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픽션]
검은 돌밭의 기억
한라산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작은 마을, 제주도는 늘 그렇듯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수많은 검은 돌들이 대지를 덮고, 그 사이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평화롭지만 어딘가 무겁게 느껴졌다.
주인공 은희는 그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스무 살의 소녀였다. 그녀는 바다를 닮은 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을 도와 밭일을 하며 지내던 그녀는 한때 마을의 젊은이들과 함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꿈을 꾸었다. 하지만 1948년 4월, 그 꿈은 점차 먼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은희는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소문을 듣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섬에 와서 반란을 진압한대." "산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잡혀간대." 누구나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지만, 공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다.
그날도 은희는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 있었다. 한라산에서 부는 바람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마을 어귀에서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은희의 집에도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너희 집에 반란군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군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은희의 아버지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린 그냥 농사를 짓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반란 같은 건 모릅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은희의 오빠인 동혁을 끌어냈다. "젊은 놈들은 대체로 산으로 올라갔더군. 너도 같이 갔던 거 아니야?"
동혁은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가족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듣지 않았다. 동혁은 거칠게 끌려갔다. 은희는 동혁을 붙잡으려 했지만, 군인의 총끝이 그녀를 저지했다.
"가족을 위해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그날 밤, 은희는 오빠의 빈방을 바라보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그녀와 같은 일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사라진 사람들, 불타버린 집들, 그리고 공포에 떠는 남은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은희는 마을 어귀에서 시체 몇 구를 발견했다. 그중 하나는 동혁이었다. 그는 다른 주민들과 함께 참혹하게 희생당한 채, 한라산의 바람 속에 던져져 있었다. 은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그녀는 이 모든 고통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무자비한 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은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군대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합류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더 이상 우리가 죽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했다. 밤마다 총소리와 비명이 들렸고, 은희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산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복수와 슬픔이 뒤엉켜 있었다. 은희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엔 동혁을 잃은 슬픔과 함께, 이 모든 불의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저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산속 사람들조차 군대의 무자비한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은희가 속한 저항군은 완전히 진압당했다. 그녀는 마을로 돌아가길 결심했다. 더 이상 싸움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타버린 집과 텅 빈 거리, 그리고 한라산의 검은 돌들만이 남아 있었다. 은희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과 조용히 삶을 이어갔다. 그들의 삶은 그저 버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희는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기억을 지키고자 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그리고 그것이 남긴 상처를.
시간이 흘러도 한라산의 바람은 여전히 차갑게 불었다. 하지만 은희는 그 바람 속에서 동혁과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은희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었다.
끝.
제주 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수많은 제주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이 소설은 그 속에서 한 여성이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결국 잃어버린 고통과,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