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還生)하다
육관대사가 모든 제자를 모아놓고 법연(法筵)에 앉았는데, 몸가짐이 엄숙하고 촛불이 휘황한지라, 이에 성진을 크게 꾸짖되,
“성진아, 네 죄를 아느냐?”하니
성진이 몹시 놀라 섬돌 아래에 꿇어앉아 대답하였다.
“소자가 사부를 섬긴 지 십여 년에 이르나 조금도 불공불순한 일이 없삽는데, 이제 엄히 나무라시니 어찌 감추오리까마는 실로 죄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대사 더욱 노하여 꾸짖었다.
“행실을 닦는 중이 용궁에서 술을 먹었으니 그 죄 첫 번째이고, 돌아오다 석교 위에서 팔선녀와 더불어 수작하며 꽃가지를 꺾어 던져 명주로 희롱하였으니 그 죄 둘째고 돌아온 후에 불법을 까맣게 잊고 세상의 부귀를 꿈꾸어 호탕한 마음이 열반(涅槃)의 경지를 꺼려 하니, 그 죄 셋째이니 이제는 도저히 여기 더 머물지 못하리라.”
성진이 머리를 조아려 울며 하소연을 하였다.
“소자 실로 죄가 많나이다. 그러하오나 용궁에서 술을 먹었음은 중니의 강권함을 이기지 못함이요, 석교에서 선녀들과 수작한 것은 길을 빌리려 함이요, 제 방에서 망상함이 있으나 깊히 뉘우치며 자책하였사오니 이 밖에 다른 죄는 없나이다. 설사 다른죄가 있다 한들 사부께서 종아리를 쳐 경계하심이 도리거늘, 어찌 박절히 내쫒으시어 스스로 고치려는 길을 끊게 하려시나이까? 이 몸이 열두살에 부모를 버리고 사부께 들어와 중이 되었으니 친부모의 은혜와 같으며, 또한 義를 말하오면 자식이 없어도 자식이 있음과 같사옵고 사제의 인연 또한 중하온데 연화도량(蓮花道場)을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으리까?”
대사가 이르기를,
“네가 원하는 곳으로 나갈 수 있게 함인데 어찌 주저할 수 있으리오? 또 네[가 ‘어디로 가오리까?’하는데, 네가 가고 싶은 곳이 바로 네가 마땅히 돌아갈 곳이니라.”하고
다시 소리 높여 말하였다.
“황건역사(黃巾力士)야, 이 죄인을 이끌고 풍도옥(酆道獄)에 가서 염라대왕께 넘겨줘라.”
성진이 이 말을 듣자 간담이 철렁하며 눈물이 쏟아지고, 머리를 두드려 애걸하되,
“사부, 사부는 들으소서/ 아란존자는 창녀와 동침하였으나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는 죄를 주지 아니하시고 벌만 내리셔쑈으니, 소자가 비록 조심하지 못한 죄 있사오나 아란존자에게 견주오면 그 죄가 적사온데 어찌 연화도량을 버리고 풍도지옥으로 가라시나이까?”하니
대사가 매우 엄하게 이르기를
“아란존자(阿難尊子: 석가반니의 종제)는 비록 창녀와 동침하였으나 그 마음은 변치 아니했거늘 너는 요사스런 계집을 보고 단번에 본심을 잃었으니 한번 윤회(輪廻)하는 고생을 면치 못하렸다.”
성진이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과 대사께 하직하고 사형사제(師兄師弟)를 이별하고서 황건역사를 따라가려 할 즈음 대사가 불러 다시 위로하되,
“마음이 정결치 못하면 비록 산중에 있다 해도 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요, 근본을
잊지 아니하면 비록 열길 티끌 소에 떨어지더라도 필경 돌아올 날이 있나니, 네가 이곳에 돌아오고자 할 때는 내가 몸소 데려올지니, 너는 의심치 말고 떠나도록 하라.”
성진이 역사를 따라 지부로 들어가 망향대(望鄕臺)를 지나 풍도성 밖에 이르니, 문지기는 귀졸(鬼卒)이 어디서 왔나를 묻는지라, 역사가 대답하기를,
“육관대사의 명을 받아 죄인을 이끌고 왔노라.”
귀졸이 성문을 여ᅟᅣᆯ고 들어가라 하자, 역사가 염라전에 이르러 성진을 잡아온 연유를 아뢰니 염라대왕이 성진을 가리켜 묻기를,
“그대의 몸이 비록 연화봉에 매었으나 이름은 지장왕(地藏王) 향안에 있었으니, 신통한 술수로 천하의 중생을 구제할까 여겼더니, 이제 무슨 일로 여기에 이르렀느뇨?”
성진이 부끄러워 주저하다가 겨우 아뢰되,
“소승이 불민하와 스승께 죄를 얻어 이에 이르렀으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오래지 아니하여 역사가 팔선녀 또한 잡아오니 염라왕이 호령하여 꿇리고 묻기를,
“남악선녀야, 선도는 스스로 무궁한 경계가 있고 무한한 쾌락이 있거늘, 어찌하여 이 땅에 이르렀느뇨?”
선녀들이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답하되,
“첩들이 위부인의 명을 받아 육관대사게 문안드리옵고 돌아오는 길에, 돌다리 위에서 성진과 더불어 문답하온 일이 있삽기로, 대사가 위부인께 글발을 보내어 첩들을 잡아 대왕께 보내니, 바라건대 자비심을 내리사 조흥 땅에 태어나게 하옵소서.”
염라대왕이 사자 아홉 명을 앞에 불러 분부하되,
“이 아홉 사람을 각각 영솔하고 인간계로 나아가라.”
말을 마치매 갑자기 모진 바람이 전각 앞을 스치며, 아홉 사람을 공중으로 휘몰아 올려 사면 팔방으로 흩어지게 하더라.
성진은 사자를 따라 바람에 몰려 지향없이 가다가, 한 곳에 다닫자 바람소리가 비로소 멎으니 두 발이 땅에 닿으므로, 성진이 놀라 혼을 수습하고 눈을 들어보니 울창한 푸른산이 사면에 둘러있고 잔잔한 맑은 시내가 여러 갈래로 흐르며, 줄타리와 초가지붕이 수목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는데 겨우 여남은 집이더라. 두어 사람이 마주서서 한가롭게 지껄이는 말이,
“양 처사 부인이 오십이 넘어 태기가 있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했더니, 해산할 징조가 있은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아이 소리가 나지 않으니 괴이하고도 염려롭다.”하기에
성진이 가만히 생각하되,
“내가 이제 세상에 환생하겠으나 지금은 다만 혼백뿐이요, 골육은 바로 연화봉 위에 있어 벌써 태워 버렸을 것인데, 내가 연소한 까닭으로 제자를 두지 못하였으니, 누가 나를 위하여 내 사리를 감추어 두었으리오?”
이렇듯 두루 생각하니 마음이 처량할 따름이더라, 이윽고 사자가 나와 손짓하여 부르되,
“이 땅은 대당국(大唐國) 회남도(淮南道) 수주현(秀州縣)으로 양처사 집이니 처사는 너의 부친이요, 처사는 유씨는 너의 모친이라, 네가 전생의 인연으로 이 집 아들이 되는 것이니, 속히 들어가 좋은 떼를 놓치지 말라.”
이때에 성진이 즉시 들어가 보니, 처사는 갈건야복(葛巾野服)의 허름한 옷차림으로 대청에 앉아 약을 다리는 향내가 집안에 젖었고 방 안에서는 부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지라, 사자가 재촉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라 하나 성진이 의심스러워 주저하자, 사자가 거세게 등을 밀치는 바람에 성진이 땅에 엎드려지며 정신이 아득하여 천지를 분별치 못하고 크게 부르짖되 ‘사람 살류/ 사람 살류/’하나,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말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