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금마저(金馬渚)에 정착시킨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 중이었다. 『삼국사기』<문무왕 11년(671)>에 당나라 행군총관[1]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침략하면서 전쟁 시작 전에 문무왕에게 선전포고 격으로 보낸 <편지>와 함께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답장>이 수록되어 있다. 설인귀는 <편지>에서 “예전에는 충의를 말하다가 지금은 역신이 되었으니 처음에는 길하였으나 끝내 흉해진 것이 한스럽고 근본은 같았는데 끝이 달라진 것이 원통합니다.”[2]라고 신라가 당나라를 배반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보낸 <답장>에는 “선왕(무열왕)께서 정관 22년(648) 당나라 조정에 입조[3]하여, 태종문황제로부터 직접 받은 은혜로운 조칙에 적혀 있기를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하여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니, 내가 두 나라(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영원히 평안토록 하리라.’ 하시며 계획을 지시하시고 출정할 기일을 정해 주셨다.”[4]
그런데 『삼국사기』<문무왕 5년(665)>에는 “가을 8월에 임금이 칙사[5]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6]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었다.”[7] 라고 적혀 있고 또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답장>에 “7월에 당나라에 입조했던 사신 김흠순 등이 돌아와 장차 당나라와 경계를 확정하려 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게 되어 있었다.”[8]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당태종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 공주에 웅진도독부, 심지어 경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이라면서 패망한 나라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만들어서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놓고 백마(白馬)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며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맹세하도록 강요하고 이미 점령한 백제 영토를 모두 웅진도독부에 돌려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보낸 <답장>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과 함께 신라가 당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싸웠는지 설명한 다음 “오호라! 두 나라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부려먹더니, 들짐승이 없어지자 삶아 먹히는 사냥개 처지가 되고 말았구나!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9]와 같은 상을 받았고, 당나라를 위해 희생한 신라는 이미 정공[10]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도다.”[11]
상황이 이리되자 문무왕은 당나라와 전쟁에서 고구려 유민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려고 했다. 『삼국사기』<문무왕 10년(670)>에는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12] 고구려 유민을 웅진도독부가 있는 공주와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의 턱밑 금마저에 배치하고 꼭두각시 나라 고구려를 세워서 안승을 왕으로 책봉한 것이다. 이 조치를 당나라가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했는지 설인귀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고구려 안승은 아직 나이도 어린놈이고, 남아 있는 고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절반으로 줄어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나라를 맡는 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가 군함에 돛을 활짝 펴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안승이 지난날 화살에 맞은 물새 신세가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차마 병사를 내보내 체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외부 응원 세력이라고 믿어 의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13]
설인귀는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안 되는 안승 따위를 외부 응원 세력이라고 의지하는 문무왕이 한심하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자신의 불편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당나라가 한반도를 공략한 근본 이유는 신라나 백제 같은 작은 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북쪽에서 패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것인데, 문무왕이 금마저에 고구려국을 되살려 놓았으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금마저는 백제 최후의 수도가 있었던 부여에서 35km, 웅진도독부가 있는 공주에서 55km 남쪽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소백산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남원, 함양, 거창, 합천이 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치를 때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전적지(戰迹地)로 유명한 곳인데 이 통로는 공주에서 경주로, 경주에서 공주로 쳐들어가는 우회로(迂廻路)이기 때문이다.
신라군은 당군(唐軍)과 전쟁에서 상주에서 보은을 통과하는 통로를 이용해 웅진도독부를 공격했다. 공주와 부여의 턱밑 금마저에 고구려 유민을 배치하여 고구려국을 세움으로 인해, 부여와 공주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唐軍)은 양쪽에서 적군을 맞이하는 불안한 형세가 조성된다. 거기에다 만약 당군이 남원에서 합천으로 통하는 우회로를 통해 경주를 공격한다면 후방이 위험해질 수 있는데, 그 통로 입구에 해당하는 금마저를 고구려군이 틀어막아 차단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또 금마저 고구려국은 고구려 유민 세력을 응집시키고 신라 조정에 협조하게 만드는 훌륭한 전략적 도구가 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많은 유민(遺民)이 신라로 유입되었는데, 고향을 잃고 떠돌면서 사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고구려 유민을 금마저 고구려국으로 모이도록 만들어서 신라와 힘을 합쳐 당군과 맞서 싸우는 우군(友軍)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옛터에도 고구려 부흥군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당군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는데, 금마저 고구려국은 부흥군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또 신라 조정에 협조하여 한 편이 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당군은 원정군(遠征軍)이기 때문에 본국으로부터 장거리 보급이 불가피하고 그 보급로(補給路)는 옛 고구려 영토인 남만주(南滿洲)와 북한(北韓) 땅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고구려 부흥군 활동이 활발해 지면 웅진에서 싸우는 당군은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어려워지고 전투 능력이 저하되어 신라군에게 유리한 형국이 조성된다. 그러므로 금마저 고구려국은 설인귀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각주 ------------------
[1] 行軍摠管. 신라 정벌군 총사령관.
[2] 昔爲忠義今乃逆臣恨始吉而終凶怨本同而末異.
[3] 入朝. 외국 사신이 (상국)조정 회의에 참석함.
[4] 先王貞觀二十二年入朝面奉太宗文皇帝恩勅朕今伐高句麗非有他故憐你新羅攝乎兩國每被侵陵靡有寧歲山川土地非我所貪玉帛子女是我所有我平定兩國平壤已南百濟土地竝乞你新羅永爲安逸垂以計會賜以軍期.
[5] 勅使. 황제의 칙령을 전달하는 사신.
[6] 扶餘隆. 615~682. 멸망한 백제 왕자. 당나라가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삼았다.
[7] 秋八月王與勅使劉仁願熊津都督扶餘隆盟于熊津就利山.
[8] 至七月入朝使金欽純等至將畵界地案圖披撿百濟舊地摠令割還.
[9] 雍齒, 한고조 유방을 배반한 적이 있었다. 후에 유방이 논공행상을 할 때 옹치를 제후로 삼아, 봉록을 받지 못할까 염려하는 장수들 불안을 달래주었다.
[10] 丁公. 항우의 장수로 전투에서 유방의 목숨을 살려준 일이 있었는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정공을 잡아 사형에 처해버렸다.
[11] 嗚呼兩國未定平蒙指蹤之驅馳野獸今盡反見烹宰之侵逼賊殘百濟反蒙雍齒之賞殉漢新羅已見丁公之誅.
[12] 遣沙飡須彌山封安勝爲高句麗王.
[13] 高句麗安勝年尙幼沖遺壑殘郛生人減半自懷去就之疑匪堪襟帶之重仁貴樓船竟翼風帆連旗巡於北岸矜其舊日傷弓之羽未忍加兵恃爲外援斯何謬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