관이 있었어요. 이화예식장 앞에는 경화루가 있었는데 모두 6.25전쟁 뒤 피난민들이 개업한 거죠.
개화식당에서 주로 했던 요리는 뭐였어요?
짜장, 우동, 간짜장이죠. 요리는 지금하고 같아요. 탕수육, 란자완스, 팔보채 같은 것. 오히려 옛날 중화요리가 가짓수가 더 많았어요. 고객도 많았고 요리도 다양하게 시켰고.
고객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짜장과 우동 손님은 일반사람들이었지만 요리는 타지 손님들이 많이 시켰어요. 원평동에 있을 때는 경찰서나 군청에 왔던 손님들이 많이 왔고, 역전에서 개화식당을 열었을 때는 차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
사실 밀가루가 흔해진 건 6.25전쟁 뒤 밀가루 원조가 있으면서부터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해산물이나 고기를 저장하기 힘들었잖아요. 어떻게 구하고 보관했어요?
6.25전쟁 전에는 밀을 대량으로 사뒀다가 필요한 만큼 방아를 찧어서 사용했어요. 재료 보관이 어려웠죠. 전쟁 뒤에는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대한제분 밀가루를 사서 썼죠. 해산물도 싱싱한 날 것을 쓰지 못했어요. 다 말린 거죠. 새우말린 것, 전복도 말려서 쓰고, 중국에서 수입해서도 쓰고 그랬죠. 그러다보니 해방 당시만 해도 짬봉에 해물을 넣지 못했어요. 귀했죠. 고기는 육간에서 가져다 썼고요. 춘장 같은 것도 직접 담가서 썼어요. 춘장은 콩하고 밀을 삶아서 띄운 다음 발효시켜 썼죠. 옛날에는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일손도 많이 들고 하는 일이 많아서 직원들만으로는 운영이 안 됐죠. 애들도 어려서부터 일을 배우고.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은 언제부터 썼어요?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거 있잖아요. 얼음 넣어서 냉장하는 거. 여기 역전 건너편에 얼음공장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사다가 넣어서 냉장을 했죠. 지금처럼 대형 냉장고 쓴 것은 얼마 안 되고.
결혼은 언제 했어요?
1953년에 했어요. 본래 중매로 만나 약혼만 했는데 6.25 겪으면서 결혼식을 못하다가 1953년에 했죠. 우리 집사람은 서정리에서 살았고 나는 평택에 살았고.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했어요. 우리만 해도 전통 중국식 결혼식을 잘 몰랐어요. 아버지도 일찍 중국에서 일찍 나왔고.
국적은 어떻게 돼요?
이승만 정권 때 대만국적으로 바꿨죠. 당시만 해도 중국국적을 가지면 힘들었거든요. 애들도 화교학교 나온 뒤에 대만으로 대학을 보냈고. 1992년도까지는 그랬어요. 그러다가 국교가 맺어지면서 중국 국적을 회복해서 지금은 중국 사람이예요.
오랜만에 고향에 가신 소감은?
많이 달라졌어요.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10살 때 나왔으니 알 만한 사람은 없죠. 형제나 친척들도 함께 나오고 해서 좀 어색했어요.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죠.
3차 인터뷰(2020.11.02.)
평택지역 화교의 역사, 중화요리집의 역사를 알고 싶어 방문했습니다. 평택 최초의 화교는 누구며 처음 중화요리집을 개업한 사람은 누굴까요?
저희 장인(임일홍, 1893년생 추정)이 가장 먼저 온 걸로 알고 있어요. 산둥반도 연태 사람인데 27살에 일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왔다고 해요. 거기서 일하다가 귀국(중국)해서 결혼하고 우리 장모님을 데려 왔죠. 그러고 나서 1920년대 초반에 평택금융조합 앞에 마루보시창고가 있었어요. 창고 옆에 쌍흥관이라는 중화요리집을 열었어요. 그러다가 그걸 다른 사람(양관)에게 넘기고 서정리역전에 가서 쌍성관을 열었죠. 쌍성관은 아들을 거쳐 손자가 물려받아 지금은 이충동 여성회관 건너편 골목에 쌍흥원이라고 이름을 바꿔 운영하고 있어요.
아버님은 언제 건너오셨어요?
우리는 연태시 부산현이라는 데 살았어요. 아버지(왕기무, 1908년생)는 1922, 3년경에 평택으로 건너와서 쌍흥관에서 4~5년 간 일했어요. 그러다가 1928년 평택동 100번지(원평농협 자리)에 홍행원을 열었죠. 장인(임일홍)에게 쌍흥관을 인수했던 양관, 양룬씨는 아버지 외삼촌들이예요. 이분들 중에 양관은 쌍흥관을 인수하고, 동생 양룬은 시장(평택장) 안에서 경흥관이라는 중화요리집을 했죠. 진희정이라는 분은 부승관을 했어요. 진희정씨는 본래 본정통 입구에서 중국빵집을 운영했는데 해방 후 부승관이라는 중화요리집을 했죠.
평택지역 화교단체에 대해 말해주세요?
화교들은 중화상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1942년에는 우리 아버지(왕기무)가 회장이었죠. 이것이 해방 후에 중화자치구(구장 왕기무)로 바뀌었고, 6.25 후에 수원화교자치구와 합병했어요. 이것이 중심이 되어 5.16후에 화교협회 평택분회가 만들어졌고, 2000년 평택화교협회로 독립했어요. 초대 회장이 부인당한의원 하는 왕지민씨죠.
평택에 화교소학교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저는 1942년에 한국에 왔어요. 중국에서 건너오다 보니까 한국말을 몰라서 한국학교에는 갈 수가 없었어요. 해방된 다음에 화교학교는 서울하고 인천, 영등포밖에 없었는데 평택이나 천안, 수원사람들은 모두 영등포로 학교를 다녔어요. 제가 4학년 때 영등포에서 열차탈선사고가 났어요. 당시 합승 칸이 남자는 두 번째고 여자는 끝 칸이어서 다치지는 않았는데 부모들이 크게 놀랐죠. 그래서 6.25 후에 수원에 화교학교를 만들었어요. 1961년 9월 19일에는 평택에도 화교학교가 만들었죠. 초대 교장은 경화루 사장 조연기씨가 했구요.
해방 뒤 화교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해방 직전(1944년) 귀국한 사람들이 많아요. 앞에 쌍흥관을 운영했던 양관형제, 양관의 삼촌인데 여기(원평동) 읍사무소 맞은 편 기름집에서 호두빵 장사를 했던 양천종씨도 모두 입국했죠. 경화원(현 소락천)을 했던 주학문씨도 해방 전에는 쌍흥관에서 일했어요. 입국 안 한 사람들은 왕씨(왕기무 가족), 진씨(진조리), 주학문씨 뿐인데, 철길 옆 굴다리(통복지하도)의 영춘관(사장 진조리)은 귀국을 안 했던 진씨가 해방 후 개업했죠. 그 아들이 진영남인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갔구요.
해방 후 화교들은 이승만정권의 정책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문제였어요?
해방 전 평택지역 화교들은 중화요리를 하거나 포목장사(비단장수)를 많이 했어요. 당시에는 중화요리는 중국인들만 했죠. 둔포에 비단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안중 사람들은 비단을 지고 다니며 팔았죠. 평택 시장 안에는 가마솥점하고 광목옷감을 파는 포목점을 했던 사람도 있어요. 화교들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모두 (중국에서 물건을 가져다 파는)도매상들이었어요. 그런데 해방 후에 이승만 정권이 중국 무역상들은 부정축제자라며 탄압을 한 거예요. 부동산 매입도 허가를 내야 했는데 대지는 200평 이내, 농지는 1,000평밖에 매입할 수 없었죠. 농사짓는 사람들은 1,000평 가지고는 살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 뒤로 (중국인)야채장수들이 없어졌어요. 초과하면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니까요. 뭘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중화요리집을 많이 하게 됐어요.
해방 이듬 해 병술년 물난리가 났을 때 기억을 말해주세요?
대단했어요. 우리 집(홍행원) 식당이 유리창이었는데 한 칸 남겨두고 모두 잠겼어요. 집안에는 밀가루, 쌀, 설탕이 쌓여 있었는데 모두 못 쓰게 되었죠. 시장사람들 피해가 가장 컸어요. 상점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모두 잠겨서 썪었잖아요. 그 때 군문교 다리부터 넘쳐서 시내로 물이 쏟아졌는데 대단했어요.
6.25 때 평택역이 폭격 됐잖아요. 그 광경은 어땠어요?
폭격 있기 전날 읍사무소 반장들이 돌아다니며 전달했어요. 다음날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에 공습 연습이 있을 예정이니 놀라지 말라고요. 그래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엄청난 소리가 나면서 불길이 치솟더라구요. 엄청 놀랬죠.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서 저기 팽성읍 있잖아요 거기로 피난 갔어요. 9월에 돌아왔는데 그 폭격 있고 5일쯤 뒤에 다시 시내를 폭격했다고 하더라구요. 모두 타버렸죠.(왕씨는 유엔군 비행기가 네이팜탄 등으로 불을 지른 것으로 기억함) 우리 가게가 경찰서 옆 평택리 100번지에 있었잖아요. 가게도 집도 폭삭 내려 않고 군청, 경찰서, 옆집, 시장 어디 할 것 없이 폭격 맞고 불에 타서 아무 것도 없었어요. 우리도 모든 걸 잃었지요. 경찰서는 평화병원으로 군청은 어딘지 잘 모르는데 거기에 임시로 갔고 그랬죠.
그러면 폭격 이후에 가게는 어떻게 운영했어요.
저기 평화병원 있잖아요, 거기 아래는 괜찮았어요. 그래서 평화병원 조금 아래에 상업조합 건물이 있었는데 그 옆에 가게를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지금은 거기가 2층집으로 바뀌었더라구요. 간판은 여전히 홍행원이었구요. 그러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교통대사거리(시장로터리) 대림목재 맞은편으로 옮겼어요. 지금 소락천 있는 옆 골목이죠. 좁은 골목에 홍행원, 부승관, 신성관이 서로 붙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1960년에 내가 평택역 앞에 개화식당을 열었고, 아버지하고 동생들은 1963년 읍사무소(평택동) 근처로 옮긴 거죠. 간판은 여전히 홍행원이었구요.
사장님 형제들은 모두 중화요리를 했나요?
우리가 3형제인데 나는 개화식당으로 독립해서 나왔고 막내 동생은 아버지하고 홍행원을 했어요. 둘째는 지금 동해장 자리에서 홍태루라는 중화요리집을 했어요. 작은아버지가 생금원을 했구요. 그러다가 둘째동생이 대만으로 건너가고 그 자리에서 막내 동생이 동해장을 연거죠.
부친은 언제 작고했어요?
부친(왕기무)은 1977년에 돌아가셨어요. 일흔 하나(1908년생)이었죠. 장인하고는 열 살도 더 차이 났고요(장인 나이가 더 많음). 지금 생각하면 일찍 돌아가셨죠.
사장님 결혼은 언제 했어요?
우리 집사람(임장매, 1935년생)은 쌍흥관을 했던 임일홍씨 딸이예요. 내가 1933년생이니 두 살 차이죠. (임장매씨 인터뷰)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오빠(임장록)하고 동생들도 한국에서 태어났구요. 오빠(임장록)는 아버지(임일홍)를 이어 이충동에 쌍흥원을 해요. 지금은 조카가 운영하구요. 아버지(임일홍)는 6.25 후에 돌아가셨어요. 그 뒤에 오빠가 쌍성원을 가게가 잘 되라고 쌍흥원으로 바꾼 거죠. 남편(왕본동)은 수원 화교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기차타고 다녔죠. 그 때는 수원까지도 멀었잖아요. 수원화교학교는 학생이라야 10명이었다가 나중에 20명이 되었데 그래서 같이 다닌 사람들을 모두 알죠. 한 2년 다니다가 그만 다녔어요. 아버지가 한국 학교도 안 보내주고 화교학교도 못가고 해서.... 다른 애들이 학교 다니고 하면 부러웠죠. 그래도 안 보내주는 걸 어떡해요. 학교 못가고 식당(쌍성원)에서 써빙하고 일했죠. 일손이 부족했나 봐요.
옛날 짜장하고 지금하고 많이 달라졌죠. 옛날에는 중화요리집에서 어떤 요리를 했어요?
왜정 때는 재료를 중국에서 가져다 썼어요. 춘장하고 재료들도 가져왔죠. 해산물도 말린 것 갖다 쓰고. 해방 후에는 그거를 가져올 수 없게 됐잖아요. 그래서 해방 2, 3년 뒤부터는 짜장(춘장)을 직접 담가 썼어요. 그 때는 짜장 색깔이 지금처럼 시커멓지 않았죠. 그걸 볶아서 사용하다가 1970년대 초에 공장에서 나오는 춘장을 쓰기 시작했죠. 공장 것은 까맣게 보이려고 카라멜을 넣어서 볶으면 반짝반짝 빛났어요. 자장은 본래 간짜짱이예요. 춘장 담근 것을 볶아서 만드는데 한국 사람들 식성에 맞게 바뀐 거죠. 짜장 재료도 6.25 뒤에는 고기하고 말린 해삼이 전부였구요. 지금처럼 다른 재로는 구하기 힘들었어요. 옛날에는 짬봉도 빨갛지 않았어요. 소마면이라고 백짬뽕이예요. 1970년대에 고춧가루를 넣으면서 지금처럼 빨간 짬뽕이 만들어졌죠. 짬뽕이라는 이름도 빨갛게 만들면서 붙여졌어요. 이것저것 넣는다고요.
사장님 요리 기술은 어떻게 배웠어요?
부친한테 배웠죠. 누가 가르쳐 주나요. 그냥 일하면서 배우는 거죠.
개화식당은 언제가 전성기였어요?
제가 1960년에 역전에 개회식당을 열었어요. 노스페이스 자리요. 거기에서 8년을 있었어요. 2, 3년 지나면서부터(1962년) 장사가 잘 됐죠. 그래서 돈을 벌어 1967년에 시장(통복시장) 옆에 건물을 사서 이전한 거예요. 여기가 제천옥이라고 하는 식당을 했던 자리예요. 여기 와서도 아주 잘 됐어요. 한 때는 세금도 가장 많이 냈어요. 그러다가 저기 읍사무소 옆에 만리향이 생기면서 장사가 잘 안 됐어요. 만리향이 크고 해서 단체손님들이 거기로 많이 갔어요. 홍행원은 1960년대에 가장 많이 알아줬죠.
짜장면 값이 싼 것은 6.25 뒤 밀가루 원조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옛날에는 밀을 사다가 방앗간에서 찧어서 썼죠. 식수도 관정을 박아서 펌프를 설치해서 썼고요. 옛날 우리집(평택리 100번지)으로 이웃사람들이 물 길러 왔어요. 불은 석탄 부셔서 물로 개서 때는 거 있죠, 패치카라고. 그걸로 요리했어요. 반죽도 모두 손으로 했죠. 수타면이라고 한 건 얼마 안 돼요. 다들 손으로 했으니까. 기계 나온 것은 1970년대죠. 밀가루는 대한제분하고 제일제당 것 가져다 쓰면서 직접 찧지 않게 되었고요. 밀가루가 싸니까 짜장면 값도 쌌던 거죠. 일반 사람들은 짜장면만 먹으니까 비싸기도 어려웠어요.
중화요리는 다양하잖아요. 개화식당, 동해장하면 유니짜장이나 가지튀김을 떠올리고요. 새로운 요리는 어떻게 계발했어요?
사실 새로운 요리 계발은 요즘 하는 얘기죠. 옛날에는 손님이 원하면 뭐든 만들어줬어요. 평택역 앞에서 개화식당을 할 때는 손님 한 분이 울면이나 짜장면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울짜장을 만들기도 했어요. 잡채밥이나 짬봉밥도 없던 것을 손님들 요구에 맞게 만든 거죠. 유니짜장도 지역마다 도시마다 다 달라요. 우리 것은 된장과 고기를 갈아 넣은 데다 고춧가루를 넣어서 맵게 하잖아요. 그게 특색이죠. 산둥에 가면 가지튀김을 많이 먹어요. 집에서도 누구나 해 먹죠. 그걸 우리 실정에 맞게 계발한 거예요. 특별하다면 특별하죠. 동생네가(방송에 나가면서) 유명해졌지만 우리 집에서도 했던 거고 작은아버지(생금원)도 했고요.
주방을 슬쩍 봤더니 젊은 남자분이 요리를 해요. 손자신가요?
우리 손자예요. 본래 대만 가서 백화점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도 하고 그랬어요. 저 아이는 일식, 중식, 한식 자격증을 모두 갖고 있어요(자랑스러워 함). 요즘에는 중화요리가 힘들다고 젊은 애들은 모두 피하는데...
힘들어서 말리지는 않았어요?
자기가 좋다고 하면 하라고 해야죠.
(손자 왕시문(남자, 1983년생)씨 인터뷰) 어떻게 가업을 잇게 됐어요?
아무래도 할아버지 아버지가 중화요리를 하니까 어려서부터 익숙하죠. 사실 저는 요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일반회사를 다니다가 월급이 적어서 그만두고 대만으로 건너가서 사업을 시작했죠. 동업으로 백화점에서 아이스크림 사업을 했어요. 사업해보니 월급이 얼마나 적었는지 알겠더라고요. 매출이 한 달에 1억씩 됐죠. 그러다가 반사기 당해서 이익도 챙기지 못하고 그만뒀어요. 한국으로 건너와서 요리를 배운 거죠. 집에서는 중식은 힘들다고 말렸어요. 그래서 일식과 한식을 같이 배웠죠. 저는 면 종류보다 밥장사 쪽으로 관심이 많아요. 중식은 크게 관심이 없었죠. 그러다가 기왕 하는 것 중식당을 이어 받는 것도 좋겠다 싶어 서울(이태워)에서 일하다가 몇 달 전에 내려왔죠. 지금도 이태원에서 살아요. 이것(개화식당)도 작은아버지가 있어서 물려받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