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SRT>
울산역에서 SRT를 타다. SRT가 무엇인가? Super Rapid Train(초고속 철도)의 약자이다. KTX와 다른 그러나 비슷한 기차다. ‘케이티엑스’라는 발음보다 ‘에스알티’가 뭔가 산뜻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도시감성 urban sensiblity이다. 예약한 좌석을 찾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옆자리에 한 아가씨가 하얀색으로 깔맞춤한 스타일로 패션을 완성했다. 고급스런 재질의 추레닝복을 아래위 세트로 갖춰 입고 양말까지도 하얀색으로 매치했다. 아예 백설공주 컨셉이다. 귀에다 하얀 이어폰을 꼽고 유투브를 보면서 몸을 뒤로 제켜서 느긋하게 누워있다. 아마도 오늘 밤은 강남이나 홍대 앞 아니면 이태원에서 친구를 만나 즐길 모양이다. 오늘날 도시 감성의 30대 MZ 세대 부르조아 여성의 일상을 눈으로 읽는다. 눈으로 보는 걸 왜 읽는다고 하는가? 세상을 본다는 것은 세상이란 책을 읽는 거와 같다. 讀書는 讀世이다. 세상을 읽는다는 건 세상을 관하는 것이다. 讀世는 觀世이다.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벗어난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본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는 건 얼굴에 달린 두 개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세상을 벗어난 눈은 제 삼의 눈,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울산 시내를 벗어나자 겹겹의 산들이 한 꺼풀씩 벗어지면서 전방이 획 획 열리며 다가온다. 이따금 터널을 지나 고가 철로를 달린다. 옆자리의 아가씨는 유투브에서 펼쳐지는 영상을 꿈꾸듯이 본다. 동영상이 꿈인지, 꿈이 동영상인지. 달리는 기차 자체가 꿈이며 활동 영상이다. 차창에 빗겨 가는 풍경은 실시간 동영상이다. 모든 게 빗겨 가고 흘러가고 사라져 간다. 한 줌의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모든 게 흘러내리고 녹아내리고 소멸해간다. 시간이란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이다. 모든 순간이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있다’ 하면 벌써 그 흔적이 사라져 여기에 ‘없다’. 무엇이라 하는 즉시 더 이상 무엇이 아니다. 잡을 수 없고 붙들어 둘 수 없는 사물과 풍경과 경험이여. 잘 왔으니 잘 가라! 모두 안녕! 기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기차는 무상이다. 기차를 타는 경험이 무상이라면 기차에서 내린 땅 위도 무상이긴 마찬가지. 지구가 이미 허공에서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으니, 지구 자체가 벌써 無常 無住 無着이다. 모든 경험은 몰종적이다. 공간에 네 인생을 그리며 색칠해보라. 허공은 일점일획도 붙들어주지 않고 튕겨 버린다. 공간은 인간의 흔적을 허용하지 않는 청정무구이다. 물 위에 글을 써보라. 글자가 뭉개지고 흘러내려 흔적이 남지 않는다. 어느덧 하차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방금 출발한 것 같은데 벌써 도착했다. 출발과 도착이 동시다. SRT는 초고속 변화이다. Super Rapid Transformation이다. SRT는 초고속 무상이다. 현대인은 초고속 무상의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마치 설국열차를 타고 끝없이 맴도는 사람처럼. 그러나 현대인의 감정과 인식은 초고속 무상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차는 벌써 멀리 떠났는데 차를 놓친 사람들은 차를 잡으러 뒤쫓아 달려간다. 이게 초고속을 사는 현대인의 심리적 상황이다. 길손이 잠시 머물던 나무 밑을 떠나자 나뭇가지에 앉았던 나비도 덩달아 날아간다. 찰나를 함께 살았던 승객들이여, 안녕! SRT에서 내린다. 찰나의 화살로 영원의 과녁을 쏘아라, 에스알티SRT여!